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더 하우스 (1999/미국)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라세 할스트롬
출연 토비 맥과이어, 차를라이즈 세런,
델로이 린도, 폴 러드, 마이클 케인,
제인 알레그잰더, 캐시 베이커,
키런 컬킨, 케이트 넬리건, 헤비 D,
K. 토드 프리먼, 파즈 데 라 후에르타,
에리카 바두
감상평
나의 평가 ★★★★☆
모든 영화는 성장 영화다. 또한 모든 영화는 로드 무비다. 월리와 캔디의 차에 동승하는 호머. 세인트 클라우즈 식구들의 따듯한 배웅을 뒤로 하고 호머는 세인트 클라우즈를 떠난다. 이윽고 캔디와 호머를 실은 월리의 차가 시원하게 길을 가로지르고 나는 가슴이 뻥 뚫리는 전율을 느꼈다. 해방감이라고 할까. 호머도 나와 같은 감정이었겠지? 세인트 클라우즈는 호머에게 고향이자 집이며 직장이고 전부다. 그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아주 어렸을 적 두 번 입양되어 떠난 적은 있지만 잠깐이었고 게다가 갓난아기였을 때니까 결론적으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셈이다. 그런 그가 떠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거창한 이유랄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문득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러나 난데없는 스파크는 아니었다. 스파크가 일어날 조짐은 있어 왔다. 그러다 월리와 캔디를 만나며 팍하고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좁디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처음으로 그에게도 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체 없이 떠난다. 라치 박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래서일까? 호머가 떠날 때 라치 박사는 배웅하지 않고 창밖으로 호머에게 외롭고 쓸쓸한 혼자만의 작별 인사를 보낼 뿐이다. 마이클 케인의 명연이 돋보인다. 호머에 대한 섭섭함이 그득한 라치 박사의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다. 호머가 가는 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렇게 호머의 오디세이는 시작되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ider House Rules. 번역하면 ‘사과 주스 농장의 규칙들’이 되겠다. 이게 뭔 소리지? 당장 제목만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것은 제목의 출처는 알겠는데 왜 이 제목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규칙에 관한 영화다. 때로는 규칙을 깰 필요가 있다는 것. 세인트 클라우즈는 당시 미국에서도 드물게 낙태가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곳이다. 라치 박사는 낙태 옹호론자다. 반면 그의 제자 호머는 낙태 반대론자다. 보통 젊은이는 진보적이고 늙은이는 보수적이기 마련인데 뭔가 거꾸로 된 느낌이랄까? 더구나 지금도 낙태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데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라치 박사가 가는 길은 외로운 가시밭길이 아니었을까? 낙태 옹호론과 반대론을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는 종교적 성향이다. 라치 박사는 탈종교화된 인물이고 반대로 호머는 라치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선교쟁이라 할 만큼 종교색이 배어 있다. 호머에게 낙태는 종교적 도그마를 건드리는 행위이지만 라치 박사에게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라치 박사는 규칙이나 법을 따르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규칙을 지고지순한 가치로 받들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거스를 수도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호머를 자신의 후임자 자리에 앉히려고 거짓말과 학력 위조도 서슴지 않는 그인데 말이다. 그뿐인가. 호머를 전쟁터에 안 보내려고 호머의 엑스레이 사진을 퍼지의 엑스레이 사진으로 바꿔치기한 전과도 있다. 윤리적 혹은 도덕적 잣대로 보면 문제적 인간으로 비춰질 여지도 있겠으나 외려 난 그가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결국 이 모든 게 호머에 대한 사랑 때문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라치 박사와 호머는 사제 관계이지만 유사 부자 관계이다. 또한 라치 박사와 앤절라 간호사는 직장 동료 관계이지만 유사 부부 관계이고 로즈 씨와 로즈 로즈는 부녀 관계이지만 유사 부부 관계이다. 이 영화는 규칙 파괴자들에 관한 영화다. 호머가 사과 주스 농장에 처음 들어온 날 일꾼들 중 한 명은 유일하게 글을 읽을 줄 아는 호머에게 벽에 붙어 있는 흰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어 보라고 말하고 호머는 차근차근 읽어 나간다. 바로 이 영화의 원제를 뜻하는 사과 주스 농장의 규칙들에 관한 내용이다. 흥미롭게도 호머가 사과 주스 농장을 떠나는 날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재등장한다. 다만 이번에는 끝까지 읽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로즈 씨는 처음에 읽었을 때보다 더 강력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규칙은 우리가 만든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어떤 외부의 절대자가 임의로 만든 바보 같은 규칙을 우리는 무조건 순응하며 따라야만 하는가. 사실 별 내용도 없다. 막상 읽어 보니 황당할 정도의 허무감을 자아내는 낙서에 불과했다. 호머는 벽에 붙어 있는 그 빌어먹을 흰 종이를 떼어 내 종이 뭉치로 만들어 난로에 던져 태워버린다. 로즈 로즈는 로즈 씨를 칼로 찌르고 농장을 떠난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호머에게 로즈 씨는 자신의 불찰이라며 경찰이 오거든 자살이라고 진술해 달라고 부탁한다. 때로는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규칙을 깰 필요가 있다는 말을 남기며. 그것은 딸을 범죄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절박한 의지이자 딸에게 범한 씻을 수 없는 악행에 대한 아버지의 속죄 행위이다. 로즈 씨는 로즈 로즈와 성관계를 하여 로즈 로즈를 임신시켰다. 호머는 자신의 신념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낙태 반대론자였던 호머는 자신의 규칙을 깨고 라치 박사가 예비해 준 왕진 가방을 연다. 라치 박사는 어떻게 알았을까?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언자라고 할 수밖에. 캔디는 월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낙태하고 월리가 입대하자 호머와 연인 관계를 형성한다. 자신은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한다는 이기적인 핑계를 대며. 호머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있는 여자를 알면서도 탐했으니까. 월리가 돌아오면서 이들 셋의 관계도 원위치로 돌아온다. 비록 하반신 마비로 돌아오긴 했지만 캔디에게는 월리가 있으니 호머는 필요 없게 되었다. 순간에는 진심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캔디에게 있어 호머는 월리의 공백을 잠시나마 메워 주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호머는 농장을 떠난다. 월리는 돌아왔고 캔디는 월리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로즈 로즈는 낙태를 하고 아버지를 찌르고 농장을 떠났고 로즈 씨는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라치 박사의 부고 소식이 결정적이었다.
특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로즈 씨의 말버릇인데 본인이 말을 하고 나서 상대에게 자꾸 확인을 하더라는 것이다. 맞지? 그렇지? 뭐 이런 식으로. 자기 확신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본인의 의견에 상대도 동조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심리적 구걸일까?
원제는 The Cider House Rules. 근데 왜 한국에서는 <사이더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을까? 그야 뻔하지. 제목이 길다는 이유에서지. 동일한 예로 2001년도 영화 ‘에너미 라인스’를 들 수 있다. 원제는 ‘Behind Enemy Lines’이다. 당시에는 외국 영화를 수입해서 원제가 세 어절 이상이 되면 두 어절까지로 제한한 제목으로 개봉하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사이더 하우스>는 당시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후보에 오른 여타의 작품들에 비해 의외의 후보라는 평을 받았던 것으로 난 기억한다. 짐작은 간다. 그들의 속내는 이게 아니었을까? “그저 잔잔하고 평이한 드라마에 불과한 영화를 왜 후보에 올렸을까?” 여타의 후보들에 비하면 밋밋해 보이고 무난하고 별 개성이 없는 작품으로 보였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난 그러한 평가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피상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작품상은 ‘아메리칸 뷰티’가 가져갔고 거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마이클 케인은 <사이더 하우스>로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는데 이 또한 의외라는 평가가 있었다. 당시 그와 같이 후보에 올랐던 후보 명단을 보면 짐작은 간다.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역시 ‘식스 센스’의 헤일리 조얼 오스먼트. 지금은 폭망 했지만 그때는 할리우드에서 제일 핫한 아역 스타였다. 최연소 남우 조연상 수상에 도전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후보들 중 최고령자인 마이클 케인에게 트로피가 돌아갔다. 역시 경로사상이 투철한 오스카. 그 외의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겉멋만 잔뜩 든 오만방자하고 못돼먹은 집 나간 부잣집 망나니 아들을 잘 소화한 ‘리플리’의 주드 로,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일생일대의 충격적 연기 변신으로 혼신의 연기를 보여 준 ‘매그놀리아’의 톰 크루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덩치 큰 울보 사형수로 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그린 마일’의 마이클 클락 덩컨. 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마이클 케인의 연기는 일견 심심해 보이고 강렬함이 덜하며 화제성도 떨어진다. 이쯤에서 2003년 오스카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당시 남우 주연상은 ‘피아니스트’의 어드린 브로디에게 돌아갔다. 이라크 전쟁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깜짝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는 ‘갱스 오브 뉴욕’의 대니얼 데이-루이스를 남우 주연상 수상자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때 오스카의 선택에 반기를 든다. ‘갱스 오브 뉴욕’의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받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이해가 간다. 정말이지 ‘갱스 오브 뉴욕’에서 대니얼 데이-루이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압도적인 연기를 펼쳐 보였으니까. 수상하고도 남을 만한 연기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추측대로 대니얼이 받았다면 그날의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스카는 간혹 마치 이벤트처럼 이변을 연출하곤 하는데 그때가 그랬다. 지금도 당시 어드린 브로디의 수상 소감은 오스카 역사상 기억할 만한 수상 소감들 중 하나로 꼽힌다. 양키들의 위대함은 시상식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 어드린 브로디의 수상은 극으로 비유하면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인 셈이다. 여기서 의문 하나. 그렇다면 오스카는 단지 이벤트 연출을 위해 대니얼은 젖혀 놓고 브로디를 선택한 것일까?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자극적인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맛은 있을지 몰라도 몸에는 해롭다. 연기와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개성 강한 캐릭터나 악역 그리고 블록버스터 같은 템포가 빠르고 즐길 거리가 많은 영화에 우리는 쉽게 몰입한다. 단시간에 관객을 빨아들이는 연기와 영화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기가 뛰어난 연기이고 그런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어려운 연기는 연기 같지 않은 연기다. 관객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만드는 연기. 천천히 조금씩 쥐도 새도 모르게 스며들어 이내 온몸을 적시고야 마는 연기. 그런 연기가 훌륭한 연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오스카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이더 하우스>는 연출, 연기, 내러티브, 음악, 촬영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고른 완성도를 지닌 감동적인 드라마로서 작품상 후보에 오를 만한 자격이 충분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낙태라는 껄끄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마냥 심각하고 경직되게 접근하지 않고 유머와 감동을 버무려 유연한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측면에서 더없이 유의미한 작품이다. 마이클 케인은 오스카가 좋아하는 감동적인 연기를 선보여 점수를 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오스카는 기교가 뛰어난 연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연기를 좋아한다. 거기에 딱 부합하는 연기를 마이클 케인이 보여준 것이다.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는 과장되지 않고 절제되며 안정적이고 농익은 내공 깊은 연기는 충분한 수상감이었다. 라치 박사가 죽는 장면에서 보여준 연기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라세는 여기서 놀랍게도 부감으로 라치 박사의 죽음을 잡아내는데 그래서일까? 내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후보에도 못 올랐지만 주인공을 맡은 토비 맥과이어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토비의 연기가 너무 엉성하고 부족해 보였다. “이 배우는 그저 소년성이라는 무기 하나로 먹고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반복 관람하면서 이 배우의 연기에 대해 차근차근 곱씹게 되었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만드는 연기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이 배우의 매력도.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며 연기가 특출난 것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너무도 평범한 이 배우의 쓸모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앞서 언급했듯이 소년성이다. 기본적으로 생글생글 웃는 상이라 친근함을 유발한다. 카리스마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낮게 읊조리는 나른한 말투와 때 묻지 않은 순수성은 타 배우들과는 차별화된 그만의 고유한 매력이다. 분명 연기를 잘한다는 평가는 받기 힘든 캐릭터지만 어쩌면 이런 연기가 더 어려운 연기일 수 있고 그런 면에서 평가를 받을 만한 배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당시만 하더라도 ‘스파이더맨’으로 뜨기 전이기 때문에 인지도가 있는 배우는 아니었다. 그건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유명한 배우들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차를라이즈 세런과 폴 러드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 나온 주요 배우들 모두가 이후에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온다는 것이다. 토비는 ‘스파이더맨’이 되었고 폴 러드는 ‘앤트맨’이 되었으며 차를라이즈 세런은 ‘이온 플럭스’가 되었고 마이클 케인은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 배트맨의 집사로 나온다. 델로이 린도는 슈퍼히어로는 아니지만 이연걸이 액션 히어로로 등장하는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 출연한다. 어지간하면 다 걸린다. 슈퍼히어로 영화를 안 거친 배우를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다. 얼마만큼 이런 유의 영화들이 할리우드에서 많이 생산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내 기억으로는 2000년도에 나온 ‘엑스맨’을 기점으로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코믹 북을 원작으로 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고 사실상 할리우드를 산업적으로 먹여 살리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퇴보를 가지고 왔다는 것. 이것이 할리우드의 현주소다. 이미 할리우드는 망조가 들었다.
당시만 해도 차를라이즈 세런이 이렇게 명성 있는 배우가 될지 예상했을까? 불과 몇 년 뒤 그녀는 오스카를 거머쥐고 흥행작도 찍으며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A급 배우 반열에 오른다. <사이더 하우스>에서 그녀가 금발에 희멀건 얼굴을 하고 장대 같은 키로 자신보다 작은 토비 맥과이어에게 기습적으로 덮치듯 업히는 바닷가 장면은 이상한 부조화의 느낌을 준다. 순간 토비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보인다. J.K. 시먼스다. 얼핏 모르고 스치고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엑스트라 수준의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지금의 그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다. 그는 여기서 캔디의 아버지로 나온다. ‘스파이더맨’에서 그와 토비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하다. 사적 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살가운 관계에서 앙숙 관계로의 이동. 토비는 리오와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재밌는 것은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리오가 라세 할스트롬과 작업을 하고 그로부터 6년 후에 토비가 같은 감독과 이 영화 <사이더 하우스>를 찍었다는 사실. 또 하나, 스파이더맨 역할도 원래는 리오한테 먼저 출연 제의가 갔었다는 것. 다행히도 리오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거절을 하고 토비는 전 지구적인 스타가 된다. 이래서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의도는 알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리오가 토비에게 안겨다 준 우정의 선물이 되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선물. ‘스파이더맨’은 샘 레이미의 작품이다. ‘스파이더맨’ 이전에 ‘퀵 앤 데드’라는 영화가 있었고 이것 역시 샘 레이미의 작품이다. 바로 여기에도 리오가 출연한다. 혹시 리오가 토비에게 감독 추천이라도 하는 것일까? 우연치고는 희한한 인연이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개츠비’로 둘은 오랜만에 한 영화에 같이 나온다. 리오와 <사이더 하우스>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전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폴 러드와 공연하였고 이후에 ‘인셉션’에서는 마이클 케인과 같이 작업을 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길버트 그레이프’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사이더 하우스>도 원작자가 직접 각색까지 맡았다. 심지어 오스카 각색상도 받았다. 음악은 레이철 포트먼이 맡았는데 특히 이 영화에서 테마곡이라고 할 수 있는 ‘Main Titles’는 내 MP3에 저장되어있을 만큼 귀에 익은 곡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스코어가 다양하지 않고 테마곡의 깨알 같은 변주로 일관하는 듯하여 질린다는 느낌을 준다. 1년 뒤 레이철 포트먼은 라세 할스트롬과 ‘초콜렛’에서 다시 만난다. 개인적으로 음악은 ‘초콜렛’이 <사이더 하우스>보다 더 좋다. 물론 영화는 전자나 후자나 막상막하하다.
보면서 “이게 미국 영화지”라고 생각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의 영화랄까. 그러나 마냥 잔잔한 영화는 아니다. 고아, 낙태, 근친상간과 같은 민감하고도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라세 할스트롬의 영화가 그렇다. 언제나 그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들이 주류 사회와 어떻게 마찰과 갈등을 빚어내며 공생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담담하고도 예리한 시선으로 프레임에 담는다. ‘길버트 그레이프’에는 지적 장애인 남동생과 뚱보 엄마가 ‘초콜렛’에는 무신론자와 집시가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는 탈출의 영화다. ‘초콜렛’은 종교적 도그마로부터의 탈출을 초콜릿에 은유한 영화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는 집을 떠나고 싶어 한다. 나아가 고향 엔도라를 떠나고 싶다. 영화 마지막에 길버트는 드디어 그곳을 떠난다. 영화 시작 부분에 주인공 호머가 집을 떠나고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더 하우스>는 그런 면에서는 ‘길버트 그레이프’와 묘하게 대조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 두 영화는 이어지는 하나의 작품이 아닐까? 그래서 ‘길버트 그레이프’의 마지막은 <사이더 하우스>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와 어니와 베키는 <사이더 하우스>에서 호머와 월리와 캔디로 치환된다. 길버트는 어니와 베키와 함께 엔도라를 떠난다. 동시에 호머는 월리와 캔디와 함께 세인트 클라우즈를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호머는 세인트 클라우즈로 돌아온다. 길버트가 엔도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 어니와 베키는 보이지 않는다. 어니는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베키는 어니를 돌봐야 하니까. 길버트에게 베키는 구원이었듯이 호머에게는 캔디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차이는 있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의지하는 반면 <사이더 하우스>로 넘어오면 여자가 남자한테 의존하는 것으로 바뀐다. 또한 어니에서 월리로 넘어오면서 정신적 장애는 신체적 장애로 치환된다.
이 영화가 1999년도 작품이다. 이 시절의 영화를 좋아한다. 20세기 끝자락이라는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느낌 때문일까. 아직은 영화의 순수성이 남아 있던 때인 것 같아서 애잔한 느낌이 든다. 시대 배경도 맘에 든다. 그 시절의 미국을 담은 영화를 좋아한다. 난 이런 영화가 좋다. 플롯에 조미료를 쳐서 억지로 감동을 조장하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신파 드라마가 아니라 잔잔하게 서서히 젖어드는 자연스러운 감동을 이끌어내는 절제된 드라마. 순수하게 정공법으로 돌파해가는 영화. 촬영도 좋다. 특히 호머가 생전 처음으로 바다를 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호머의 시야로 푸른 바다가 한눈에 쫙 펼쳐지는데 그때 카메라 워크와 삽입되는 음악이 기가 막히다. 감동의 전율 그 자체다.
호머가 떠날 때는 시원하고 통쾌하고 산뜻하고 해방되는 느낌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따뜻하고 안정되고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품으로 돌아온 안락한 느낌이. 그것은 떠났다 돌아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다. 아이들이 호머를 반기며 호머를 눈밭에 넘어뜨리고 아이들도 간호사도 호머도 모두가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감동의 극점을 찍는 장면이다. 호머는 봄에 떠나 다음해 겨울 고향으로 돌아온다. 봄에서 겨울로. 시작과 끝. 소년에서 어른으로. 그사이 죽음도 보았고 사랑도 했으며 일도 했다. 바다도 보았고 바닷가재도 보았다. 자기 손으로 직접 낙태 수술도 했다. 호머가 돌아온 날이 핼러윈 데이(Halloween day)이다. 핼러윈을 고대하던 퍼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월리는 핼러윈 데이에 하반신 마비로 캔디의 품으로 돌아온다. 월리가 멀쩡했을 때 낙태를 한 캔디는 이제 애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퍼지의 죽음과 월리의 하반신 마비는 예고된 일이었다. 퍼지가 영화 ‘킹콩’을 감상하는데 갑자기 영사기 필름이 끊어진다. 그때 퍼지의 목숨 줄도 끊어진다. 캔디와 호머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본편 상영 전에 나오는 우리로 말하면 ‘대한뉴스’에 해당하는 영상들이 이어지는데 캔디의 표정이 어딘지 심상치 않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캔디의 불안은 결국 월리의 하반신 마비로 이어진다. 호머는 사랑한 이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퍼지와 로즈 씨 그리고 라치 박사. 주변에 사람이 많은 만큼 떠나보낼 사람도 많아지겠지. 만남의 횟수와 이별의 횟수는 비례하는 것일 테니.
잘 자라, 메인주의 왕자들아, 뉴잉글랜드의 왕들아.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다. 밤마다 세인트 클라우즈의 아이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던 라치 박사의 이 말이 맨 마지막에 호머의 입을 통해서 발화될 때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울 수밖에 없었다. 라치 박사는 사과 주스 농장에서 일하는 호머에게 그곳에서는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왕진 가방을 선물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왕진 가방은 쓸모를 발휘한다. 또한 호머의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신이 예고한 대로 호머를 자신의 후임자 자리에 앉히고야 만다. 라치 박사의 선견지명을 말해주는 대목들이다. 근데 왜 메인주는 왕자들이고 뉴잉글랜드는 왕들일까. 상대적으로 뉴잉글랜드는 큰 단위이고 메인주는 작은 단위라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해본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메인주의 왕자들과 뉴잉글랜드의 왕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영원히 잠들지 않았을까. 잘 자라, 메인주의 왕자들아, 뉴잉글랜드의 왕들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이 영화는 낙태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규칙에 관한 영화다. 규칙을 깨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원제만 봐도 알 수 있다. 호머의 오디세이. 결국 집을 떠나야만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오디세이의 끝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 마침내 오디세이는 완전해진다. 생각해 보라.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얼마나 든든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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