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Chicago

찰나21 2021. 11. 15. 13:53

 

 

 

 

 

 

시카고 (2002/미국,독일,캐나다,영국)

 

장르 코미디, 범죄, 뮤지컬

감독 롭 마셜

출연 르네이 젤웨거, 캐서린 제이타-존즈,

        리처드 지어, 퀸 라티파,

        존 C. 라일리, 루시 리우, 테이 딕스,

        콤 피오어, 크리스틴 버랜스키,

        도미닉 웨스트, 미아 해리슨,

        디어드라 굿윈, 드니스 페이,

        에카테리나 츠첼카노바, 수즌 미스너

 

 

 

 

 

 

 

 

 

 

감상평

나의 평가 ★★★★☆

 

지상 최대의 쇼. 사악하게 매혹적인 뿌리치기 힘든 엔터테인먼트. 볼거리로 가득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영화. 화려하고 성대한 뷔페로 배가 터질 지경이다.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지루함과 딴생각을 손톱만큼도 허용하지 않는다. 눈과 귀가 호강한다. 다만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특성 탓에 타 장르 영화에 비해 청각적 쾌감이 남다르다. 더구나 영화 <시카고>의 뮤지컬 넘버들은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곡들로 뮤지컬 넘버들을 채운 물랑 루즈맘마미아!’와 달리 오직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창작곡들이다. 무엇보다 퀄리티가 상당하다. 저마다 개성 있고 다양한 뮤지컬 넘버들이 시종일관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한계가 뚜렷한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현실을 가리는 영화와 현실을 까발리는 영화. 이 영화는 전자에 해당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대개 그렇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미국의 국민 메뉴 햄버거 같달까. 맛은 끝내주는데 건강에는 해롭다. 거대한 자본과 가공할 만한 테크놀로지로 중무장하여 기술적으로는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 영혼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피상적으로 가볍게 훑는 정도다. 이것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가 이창동의 영화다. 그의 영화는 아프다. 아프면서 치유된다. 그러나 영화 <시카고>는 아플 겨를이 없다. 거의 두 시간 가량을 할리우드뽕에 취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이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희의 영화다. 그러니 이런 영화에 철학적 깊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넌센스다. 살인도 유희로 만드는 할리우드의 놀라운 마법이 무시무시할 따름이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는 희대의 사기꾼을 영웅으로 만들더니 영화 <시카고>에서는 살인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할리우드의 교활한 상업술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일찍이 정치도 엔터테인먼트화한 게 미국이다. 말하자면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스튜디오라고 보면 된다. 망상 놀음을 현실화시킨 망상 국가 미국.

 

당시 시카고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면 시카고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총소리가 끊이질 않고 47년간 쿡 카운티 교도소에서 교수형 당한 죄수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또한 영화 속에서 시카고는 향락의 도시이기도 하다. 술과 재즈, 노래와 춤으로 넘쳐난다. 내게 시카고는 농구의 도시이다. 시카고 불즈. 지금은 상당 부분 퇴색됐지만 적어도 내 사춘기에는 그랬다. 흔히들 시카고를 ‘windy city’라고 부른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데서 붙여진 별칭이다. 영화 <시카고>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다. 어쩐지 나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에 끌린다. 뭔가 분위기 있어 보여서일까. 정확히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진 않지만 로드 투 퍼디션이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보면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지금과 달리 남자들이 중절모를 쓰고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모습에 아우라가 느껴졌다. 영화 <시카고>에서 시카고는 그야말로 미친 도시이다. 젊은 여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살인자 록시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고 범행 현장의 경매 물품은 불티나게 팔린다. 록시가 무죄를 선고받자마자 법정 바깥에서는 총성이 울린다. 대낮에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모두의 관심이 그 여자에게 쏠리자 요즘 말로 하면 관종인 록시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며 빌리에게 따져 묻고 빌리는 시카고에서 총소리 나는 것은 다반사 아니냐며 태연히 응수한다. 록시는 무죄를 받기 위해 임신도 안 했으면서 한 것처럼 속이고 순정파 남편 에이머스의 협조를 얻어내려고 남편이 아기의 아빠라고까지 거짓말을 한다. 무죄 판결이 나고 조심스레 아기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에게 록시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애초에 아기는 없었다는 잔인한 말로 남편의 영혼을 도륙한다.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다. 도리어 록시는 사람들의 예기치 않은 돌연한 무관심에 충격을 받는다. 무죄의 기쁨보다 무관심의 슬픔이 록시의 영혼을 지배한다.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마마는 이 도시에서 살인은 일종의 오락이라고 말하고 빌리는 재판이나 이 세상 모두 서커스이고 쇼의 세계라고 말하며 교수형 당할 것을 걱정하는 록시를 안심시킨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서커스 장면이 등장한다. 헝가리인 여성 죄수 카탈린의 교수형 집행 장면은 현실과 판타지의 교차로 구성되는데 서커스 장면이 판타지로서 보여진다. 현실에서는 모두가 비통하게 여기는 비참한 죽음이 판타지에서는 모두가 환호하고 박수 치는 현란한 묘기가 된다. 교수형 처형대는 서커스 무대로 교수형 집행을 지켜보는 동료 죄수들, 간수들, 교도소장, 기자들은 서커스를 관람하는 관객으로 사형수는 곡예사로 변모한다. 그렇게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쿡 카운티 교도소 역사상 교수형을 집행당한 첫 여성의 탄생이다. 그녀가 빌리를 변호사로 고용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만약 그녀가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면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빌리가 그녀를 외면했을까? 카탈린의 교수형 집행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 <시카고>의 내러티브는 현실 공간과 무대 공간의 교차로 짜여져 있다. 이때 무대는 현실에 대한 은유로 표현된다. 그러나 넓게 보면 영화 속 시카고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이다. 보면서도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현실 공간과 무대 공간의 일치는 각각 오프닝과 엔딩에서 이뤄진다. 역시 이 영화의 백미는 오프닝과 엔딩이다. 단연 압권이다. 벨마의 단독 공연으로 막을 열고 록시와 벨마의 합동 공연으로 막을 내린다. 오프닝에서부터 강렬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하며 단번에 빨아들이더니 엔딩에서는 재기 발랄한 유머와 여유마저 보이는 노련함으로 탄복하게 만든다. 벨마 역을 맡은 캐서린 제이타-존즈의 두툼한 몸매가 못내 부담스럽긴 하나 노래와 춤만큼은 실력이 출중하다. 그러나 적어도 연기 면에서는 록시 역을 맡은 르네이 젤웨거가 더 나았다고 평가한다. 영화에서 보면 벨마가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등장하는데 원래는 아니었다고 한다. 주인공 록시보다 벨마의 미모가 더 돋보일 것을 우려한 캐서린 제이타-존즈가 일부러 자신의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고 한다. 이걸 작품을 위해 희생하는 헌신적인 여배우의 단호한 결단이라고 봐야 할까? 나르시시즘과 오버 쩌는 재수 없는 여배우의 외적 허영이라고 봐야 할까? 르네이 젤웨거의 잔망스러운 연기는 록시를 차마 미워할 수 없게끔 만든다. 분명 천하의 나쁜 년인데 마냥 밉지만은 않다. 밉지만 사랑스런 캐릭터랄까. 르네이 젤웨거와 캐서린 제이타-존즈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각각 오스카 여우 주연상과 여우 조연상 후보로 오르고 내 평가와 달리 르네이는 수상이 불발되고 캐서린은 수상에 성공한다. 그야 각 부문별로 가장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배우에게 시상하는 거니까. 그럼에도 연기가 나쁘진 않았지만 의외로 비중이 적었던 데다 노래와 춤을 빼고는 주인공을 맡은 르네이보다 별달리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던 캐서린이 과연 여우 조연상 수상감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히려 같은 부문에 후보로 오른 마마 역을 맡은 퀸 라티파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다. 남우 조연상 후보에 오른 존 C. 라일리의 연기도 좋다. 그는 여기서 록시의 남편 에이머스 역을 맡았다. 록시가 딴 남자와 바람을 피우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록시의 부탁으로 록시의 살인죄를 덮어쓴 에이머스는 록시가 바람을 피우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흥분을 하며 진술을 번복하고 그 바람에 록시는 교도소로 직행한다. 한편 에이머스는 아내의 외도에 불같이 화를 낼 때는 언제고 자존심도 없는지 빌리에게 찾아가 있는 돈 없는 돈 주머니에서 다 털어 내며 록시의 무죄 판결을 위한 변호 비용을 지불한다. 에이머스는 록시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고 기뻐하지만 자신이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재차 흥분하며 이혼을 통보한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에이머스는 피고 측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빌리의 선동과 록시의 속임수에 말려들면서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고 믿게 되자 돌변하여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준다. 그러나 록시가 무죄 판결을 받고 록시에게 다가간 에이머스는 비로소 자신이 아내에게 완전히 놀아났음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힘없이 돌아서서 법정을 빠져나간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호구의 전형이다. 빌리는 상대방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별난 버릇이 있는데 그렇게 번번이 틀리다가 그날따라 웬일인지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에이머스에게 에이머스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그때 에이머스의 반응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너무나 환한 얼굴로 에이머스 맞다고 좋아하더라는 것. 단지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것뿐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일희일비하는 성격인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존 C. 라일리는 생김새도 그렇고 그간 주로 맡아 온 역할도 그렇고 어리숙하고 순진무구한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배우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실제로 시카고 태생이다. 우연치고는 놀랍다. 영화 <시카고>에서 주요 인물들은 총 다섯 명이다. 크레디트 순서로 나열하면 록시, 벨마, 빌리, 마마, 에이머스. 이들 중 빌리를 연기한 리처드 지어만이 이 영화로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솔직히 리처드 지어가 연기력이 특출난 배우는 아니지 않는가. 소위 말하는 연기파 배우라고 하기엔 로맨틱한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배우는 아니다. 도리어 내게는 그가 배우보다는 부디스트로 친숙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도 대표적인 불자이다. 티베트 불교에 조예가 깊은 그는 현각 스님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내가 그에게 매료된 계기가 되었다.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후에 내한하여 조계사를 방문하고 땡중 혜민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때도 역시나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극중에서도 말발의 대가 빌리 플린으로 나오지만 현실의 리처드 지어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말발도 말발이지만 그가 가진 사상이 탐이 날 정도로 근사하게 다가왔다. 그런 그가 극중에서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변호사를 연기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빌리를 소개할 때 무대 공간은 현실 공간에 대한 반어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현실의 빌리는 돈타령 무대의 빌리는 사랑 타령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반어법을 통해 빌리의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근성을 극대화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것쯤이야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하긴 그의 말대로 이건 서커스니까.

 

영화 <시카고>는 당시 오스카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뮤지컬 장르로서는 이례적인 수상이었다. ‘물랑 루즈가 히트를 치고 일 년 후에 이 영화 <시카고>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이후에 뮤지컬 영화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 해 먼저 나온 물랑 루즈도 당시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나 뷰티풀 마인드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지금은 망했지만 한때 영화 제작사 미라맥스가 오스카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정점이 바로 2003년도 오스카이다. 그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다섯 편 가운데 무려 세 편이 미라맥스가 제작한 영화들이었다. ‘시카고’, ‘디 아워스’, ‘갱스 오브 뉴욕’. 그리고 이중에서 한 편이 수상의 영예를 안는다. 상을 받긴 했지만 사실 영화 <시카고>는 역대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들 가운데 가장 과대평가된 수상작 중의 하나로 꼽힌다. 당시 영화 <시카고>와 같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쟁쟁한 후보작들의 면면을 보면 수상 결과에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영화 <시카고>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던가? 그러한 부정적인 반응은 장르적 특성에 기인하는 부분이 큰 것 같다. 아무래도 가벼운 뮤지컬보다 진지한 드라마에 점수를 더 주는 경향이 있으니까. 게다가 당시 정치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진 미국인들의 마음을 달래고 뒤숭숭한 사회적 분위기를 덮으려는 오스카의 정치적인 선택이 낳은 무리수? 영화 <시카고>가 그런 것처럼 오스카도 하나의 쇼이고 현실을 은폐했다. 오스카가 현실을 직면했다면 피아니스트에게 상을 안겨 줬을 것이다. 그래도 미안했는지 작품상을 안 주는 대신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주는 것으로 퉁친다. 만약 영화 <시카고>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취하지 않았다면 단선적인 내러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채택했기에 풍성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거꾸로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매력과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깔았을 수도 있다. 지금 돌이켜봐도 2003년도 오스카는 이라크 전쟁 발발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참석자 모두 검은 의상으로 차려입고 숙연하게 진행되었으며 레드 카펫도 축소화하는 등 전례 없이 간소화하여 치러졌다. 영화 <시카고>는 주제가상 후보에도 올랐는데 ‘8 마일에게 상을 내줘야 했다. 전설의 명곡 에미넴의 ‘Lose Yourself’를 이길 순 없지. 알다시피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노래들은 시상식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게 오스카의 관례이다. 그러나 에미넴은 수상자임에도 아예 불참했다. 수상을 예상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별개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랩이다 보니 욕설 가사가 등장하는데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데다 보수적인 오스카 측에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부분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성격 파탄자 에미넴은 가사 그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양측은 타협을 이루지 못하여 끝내 수상자의 불참으로 이어졌다. 17년이 지나서야 에미넴의 ‘Lose Yourself’ 공연은 오스카 무대를 달굴 수 있었다. 이른바 뒷북(?) 공연.

 

영화 <시카고>에서 쌀쌀맞은 기자로 등장하는 크리스틴 버랜스키는 6년 후 또 다른 뮤지컬 맘마미아!’에도 출연한다. 록시와 빌리의 기자 회견 시퀀스에서 이 둘의 복화술 묘기는 폭소와 탄성을 자아낸다. 뒤이어 빌리가 기자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갖고 논다는 설정을 인형극의 형식을 빌어 연출한 장면에서는 배꼽 잡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이런 게 할리우드의 탄복할 만한 재능이다. 이외에도 명장면이 수두룩하다.

 

록시와 벨마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록시는 금발이지만 벨마는 흑발이고 록시는 긴 머리이지만 벨마는 짧은 단발머리이다. 록시는 창백한 피부이지만 벨마는 탄력 있는 피부이고 록시는 슬림하지만 벨마는 글래머러스하다. 록시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앵앵거린다면 벨마는 허스키한 음성으로 단호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람이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무대에 서는 것. 벨마는 단독 공연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합동 공연할 파트너를 구해야만 되는 절실한 상황이다. 벨마는 록시에게 합동 공연을 제안한다. 왜 록시일까? 록시가 재능이 있어서? 간단하다. 록시의 유명세를 활용하겠다는 속셈이다. 자신의 재능과 록시의 유명세를 합치면 성공의 가능성이 열리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문제는 록시가 벨마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벨마는 록시에게 롤 모델이자 우상이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만난 록시의 우상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한낱 죄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이들의 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록시가 빌리를 만나면서 록시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 반대로 벨마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록시는 부유한 아시아계 여성 죄수가 들어오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길 위기를 맞는 듯 했으나 임신이라는 날조 카드를 꺼내 드는 순간의 재치로 구사일생(?)에 성공한다. 반전을 기대한 벨마 입장에서는 허탈할 따름. 법정에서 검사 측 증인으로 나와 록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써 마지막 반전의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실패. 그러나 반전은 엉뚱한 데서 찾아온다. 록시가 자유의 몸이 된 바로 그 순간 록시의 유명세도 날아가 버린다. 새로운 살인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언론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찍이 빌리가 록시에게 충고하지 않았나. 당신은 일회용 스타이자 삽시간에 잊히는 한순간의 물거품이오. 그게 시카고요. 어디 시카고만 그럴까. 이 세계가 그렇다. 록시도 바닥으로 가라앉고 이제 벨마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감정적 교류는커녕 서로 마뜩잖아 하고 심지어 으르렁하는 관계인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역시 자본주의이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제 록시의 대답만이 남아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이름하여 시카고 극장’. 전광판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이름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록시가 벨마에게 자기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그렇게 유치하게 우기더니 결국... 사실 이것이 벨마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무대에 서냐 못 서냐이지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오냐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쿨하게 록시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무대에 불이 켜지며 두 재즈 킬러의 잊지 못할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그토록 염원하던 꿈을 이룬 록시. 나 또한 무대의 관객이 되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마치 이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아.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지며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언제든.. The show will be go on...

 

 

★★★★

영화 속 시카고는 현실의 축소판. 현실은 참혹한데 영화는 우아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러나 이 상충하는 불편한 모순을 짜릿한 동거로 바꾸는 것을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할리우드의 뻔뻔하고도 교활한 상업술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시카고.. 할리우드.. 그리고 이 세계는.. 전부 쇼 비즈니스다. 어두운 시카고를 네온사인 불빛으로 꽁꽁 감추는 데 성공한다. 잠들지 않는 도시.. 시카고. ‘물랑 루즈’의 지들러가 한 말은 현실화되었다. The show must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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