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JSA (2000/한국)
장르 액션, 드라마, 스릴러, 전쟁
감독 박찬욱
출연 이영애, 이병헌, 송강호, 김태우,
신하균
감상평
나의 평가 ★★★★☆
박찬욱의 시작. 데뷔작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욱의 시작이기만 할까. 이병헌, 송강호, 신하균, 이영애 이들 모두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런 각별함 때문인지 박찬욱과 이들의 협업은 비단 이 영화로만 그치지 않는다. 바로 다음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이후 '박쥐'에서 박찬욱은 송강호, 신하균과 작업하고 '쓰리, 몬스터'에서는 이병헌과 짧은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복수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로 이영애와 오랜만에 함께 한다.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이 명필름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업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의 박찬욱을 생각하면 어떻게 명필름과 협업을 했을까 싶지만 휴머니즘이 녹아 있는 드라마라는 요소가 이 둘의 조합을 가능케 했다. 사실 박찬욱에게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생존이 걸린 작품이었다. 이전에 두 영화를 처참히 말아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영화마저 실패하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접어야 할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전략은 대중성과의 타협이었다. 자신의 작가적 개성을 가급적 누르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 그럼에도 영화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박찬욱의 인장이 여실히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대박이 났고 불과 1년 만에 이전에 '쉬리'가 세운 최다 관객 수 기록을 갈아 치웠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공이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상업적 성공만 거둔 '쉬리'와 달리 상업성뿐만 아니라 작품성에서도 성공을 이룬 영화였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웰메이드 영화였던 것이다. 박찬욱은 기사회생했고 새로운 작가의 출현에 영화계는 떠들썩했다. 모두가 그의 차기작을 고대했지만 이 반골 기질 가득한 혈기왕성한 천재 감독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는 선택을 하는데 그게 바로 저주받은 걸작 '복수는 나의 것'이다. 전작의 성공이 독이 된 건지 감독의 개성이 지나치게 도드라진 '복수는 나의 것'은 작품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처참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다시 박찬욱을 사지에 몰아넣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박찬욱이 아니지. 그는 절치부심하며 회심의 일격을 노리는데 그것은 한국 영화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외국에서 한국 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영화. '기생충' 이전에 이 영화가 있었다. 바로 '올드보이'. 그는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교묘한 줄타기로 관객과 평단을 모두 만족시키며 영화사적으로 영원히 남을 희대의 걸작 '올드보이'를 내놓으며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의문이 든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없었다면 지금의 '올드보이'가 있었을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연출, 연기, 각본, 음악, 촬영 등등 거의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벽의 하모니를 이룬다. 이영애는 연기력 때문이 아니라 혼혈이라는 역할상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을 찾다 보니 캐스팅된 걸로 보이는데 이영애의 다소 설익은(?) 듯한 연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주요 남자 배우 넷의 연기는 최상급이다. 송강호야 의심의 여지가 없고 신하균은 당시 무명 신인이었는데 감칠맛 나는 코믹 연기를 잘 소화해 내 자칫 무게감에 짓눌릴 여지가 다분한 영화에 윤활유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며 될성부른 떡잎임을 예감케 했다. 김태우도 의외의 호연을 보여 주었고 무엇보다 이병헌은 왜 이병헌인가를 이때도 증명하고 있었음에 감탄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박찬욱은 기본기가 탄탄한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박찬욱뿐만 아니라 봉준호, 허진호, 김지운 등등의 과거 세대의 감독들은 대개 기본기가 탄탄하다. 반면 요즘 세대의 감독들한테서 받는 대체적인 인상은 기본기가 갖춰져 있지 않은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화할 순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뜸이 덜 들고 방만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 영화도 그렇지만 박찬욱 영화의 장르의 원형은 스릴러다. 그는 기본적으로 스릴러라는 구조를 토대로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 멜로물인 '헤어질 결심'조차도 스릴러 구조를 택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로 하여금 영화감독을 최초로 꿈꾸게 만든 영화가 다름 아닌 히치콕의 '현기증'이니까. 스릴러이지만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곳곳에 박찬욱식 유머가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지뢰가 터질 때마다 관객은 무장 해제되며 숨통이 트인다. 그놈의 지뢰가 극 중에서는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방금 비유로써 든 지뢰 말고 실제 지뢰.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뢰로 만난 이들은 지뢰가 터지지 않음으로써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되고 지뢰가 불꽃놀이처럼 대량으로 터지면서 관계도 작렬하게 터진다. 진정 지뢰가 문제였을까. 여기서 지뢰는 이념을 뜻한다. 이념이라는 지뢰가 이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낳은 희생양들이다. 그놈의 이념이 끝내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 갈라놓았다.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나라. 이 뼈아픈 아이러니. 젊은이들이 통일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느낀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를 발매한 지 정확히 30년이 지났다. 지금은 어떤가. 통일이라는 말조차 꺼내지도 않는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아예 우리들 머릿속에서 삭제됐다. 우리 살기도 바쁘다. 북한은 딴 나라다. 한민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이해를 따지는 게 우선이 되어 버렸다. 현실이 당위를 점유한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 제작된 영화다. 이 무렵이 소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태동하는 시기였고 이러한 흐름은 참여 정부에 이르러 만개했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언감생심 절대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이 사이에 터져 나왔다.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포함하여 '박하사탕',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등등. 특히 '웰컴 투 동막골'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영화라고 생각될 만큼 유사점이 많다. 남북한 병사들이 처음엔 대치하다가 이념을 뛰어넘어 우정을 나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두 영화에 모두 신하균이 출연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북한군으로 '웰컴 투 동막골'에서는 국군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 사이 신하균은 조연에서 주연으로 성장했고 말이다. 전에 '웰컴 투 동막골' 개봉 당시 영화를 둘러싸고 이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토론에 홍준표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도 마찬가지다. 남북한 병사들이 우정을 나누는 게 대체 이념과 뭔 상관이란 말인가. 니들은 가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관계를 단절할 건가. 이념이 같은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나. 이념이 됐든 교리가 됐든 그것이 사랑보다 우선시되는 순간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이 영화 보고 누가 월북이라도 할까 봐? 대중을 무시하는 우매한 생각을 가진 위정자들은 반성하라.
이 영화는 크게 드라마 플롯과 스릴러 플롯으로 나뉜다. 네 명의 남북한 병사들이 우정을 나누는 서사가 드라마 플롯이고 장 소령을 중심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서사가 스릴러 플롯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알았다. 남자들끼리의 우정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진하고 짠하다는 것을. 또한 선을 넘는다는 것에 대해서. 왜 그것이 마치 금단의 열매라도 따 먹는 일처럼 돼버렸을까. 고작 선일 뿐인데. 그러나 고작 선이라고 하기엔 선을 넘은 대가는 실로 가혹하고 처참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돌아왔지만 이들의 관계는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 박찬욱은 메타포의 달인답게 라디오를 통해 그것을 표현한다. 라디오가 역방향으로 바뀔 때 남성식은 처음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북으로 향한다. 다시 라디오가 역방향으로 전환될 때 남성식은 트리거를 당겨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남으로 향한다. 그것은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남성식의 말로는 남성식이 이수혁에게 군 생활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면이나 남수정이 오빠 남성식에 대해 장 소령에게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흔히 말해 남성식은 관심 병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그는 트리거가 한껏 젖혀져 있었다. 그가 그렇게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방아쇠를 연신 당긴 것도 그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이수혁은 어떤 인물인가. 남성식이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는 의기소침형 인간이라면 이수혁은 외강내유형 인간이다. 장 소령은 이수혁이 오경필보다 힘이 센 것 같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이수혁은 자칭 속사수라며 오경필 앞에서 뻐겼지만 실전에서는 뽑는 속도 따윈 중요치 않으며 얼마나 침착하고 대범한가가 중요하다는 오경필의 말에 금세 꼬리를 내린다. 처음에 지뢰를 밟았을 때도 이수혁은 북한군인 오경필과 정우진한테 살려 달라며 울먹인다. 오경필과의 대질 심문에서도 비교적 대담한 오경필과 달리 이수혁은 남성식이 투신 직전 조사 받는 영상이 화면에 나오자 심리적 압박을 느끼며 제발 그만하라고 울먹인다. 결정적으로 이수혁은 최 상위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은 죄책감의 방아쇠였다. 정우진의 죽음이 남성식의 방아쇠가 아니라 이수혁의 방아쇠로 인한 것이라는 장 소령의 한마디가 이수혁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장 소령은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남한군 둘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했다. 마지막 장 소령의 눈물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네 명 중에서 오경필만 생존에 성공했다.
영화 초반 표 장군은 장 소령에게 세상에는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 이 둘만 있을 뿐 중립 따위(?)는 여기 설 자리가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 후반부에 장 소령은 인민군의 딸이었음이 밝혀진다. 흔히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되묻는다. 너 정말 중립적이야? 그리고 자문한다. 중립적인 게 가능할까? 혹 비겁의 방편 아닐까?
박찬욱은 거장답다. 보통의 감독이라면 이수혁의 자살과 장 소령의 눈물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여운 있는 훌륭한 엔딩인데 박찬욱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엔딩을 남기고야 마는 것이다. 덕분에 충격적인 엔딩으로만 머무를 뻔한 엔딩은 훈훈하면서도 가슴 먹먹한 짜릿한 전율의 엔딩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흑백 사진 한 장. 거기에는 오경필, 정우진, 남성식, 이수혁 이 네 사람이 다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 않고 모두 카메라를 향해 있으며 인물들은 각각 거리를 두고 따로 존재한다. 인연의 끈은 영화 밖 카메라가 각각의 네 사람을 하나씩 고루 비추면서 비로소 연결되고 이들이 장차 운명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임을 뒤늦게 암시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영화의 제목은 <공동경비구역 JSA>이지만 자막으로 등장하는 낱말의 순서는 순차적이 아니라 거꾸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Area(구역)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Security(경비), 마지막으로 Joint(공동)가 나온다. 어떻게 된 것일까. 뚜렷하게 그어진 'Area'에서 만나지 못하고 판문점에서 마주 서서 'Security'를 서며 경계선에 바짝 다가선 이들은 드디어 경계선을 넘어 서로 이물없이 'Joint'한다.
흑백 사진 말고 영화에서 한 장의 사진이 더 있다. 남성식이 찍은 이수혁과 오경필, 정우진의 다정한 어깨동무 사진. 뒤늦게 울컥했다.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남북한 병사가 모자를 서로 바꿔 썼다는 것을. 정우진의 말대로 이들이야말로 분단의 반세기 그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넘어 통일의 물꼬를 트는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잘나 빠진 이념이 이들을 갈라놓았고 지금도 지역을 갈라놓고 세대를 갈라놓고 가족을 갈라놓는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도리어 더 나빠졌다.
누군가는 박찬욱에게 새디스트라고 하고 누군가는 심지어 백정의 뇌를 가진 감독이라는 폭언까지 퍼부었지만 나는 알지. 폭력성 이면에 도사린 그의 감성적인 면모를. 돌이켜 보라.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퀴어 코드로도 읽을 수 있는 남북한 수컷 군바리들의 사랑이고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에 수간(獸姦)마저 등장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SF적인 무대를 깔고 펼치는 정신병자 커플의 사랑이고 '헤어질 결심'에 이르면 대놓고 용의자와 형사의 정통 멜로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하다못해 하드보일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조차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청각 장애인 류와 무정부주의자 영미의 건조한 멜로를 탄지지간에 보여 준다.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고 정상에서 이탈한 변방의 사랑을 그리지만 그는 줄곧 멜로를 찍어 왔다. 그러니 정정해야 한다. 박찬욱은 로맨티스트이다. 비주류 로맨티스트.
찰나는 영원이다. 나의 삶도 흑백 사진 한 장으로 남으면 어떨까. 거기에 나만 홀로 담기지 않길 바라며.
사족,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그리고 '헤어질 결심'에서도 등장한 개미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된다. '헤어질 결심' 인터뷰에서 박찬욱은 그 이유를 밝혔는데 개인적으로 개미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란다. 마치 브루스 웨인이 박쥐에 대한 트라우마를 배트맨이 되어 극복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
오경필은 담배를 끊었고 이수혁은 목숨을 끊었다. 오경필은 라이터를 이수혁에게 주었고 이수혁은 라이터를 버렸다. 이수혁의 영혼을 재로 만든 것은 라이터가 아니라 말 한마디였고 라이터는 영영 켜지지 않았다. 아득히 들려오는 오경필의 휘파람 소리와 김광석의 노래 그리고 영전에 놓인 초코파이가 망자의 넋을 달래 주기를. 언제나 그렇듯 영정 사진 속 너는 더없이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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