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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밤 / 이성복

찰나21 2019. 6. 29. 18:19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중년(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봄밤엔 어릴 때 던져 올린 사금파리가

네 얼굴에 박힌다

봄밤엔 별을 보지 않아도 돼,

네 얼굴이 더욱 빛나 아프잖아?

봄밤엔 잠자면서 오줌을 누어야 해

겨우내 밀린 오줌을, 꼭, 그러나

이마는 물처럼 흐르고

미끄러운 유리 입술,



벽은 뚫고 나가기엔 너무 두껍고

누군가 새어들 만큼 얇아

아무래도 네 영혼은 누, 눈 감고 아, 아, 아옹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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