역전(易傳) 1 / 이성복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 먹으니 맛이 좋았습니다 그날 아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 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를.. 좋은 글 2019.06.30
서시(序詩)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읍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읍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읍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 좋은 글 2019.06.29
새벽 세시의 나무 / 이성복 빛이 닿지 않는 깊은 품 속에서 새벽 세시의 나무는 죽음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보이는 공간으로 그의 죽음이 푸른 가지를 뻗고 나무는 가장자리의 잎들을 흔든다 의지와 자세를 잊고 새벽 세시의 나무는 서 있다 언제나 초록의 싱싱함을 만드는 죽음은 빛이 닿지 않는 깊은 품 .. 좋은 글 2019.06.29
분지 일기 / 이성복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십자가(十字架)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 좋은 글 2019.06.29
봄 밤 / 이성복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중년(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 좋은 글 2019.06.29
밥에 대하여 / 이성복 □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 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氷壁)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 좋은 글 2019.06.29
느낌 /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좋은 글 2019.06.28
높이 치솟은 소나무 숲이 / 이성복 높이 치솟은 소나무 숲이 불안하였다 밤, 하늘의 구름은 층층이 띠를 이루고 그 사이 하늘은 무늬 넣은 떡처럼 쌓였다 층층이, 하늘에 가면 말이 필요할까 이곳은 말이 통하지 않는 곳 이곳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집에 가면 오늘도 아버지 집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피를 본.. 좋은 글 2019.06.28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32 / 이성복 창문 두 쪽을 가득 채운 나무, 저렇게 많은 잎과 가지들이 흔들리자면 아름드리 둥치는 얼마나 비틀리겠는가 큰 것들은 다름아닌 수많은 작은 것들의 비애의 합침 더 세게 흔들리다 보면 몸통이 찢어지고 빠개질 것 같아도 질긴 비애의 세월에 겹겹이 둘러싸인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 좋은 글 2019.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