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4 / 이성복 밤 11시 혼자 화장실 창문을 열고 하늘로 치솟은 검은 나무를 바라본다 오래 고향에선 편지가 오지 않고 나는 늘 혼자다 혼자 잠자고, 혼자 밥 먹고......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내 바라보는 검은 나무에는 달빛 한 점 묻지 않고, 그 속에서 검은 잠을 자는 새들이라도 있.. 좋은 글 2019.06.28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 / 이성복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 아침부터 햇빛은 들창을 때리고 나뭇잎들은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무엇인가 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햇빛은 무게 없는 타격을 던지고 있다 무더기로 떨어지는 햇빛의 시체를 보며 이럴 때일수록 나는 안 지려고 조바심을 한다 무엇이 나를 이기려 드는지 모르지.. 좋은 글 2019.06.28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 / 이성복 노오란 꽃들이 종아리 끝까지 흔들리고 나는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간다 발정난 개처럼 알록달록한 식욕을 찾아, 지름길을 버리고 여러 개의 정원 같은 세월의 골목을 돌아 나는 추억의 식당으로 간다 내가 몸 흔들면 송진 같은 진액이 스며나오고, 발길에 닿는 것마다 조금씩 슬픈 울음을 .. 좋은 글 2019.06.28
이사 / 박영근 이사 /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 좋은 글 2019.06.27
남해 금산 / 이성복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좋은 글 2019.06.27
꽃 피는 시절 1 / 이성복 꽃 피는 시절 1 그 사흘 꽃들은 괴로움과 잠자고 제 그림자에 얼굴을 묻었다 꽃이 필 동안의 잔잔한 그리움을 지우고, 조바심을 지우고 꽃들이 흔들리는 경계 안으로 더 짙은 산그늘이 필요했다 줄기를 버리고 잎새를 버리고 떠도는 괴로움이 날벌레보다 가벼울 때 마주 보는 이여, 고이 .. 좋은 글 2019.06.25
길 1 / 이성복 길 1 그대 내 앞에 가고 나는 그대 뒤에 서고 그대와 나의 길은 통곡이었네 통곡이 너무 크면 입을 막고 그래도 너무 크면 귀를 막고 눈물이 우리 길을 지워 버렸네 눈물이 우리 길을 삼켜 버렸네 못다 간 우리 길은 멎어버린 통곡이었네 좋은 글 2019.06.25
강변 바닥에 돋는 풀 / 이성복 강변 바닥에 돋는 풀, 달리는 풀 미끄러지는 풀 사나운 꿈자리가 되고 능선 비탈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꽃들 고개 떨구고 힘겨워 조는 날, 길가에 채이는 코흘리개 아이들 시름없는 놀이에 겨워 먼 데를 쳐다볼 때 온다, 저기 온다 낡은 가구를 고물상에 넘기고 헐값으로 돌아온 네 엄.. 좋은 글 2019.06.15
강가에서 1 / 이성복 그대 목소리 듣고 강가로 나왔을 때 봄풀이 우거진 먼 언덕에서 내가 선 모래톱까지 하늘이 와 닿았네 강은 한 줄기 팍팍한 흐름 이었네 잔잔히 밀리는 물결은 떠나지 않았네 밀렸다가 다시 돌아 오는 모래들의 중얼거림, 그대 품은 너무 깊어 나는 거기 흐를 수 없었네 강은 굽이져 언덕 .. 좋은 글 2019.06.11
강 / 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希望)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絶望)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좋은 글 201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