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8월의 크리스마스

찰나21 2021. 4. 11. 12:34

 

 

 

 

 

 

 

 

 

 

8月의 크리스마스 (1998/한국)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 심은하, 신구, 오지혜, 이한위,

        전미선

 

 

 

 

 

 

 

 

 

 

감상평

나의 평가 ★★★★★

 

언젠가부터 서사의 힘보다는 정서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거스 밴 샌트의 '엘리펀트'가 그러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던 영화로 기억한다. 나의 영화 보는 시각을 송두리째 뒤흔든 영화라고나 할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끝끝내 이미지와 정서로 각인되는 영화다. 사실 이야기는 특별할 게 없다. 일상적이고 소소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진부하고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의 미덕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다분히 신파적인 소재를 신파적이지 않게 연출한 데에 있다. 시종일관 절제된 영상미와 섬세한 심리 묘사로 인물 내면의 풍경화를 펼쳐 보인다. 다소 과하게 사용된 측면이 있다고 여겨지는 음악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절제된 연출력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플롯을 이리저리 비틀고 쥐어짜지 않고도 강렬한 캐릭터 하나 없이도 분위기와 정서, 여백의 힘만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허진호가 그리는 내면의 풍경화에 차츰차츰 스며든다. 강렬한 플롯이나 개성 강한 캐릭터로 관객을 단시간에 빨아들이는 여타의 영화들과는 다른 경지에 있는 것이다.

 

요즘은 왜 이런 영화가 안 나올까? 언젠가부터 충무로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고 고만고만한 영화들만 쏟아냈다. 이 영화가 1998년도에 나왔다. IMF가 막 터지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설 무렵이다. 소위 말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시기.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묶여 있던 창작의 자유가 열리면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내며 다양하고 개성 있는 독창적인 결과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만개한 시점이 정확히 2003년 그러니까 참여 정부가 태동하던 해이다.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올드보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등이 모두 이때 나온 작품들이다. 이때만 해도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의 구분이 모호했다. 메이저에서도 영화적으로 모험을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예술적 상업 영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올드보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양극화된 것이다. 참여 정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밝았다. 영화도 그렇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그렇고. 멜로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홈드라마가 많았다. 참여 정부가 막을 내리고 우파 정권이 다시 들어서면서 어둠은 시작됐다. 어둠의 징후는 참여 정부 말기부터 있었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 결정판으로 나온 작품이 '미생'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 교체가 된 지도 어언 4년이 흘렀건만 우파 정권 10년의 후유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최근에 나오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라. 변태, 성추행범,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검사, 변호사, 경찰, 정치인, 기업인 등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장르적으로 범죄 스릴러가 대세다. 권력의 부패와 비리에 대해 응징하거나 강력 범죄자를 처벌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악의 대상이 개인이든 조직이든 악을 처단하여 사회 정의를 구현하자는 게 골자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선이 악을 심판한다기보다 차악이 최악을 심판하는 것에 가깝다. 말이 사회 정의지 다들 사이다 중독에 걸린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여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은 심리 상태가 반영된 일종의 대리 만족 아닐까? 좀비물도 빼놓을 수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게 한국에서는 요 몇 년 사이에 '부산행'을 시발점으로 하여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막론하고 만들어진다. 심지어 사극 좀비물도 나왔다. 여기에는 상업적인 고려도 있겠지만 시대적인 메타포가 깔려 있다. 코로나 시대와 사차 산업 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작금의 우리를 영혼은 없고 육체만 있는 인간으로 빗대는 것이다. 기계가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은 기계처럼 되어 가는 아이러니. 그만큼 사회가 어두워졌다는 얘기다. 근자의 흐름을 보면 개탄스럽다. 전부 사이코패스들만 나온다. 죄수복 입은 사이코패스는 물론이거니와 양복 입은 사이코패스, 치마 입은 사이코패스, 교복 입은 사이코패스, 머리가 허옇게 센 사이코패스, 경찰복 입은 사이코패스, 군복 입은 사이코패스, 유니폼 입은 사이코패스, 강대상에서 헛소리 지껄이는 사이코패스, 목탁 두드리는 사이코패스, 꼬마 사이코패스, 아동 학대 사이코패스, 패륜 사이코패스 등등. 사이코패스의 민중화 또는 일상화? 다양화? 대중들도 이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드라마 '빈센조'를 보면서 심각성을 느꼈다. 드라마가 아니라 허세 쩌는 뮤직비디오나 싸구려 광고를 보는 느낌? 직접 광고, 간접 광고 할 것 없이 광고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잔혹성과 선정성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심화되고 어느새 내성이 생겨 버린 대중들은 더 높은 수위를 요구하게 된다. 그렇게 길들인다. 충격이다. 순수성은 다 사라졌다. 온갖 조미료를 치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쓰레기들만 양산되는 느낌. 요즘은 막말로 개나 소나 영화를 찍는다. 그러다 보니 기본기를 안 갖춘 영화들이 속출한다. 영화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수준은 떨어졌다. 옛날에는 반대였다. 아무나 영화를 찍을 수 없었지만 일단 찍으면 기본은 했다. 접근성은 낮았지만 수준은 높았던 거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 특히나 지금은 나가면 온통 뿌옇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시대라서 더욱 그랬나. 허진호는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 순수하다. 지금 보면 촌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이 영화에서 흠이 아니라 미덕으로 작용한다. 보고 있으면 마음의 정화를 체험하게 된다. 맛은 있지만 영혼에는 유해한 불량 식품 같은 영화와 드라마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비록 옛날 영화지만 이 영화는 가뭄의 단비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는 비 내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나는 이 영화를 봤다. 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극중 비 내리는 장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뭔가 아련하게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듯해서 애잔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각별하게 다가왔나. 특별히 정원과 다림이 함께 우산을 쓰고 정면에서 걸어오는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더구나 그 장면에서 깔린 음악이 센티멘털한 감성을 한껏 더 자극했다. 20세기 끝자락에 나온 무공해 영화. 단숨에 낚아채는 영화가 아니라 서서히 물들이는 영화. 이 영화가 나왔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기도 하다. 이런 영화가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허진호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도 사랑은 변한다. 사랑의 순수성은 탈색되고 어느새 신자유주의적 로맨스로 변질되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근래에 보기 드문 영화이고 그렇기에 소중한 영화다.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은 영화.

 

이 영화는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인공이다. 각각 정원과 다림으로 나오는데 사실 이 두 인물이 매력적인 것은 내 생각에 캐릭터의 매력도 있겠지만 배우의 매력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여겨진다. 특히나 다림이라는 인물이 그렇다. 만약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이렇게 매력적이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심은하가 연기했기에 가능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도 그렇고 심은하는 독보적인 배우다. 일종의 고유 명사 같은 배우다. 90년대 말 충무로 여배우 트로이카는 심은하, 고소영, 전도연이었다. 이중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전도연이 유일하다. 이때만 해도 전도연이 제일 나중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사실 연기력만 놓고 봤을 때는 전도연이 심은하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은하는 단순히 연기라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심은하는 그 자체로 캐릭터다. 기교를 부리는 배우는 아니다. 어떤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을 자신에게 끌어당겨 흡수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어떤 인물이든 심은하화시키는 것이다. 본인은 그렇지 않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편하다. 구김살이 없다. 90년대 한국 영화의 여배우는 단연 심은하다. 당시만 해도 잘 몰랐다. 왜 심은하 심은하 하는지. 때늦게 알았다. 왜 그토록 그녀의 은퇴를 안타까워했는지.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만약 그녀가 은퇴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면 어떤 배우가 되어 있을까? 성장했을까? 후퇴했을까? 더이상 스크린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다. 한편으론 눈부신 청춘으로 영원히 남게 됐으니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안타까운 건 영화에서는 순수 그 자체였던 그녀가 현실에서는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난 배우 심은하는 좋아하지만 인간 심은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는 눈이 부실 정도다. '청초하다'는 그녀 때문에 탄생한 말이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심은하한테는 요즘 여배우들한테는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평상시에도 하는 생각이지만 옛날 여자들이 예뻤다. 화장 안 하고 그냥 말간 얼굴에 수수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 같은 게 있었다. 반면에 요즘 젊은 여자들은 화장을 떡칠한 마네킹 같다. 예쁘지 않다. 순수함이 없다. 옛날 여자들은 어른 같고 성숙한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 젊은 여자들은 애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심은하는 이 영화에서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사실 그녀가 완벽한 얼굴의 미인은 아니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황신혜가 심은하보다 우월하다고해야 맞을 것이다. 당시에 컴퓨터 미인으로 불렸으니까. 그러나 심은하는 공학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얼굴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다. 여백의 미랄까. 불완전함의 완전함.

 

90년대 한국 영화의 여배우가 심은하였다면 남배우는 한석규였다. 이때만 해도 배우층이 얇았기 때문에 한석규가 거의 독식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송강호한테 밀려났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영화 남배우 트로이카는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였다. 역시 지금까지도 최고는 단연 송강호지. 한석규는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자신의 대학 동문 선배이자 대배우 최민식을 이기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고 충무로에 입성하여 탄탄대로를 달렸다. 이 둘의 위치가 재역전된 계기가 '쉬리'였다. 송강호는 '넘버.3'로 이름을 알리고 '쉬리'에 출연했지만 무미건조한 캐릭터와 존재감 없는 매력으로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반면 최민식은 메인 캐릭터를 연기한 한석규를 포함하여 모두를 잡아먹을 듯한 열연을 펼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역시 프로타고니스트보다는 안타고니스트가 매력적인 법이지. 적어도 '쉬리'에서는 최민식이 최종 승자였다. 이후로 송강호는 절치부심 각고의(?) 노력 끝에 2000년대로 접어들며 명실상부 한국 영화의 얼굴이 되었다. 사실 한석규는 연기가 거기서 거기인 듯하다. 전형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송강호의 연기는 단선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한마디로 다른 차원의 배우다. 어쨌거나 90년대 말 한석규는 명실공히 국민 배우나 다름없었다. 당시만 해도 좋은 영화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으니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이 감정을 폭발하는 세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간순으로 열거하면 첫 번째는 정원이 경찰서에서 갑자기 욕을 하면서 울며불며 난동을 피우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시한부 인생의 서러움의 절규랄까. 왠지 모르게 이 장면에서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막동이가 연상됐다. 정원이라는 인물의 다른 얼굴을 마주한 듯한 캐릭터 반전의 충격이었다. 두 번째는 정원이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가르쳐주다 울컥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와 정서적 배경은 비슷하다. 자신이 먼저 떠나고 혼자 남겨질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가르쳐주는데 아버지가 이해를 못하자 벌컥 화를 내는 것이다. 그때 정원이 느꼈을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정원의 화가 향하는 대상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기도 하고 더 크게는 세상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할 것이다. 아들이 화를 내고 방문을 세게 닫고 나가 버리자 아버지는 화는커녕 무안한 낯빛으로 리모컨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버튼을 눌러댄다. 마음이 짠했다. 세 번째는 다림이 사진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는 장면이다. 언젠가부터 다림이 계속해서 사진관을 찾아가도 문은 잠겨 있고 참다못한 나머지 결국 어느 고요하고 스산한 밤 무참하게(?) 정적을 깨는 소리가 사진관에서 들려온다. 카메라는 사진관 내부에서 깨진 창문 너머로 바깥에 서 있는 다림의 정면 얼굴을 비춘다. 거장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의 컷. 그때 다림의 표정.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우리 사랑은 깨졌어!"라는 무언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여기서는 다림이라는 인물의 다른 얼굴을 마주한 듯한 캐릭터 반전의 충격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밝고 상냥한 모습이었는데 이 장면에서는 차갑고 날선 느낌을 받았다. 묘하게도 낯설지만 어울렸다.

 

사실 처음에 옥에 티(?)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한석규가 독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어딘가 촌스럽고 오그라들며 설명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특히나 엔딩에서의 독백은 뭔가 여운을 조금 잡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달까. 근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단지 90년대의 철 지난 촌스러운 화법에 기인한 것일까? 감독의 의도적인 설정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는 총 네 번 정원의 독백이 등장한다. 영화 시작 부분에 학교 운동장에서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첫 번째 독백. 버스를 타고 가면서 옛사랑 지원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두 번째 독백. 친구 철구에게 술 한잔 더 마시자고 조르다 불쑥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는 세 번째 독백. 죽기 전 다림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네 번째 독백. 앞의 세 독백이 일기 형식이라면 네 번째 독백은 편지 형식이다. 다림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구절. 다림은 편지를 받았을까? 마지막에 다림의 미소는 무엇을 말할까? 단지 자신의 사진이 사진관에 걸려 있는 것이 흐뭇해서일까? 다림은 정원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가? 어느새 지원의 사진은 치워졌고 다림의 사진이 놓여 있다. 옛사랑은 가고 새로운 사랑이 오고. 그러나 새로운 사랑마저 떠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는 말한다. 다른 것들은 추억으로 남아도 당신만은 추억으로 남지 않는다고. 순간 다림의 미소가 겹친다.

 

이름이 재밌고 의미심장하다. 정원과 다림. 이름처럼 정원은 다림이 언제라도 가면 받아주고 품어주는 넉넉하고 푸근한 존재다. 정원이라는 이름이 공간화된 것이 사진관이다. 그곳에서 다림은 맘껏 뛰어놀고 쉼을 얻는다. 다림은 정원에게 구겨진 영혼을 펴주는 다리미 같은 존재다.

 

무더위의 절정 8월에 뜨거운 사랑은 타오르고 가을에 무르익고 겨울에 시든다. 낙엽처럼 떨어진다. 정원은 낙엽처럼 그렇게 떨어졌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사람의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여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봄은 유년 여름은 청년 가을은 중년 겨울은 노년. 여기까지가 범인의 한계치다. 그러나 김기덕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리고 봄'까지 확장하기에 이른다. 방점은 '그리고 봄'에 찍혀 있다. 겨울이 끝이 아닌 것이다. 마치 계절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탄생과 죽음.

 

8월의 크리스마스. 형용 모순의 제목이 재밌고 의미심장하다. 어느 푸르르고 싱그러운 8월의 여름날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다림은 정원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들에게 그해 8월은 크리스마스였다. 어느새 사진관 앞에는 눈이 쌓여 있고 다림은 정원으로 찬찬히 걸어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놓여 있다. (사진관에 돌을 던졌을 때의 화난 표정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다림의 티 없는 환한 미소. 사진관을 뒤로 하고 걸어오는 다림.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발견했다. 정원과 다림의 첫 만남에서 정원은 다림에게 하드를 건넨다. 반면 이후에 다림은 아이스크림을 사와 정원과 같이 사이좋게 떠먹는다. 이것이 세대 차이에 의한 것일까? 단순하게 보면 그렇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둘 사이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하드를 먹을 때 둘은 각각 따로 먹지만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함께 떠먹는다. 하드가 거리 두기라면 아이스크림은 서로가 하나로 융합되고 녹여짐을 뜻하는 것 아닐까?

 

서정적인 화면과 짙은 감성에 마음이 아리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 사무치는 여운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두고두고 오래도록 기억될 영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게 데뷔작이라니. 믿겨지는가?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내공이 깊은 영화다. 데뷔작으로 이미 모든 걸 이룬 감독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시작부터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정원이 학교 운동장에서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독백과 친구 철구의 전화를 받고 간 장례식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장례식에서 돌아온 그날 다림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예정된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영화 초반 롱 샷으로 담아낸 장례식장, 끝부분에 역시 롱 샷으로 찍은 눈 내리는 학교 운동장 이외에도 인상적인 장면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다.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다. 빛바랜 기억의 사진첩처럼 오랜 잔상으로 남을 듯하다.

 

이 영화는 시선의 영화다. 그것은 언제나 정원의 시선으로 탄생한다. 첫 번째 시선 - 사진관에서 창문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다림의 걸어가는 뒷모습. 두 번째 시선 - 나무 밑에서 사진이 나오길 기다리는 다림. 세 번째 시선 - 사진관 밖에서 사진관 유리창을 물로 청소하는데 물속에 흐린 듯 비춰지는 지원. 이것은 지원이 정원에게 추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네 번째 시선 - 정원이 어두컴컴한 밤에 사진관에서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혼자 노래를 흥얼거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약속과 달리 다림은 오지 않고 할머니가 온다. 낮에 가족사진을 찍으러 왔던 할머니. 가족사진을 찍고 나서 아들은 노모에게 다정한(?) 말투로 독사진 한 장 찍으라고 독려한다. 할머니도 알고 있다. 영정 사진이라는 것을. 아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노모를 힐끗 바라본 다음 입에 담배를 문다. 마치 빨리 돌아가시기를 재촉이라도 하듯. 그리고 가족들은 아파트 평수가 어쩌고 하면서 세속적인 얘기나 해댄다. 할머니 혼자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른바 세태 풍자가 담긴 장면이다. 할머니는 낮에 찍은 사진이 마음에 걸렸는지 추적추적 비 오는 한밤에 홀로 찾아온 것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서. 정원은 할머니를 살갑게 맞이하고 무료로 찍어달라는 말에도 흔쾌히 응한다. "젊으셨을 때 정말 예쁘셨겠어요"라는 정원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한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 곱고 아름다웠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첫 번째 영정 사진은 안경을 끼고 찍었는데 혼자 와서 찍은 두 번째 영정 사진은 안경을 벗고 찍는다. 비록 시골의 조그마한 사진관이긴 하지만 정원은 단순한 찍사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정원의 눈이 옳았다. 안경을 벗고 곱게 화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할머니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문득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지막 시선 - 커피숍에서 유리창 너머로 주차 단속을 하는 다림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고 다가가지 못하며 애태우는 정원.

 

사람의 등은 많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뒷모습의 영화다. 앞서 첫 번째 시선으로 언급된 장면인데 정원의 시선으로 사진관에서 창문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다림의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장면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영길 촬영 감독의 유작이다. 이 영화는 유영길 촬영 감독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영화는 빛의 마술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한국 영화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자부해도 될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운 영상을 자랑한다. 클로즈업을 최대한 배제하고 롱 샷과 풀 샷 위주로 잡는 촬영이 영화의 의도와 성격을 말해준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선한 사람들이다. 요즘같이 현실에서나 허구에서나 또라이, 악인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는 상당히(?) 낯설고 드문 영화적 체험이다. 일종의 치료제와 같은 영화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들에게 정이 간달까. 정원은 전형적인 한국의 선한 남자 캐릭터다. 인상 좋은 이웃집 푸근한 아저씨. 동시에 여린 구석도 갖고 있다. 다림도 선한 캐릭터로 밝고 명랑하고 살갑고 구김살이 없다. 동시에 이면에는 속이 깊고 어두운 구석도 갖고 있는 한마디로 사랑스러운 여자다. 정원의 아버지도 참 좋은 사람이다. 천둥 치는 밤에 아들이 홀로 이불 속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아파하는데 차마 어쩌지 못하고 방문 밖에서 조용히 우두커니 서 있던 아버지의 검은 그림자.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빠 정원과 친구 지원을 걱정하는 정원의 여동생도 속 깊고 좋다. 정원의 친구 철구도 사람 냄새 나는 인물이다. 정원이 술 한잔 더 마시자고 할 때 처음엔 거부하지만 결국 친구의 바람대로 술 한잔 더 하고 정원이 파출소에서 난동을 피웠는데도 다음날 정원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정원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정원과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사진까지 찍는다. 한마디로 좋은 친구다. 개망나니 남편을 피해 고향에 내려와 우연히 정원을 만난 지원도 정원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선한 인물이다. 다만 사진관에 전시된 자기 사진을 치워달라고 정원에게 말한 건 개인적으로 조금 유감(?)이다.

 

정원은 할머니에게 영정 사진을 찍어준 그날 밤 슬며시 아버지 방에 들어가 잠든 아버지 몰래 담배를 슬쩍하여 홀로 마루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리곤 방에 들어가 홀로 잠을 청하려는데 천둥 치는 소리에 조용히 아버지 방에 들어가 살며시 아버지 옆에 눕는다. 단지 천둥 때문이었을까? 혹 죽기 전 아버지와 마지막 잠을 자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날 영정 사진을 찍고 간 할머니가 생각나서였을까?

 

정원은 언제나 누군가를 찍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자기가 찍히는 사람이 된다. 이때도 찍는 사람은 정원이다. 그의 마지막 사진은 자신의 영정 사진이었다. 그렇게 외로이 자신의 영정 사진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다림이 있었다.

 

정원과 다림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느꼈던 장면들이 있다. 정원이 경찰서에서 욕을 하며 소리를 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과 아버지한테 리모컨 사용법을 가르쳐주다 화를 내는 장면. 다림이 어느 날 그늘진 얼굴로 사진관에 와서 정원에게 약속을 어긴 이유에 대해 힘없이 고백하고는 돌아가는 장면과 아무리 찾아와도 정원이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나머지 사진관 창문을 돌로 던져 깨는 장면. 그때 다림의 눈물 맺힌 서슬 퍼런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초원 사진관. 인물 이름은 정원이고 사진관 이름은 초원이다. 의미심장하다. 캐릭터의 특성과 공간의 특성 나아가 영화의 특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 아닐까.

 

배경이 아름답다. 영화를 보면 시대의 공기가 느껴진다. 그 시간 그 공간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서글퍼졌다. 계속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일상성의 미학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플롯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별 뜻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가령 정원과 여동생 둘이 마당에서 수박을 먹다가 바닥에 수박씨를 뱉는 장면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정원이 다림과 밤길을 거닐며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처음엔 별 뜻 없이 넘겼다. 근데 왜 하필 귀신일까? 정원의 죽음을 암시하는 설정은 아니었을까? 이런 나의 해석에 확신을 더해 주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다림이 친한 직장 동료 언니에게 귀신 이야기를 해주는데 갑자기 영화는 다림의 이야기를 중간에 툭 끊어 버리고 정원이 여동생의 남편 등에 업혀 구급차에 실려가는 장면으로 전환해 버린다. 기가 막힌 장면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장면의 함의보다는 정서적 효과였다. 정원이 귀신 이야기를 하다 순간 멈칫하더니 다림이 재촉을 하자 말을 이어간다. 이때의 한석규의 디테일한 연기와 허진호의 섬세한 연출력은 가히 압권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랄까. 정원의 다림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순간 멈칫하던 그 찰나에 다 녹여져 있었다. 감독이 얼마나 감성이 풍부하고 여리고 섬세한 영혼인지를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이런 자잘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거대한 탑을 쌓는 영화다. 최루성 멜로드라마로 흐르지 않고 절제된 미학으로 하나의 기념비적인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글을 끝맺으면서 알게 됐다. 왜 시선의 영화였는지. 왜 정원을 사진사로 설정했는지. 정원의 시선이 곧 카메라였던 것이다. 눈이 렌즈가 되고 렌즈가 눈이 되고. 정원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셔터는 눌러졌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본다면 정원의 시선은 허진호의 시선이기도 하다. 정원은 허진호의 분신인 셈이다. 정원의 직업이 사진사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니까 정원은 영화 속 허진호이고 허진호는 영화 밖 정원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정원의 시선은 유독 다림에게 오래 머물러 있었다.

 

★★★★☆

한국 멜로 영화의 최고봉. 과유불급을 원칙적으로 따르는 영화. 모든 것이 절제되어 표현된다. 연기도 연출도 촬영도 내러티브도. 이건 걸작이다. 데뷔작이 걸작이긴 쉽지 않은데 용케도 해냈다. 마치 와인처럼 오래될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숨이 멎을 듯하다. 빛바랜 기억의 사진첩처럼 영원히 잊히지 않는 잔상으로 남는 영화. 언제든 사진첩을 꺼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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