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Adaptation.

찰나21 2024. 5. 19. 13:51

 

 

 

 

 

 

어댑테이션 (2002/미국)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니컬러스 케이지, 메릴 스트립,

        크리스 쿠퍼, 틸다 스윈튼,

        캐라 시모어, 브라이언 콕스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어쩐지 소심하게 느껴지는 이름 모를 한 사내의 보이스 오버가 깔린다. 동시에 화면 하단에는 오프닝 크레디트가 작은 폰트로 깔린다. 이윽고 제목이 뜬다. "Adaptation." '각색'이라는 뜻이다. '적응'이라는 의미로도 이 영화에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된 뜻은 '각색'이다. 이제 짐작이 가나? 오프닝 크레디트를 왜 그런 방식으로 깔았는지? 그렇다면 마침표는 왜 찍었을까? 각색의 마무리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엔딩에 가면 영화 속 작가가 지지부진했던 각색을 마무리한다. 동시에 이것은 영화 밖 실제 작가가 각색을 완료했다는 앞선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적응이 끝났음을 뜻하기도 하겠지? 그렇게 속사포처럼 독백을 쏟아 내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소심 덩어리인 그는 찰리 코프먼이라는 이름의 각본가라고 자막으로 소개된다. 낯익은 이름 아니던가. 그 유명한 오스카 각본상에 빛나는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가이다. 이 영화 <어댑테이션>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전작이자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가이기도 했던 찰리 코프먼.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실제 찰리 코프먼이 본인으로 직접 등장하는 건 아니니까. 니컬러스 케이지가 찰리 코프먼을 연기한다. 더 놀라운 것은 도널드 코프먼이라고 찰리 코프먼과 외적으로 똑 닮은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둘은 쌍둥이로 나온다. 말하자면 니컬러스 케이지는 일인이역을 맡은 셈이다. 오프닝 크레디트에도 각본에 둘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가 있다. 심지어 엔딩 크레디트 마지막에는 도널드 코프먼에게 바치는 추모 자막마저 등장해서 나는 도널드 코프먼이 실존 인물인 줄 알았다. 근데 속임수였다. 도널드 코프먼은 작가가 허구로 가공해 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추모 자막은 그저 영화 속에서 죽은 도널드를 기리기 위한 일종의 장난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의 출발이 감독의 전작인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세트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찰리는 '난초 도둑'이라는 수즌 올리언이 쓴 소설의 각색 의뢰를 받는다. 이 영화 <어댑테이션>도 원작이 수즌 올리언이 쓴 '난초 도둑'이라는 제목의 소설이고 각색도 찰리 코프먼이 했다. 어찌된 일일까. 이게 찰리 코프먼의 재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찰리 코프먼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난초 도둑'이 아니라 <어댑테이션>이다. '난초 도둑'이라는 원작이 있고 그것을 각색하는 영화 속 찰리 코프먼이 있고 그 모두를 총괄하는 영화 밖 실제 찰리 코프먼이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찰리는 영화 밖 실제 찰리의 분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널드는? 창작의 고통을 내포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캐릭터 아닐까. 찰리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니까 도널드라는 이상적 자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찰리와 도널드는 쌍둥이 형제이지만 캐릭터가 완전히 상반된다. 찰리가 매사에 소심하고 부정적이며 나약하고 의기소침한 반면에 도널드는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사교적이고 능동적이다. 도널드는 찰리의 이러한 성격적 결핍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 찰리 코프먼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아무래도 이름이 같은 찰리 쪽에 가깝지 않을까. 영화 속 찰리는 작가 자신이고 도널드는 작가의 이상적 자아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영화 속에서 찰리는 도널드를 끊임없이 부러워한다. 심지어 도널드는 글쓰기마저 찰리를 앞지른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찰리보다 늦게 뛰어들었는데 말이다. 로버트 매키의 강연과 캐럴라인의 응원 게다가 찰리의 독설 덕분인지 도널드가 쓴 각본이 도리어 제작자 마티의 주목을 받는다. 남의 속도 모르고 각색에 애를 먹고 있는 찰리에게 마티는 도널드의 도움을 받으라며 찰리의 염장을 지른다. 기성 작가인 찰리로서는 굴욕에 다름 아니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바톤 핑크'가 떠올랐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 작가 바튼 핑크를 괴롭히는 인물의 이름이 찰리이고 니컬러스 케이지는 코엔 형제의 전작 '아리조나 유괴사건'에 출연했다) 차이점이 있다. '바톤 핑크'가 오리지널 각본을 쓰는 데 대한 고통이라면 이 영화 <어댑테이션>은 원작 소설을 각색하는 데 대한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바튼 핑크보다는 고통이 덜하지 않을까? 오리지널 각본 작업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아닌가. 과연 그럴까? 영화 속 찰리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 밖 실제 찰리는 진짜 괴롭지 않았을까? 물론 영화 속 찰리도 무지 괴로워한다. 성격의 영향도 크겠지만. 영화 속 찰리는 '난초 도둑'만 각색하면 되지만 영화 밖 실제 찰리는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찰리도 그려야만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영화 속 찰리도 각색의 또 다른 대상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보통의 영화는 '난초 도둑'이라는 원작이 있으면 그것을 각색하는 것으로 끝인데 이 영화는 하나의 레이어를 더 겹쳐 놓는다.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찰리 플롯이다. 게다가 찰리 플롯이 메인 플롯에 난초 도둑 플롯이 서브 플롯에 놓인다. 난초 도둑 플롯과 찰리 플롯이 병치되어 전개되고 난초 도둑 플롯이 끝나는 지점에서 반전이 벌어진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난초 도둑'의 저자 수즌 올리언은 남편과 소원해졌고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존 라로쉬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마약에도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이제 난초 도둑 플롯에 찰리 플롯이 침범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숨겨졌던 진실은 폭로되고 존과 도널드가 희생된다. 수즌은 존의 시체를 껴안고 오열하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에 몸서리를 치고 찰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드디어 각색 작업을 마무리한다. 결국 자신의 실제 경험이 그대로 각색에 반영된 것이다. 로버트 매키가 옳았다. 드라마를 강화해라. 현실 세계에서 진짜 아무 일이 없나. 엔딩만 잘 쓰면 히트 친다. 속임수는 쓰지 마라.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절대 쓰지 마라. 캐릭터가 스스로 변해야 한다. 찰리는 로버트 매키의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보이스 오버를 넣지 마라는 계명만 제외하고. 영화 밖 실제 찰리도 로버트 매키에게 영감이나 자극,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로버트 매키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는 브라이언 콕스가 로버트 매키를 연기한다. 

 

이 영화에는 실제 인물들이 꽤 등장한다. 존 말코비치, 존 큐잭, 캐서린 키너는 본인으로 등장한다. 이들 모두 감독의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다. 깨알 같은 조역들도 빼놓을 수 없다. 매기 질렌할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도널드의 여자친구로 커티스 핸슨은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수즌 올리언의 남편으로 데이비드 O. 러슬은 저녁 식사 손님으로 출연한다. 재밌는 건 극 중에서 부부로 출연한 커티스 핸슨과 메릴 스트립은 이전에 '리버 와일드'에서 감독과 배우로 작업한 이력이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O. 러슬은 감독과의 친분으로 출연했다. 데이비드 O. 러슬이 연출한 '쓰리 킹즈'에서 스파이크 존즈가 배우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주연을 맡은 니컬러스 케이지의 쌍둥이 연기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오스카 남우 조연상에 빛나는 크리스 쿠퍼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가 연기한 존 라로쉬는 일단 앞니가 없는 외적으로도 차별화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난초에 대한 집요한 열정과 불우했던 과거의 상처는 묘한 매력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아직도 '아메리칸 뷰티'에서 그가 남긴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본 아이덴티티'에서도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인상적이었다. 외모 탓인지 주로 선한 역할보다는 개성 있는 조연으로 어필하는 배우 같다. 메릴 스트립은 역시 말이 필요 없는 배우다. 비중은 의외로 적었지만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예술이 되는 연기를 나는 보았다. 심지어 그녀는 독백마저도 흡인력이 있었다. 틸다의 출연은 의외였고 브라이언 콕스는 등장 횟수가 단 세 장면에 불과하지만 씬 스틸러급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에서는 강렬한 카리스마로 압도했다면 술집에서 찰리에게 나긋나긋하게 조언하는 장면에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압도한다.
 
찰리는 자신의 각본이 진부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지만(이것은 실제 찰리 코프먼의 고민이기도 할 테지) 이 영화 <어댑테이션>은 20년도 더 지난 영화인데 지금 봐도 진부하지 않다. 오히려 요즘 영화들보다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연출도 그렇다. 찰리 코프먼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각본을 영화로 만들 때 시각적인 연출에 탁월한 감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스파이크 존즈와 미셸 곤드리가 바로 이 천재 작가의 선택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들이다. 둘 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다. '이터널 선샤인'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찰리 코프먼은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다.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나 고통과 희열은 비례하는 법. 지적 유희를 자극하는 작가다. 영화 속 찰리를 봐도 짐작이 되지만 그는 분명 괴짜 기질이 다분한 너드일 것이다.  
 
사실 지금 내 나이에 이 영화는 젊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와 원색적인 색감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톤이 밝고 싱그러우며 파릇파릇하다.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영화는 아니다. 특히 난초 도둑 플롯은 자못 진지하다. 수즌과 존이 이끌어 가는 이 플롯은 한 편의 멜로 영화를 방불케 한다. 심지어 난초에 대해 설명하고 묘사하는 장면은 우아하고 탐미적이며 시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유령처럼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어서 '유령 난초'인가. 유령 난초에 매혹된 사람과 유령 난초에 매혹된 사람에 매혹된 사람과 유령 난초에 매혹된 사람에 매혹된 사람에 매혹된 사람의 이야기.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세트장(영화)에서 시작된 영화는 도로(현실)에서 끝을 맺으며 각색을 마무리한다. "Adaptation." 영화는 현실과 허구가 뒤죽박죽 섞이지만 상관없다. 그것조차도 할리우드라는 허구의 세계의 일부이니까. 
 
사족, 극 중 찰리는 각색 작업을 할 때 종종 녹음기를 사용하는데 녹음기 브랜드가 '소니'라고 되어 있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왜냐고? 이 영화가 컬럼비아 픽처스 작품이거든. 바로 소니가 인수한 회사다. 

 

 

★★★☆
어떻게 주인공을 쌍둥이로 설정할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메타 서사를 도입할 생각을 했을까? 작가의 탁월한 발상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덕분에 입체적인 각본으로 완성되었다.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듯이 각색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삶은 또 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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