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놀리아 (1999/미국)
장르 드라마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출연 제러미 블랙먼, 톰 크루즈, 멀린다 딜런,
에이프럴 그레이스, 루이스 거즈먼,
필립 베이커 홀, 필립 시모어 호프먼,
리키 제이, 윌리엄 H. 메이시,
알프레드 몰리나, 줄리앤 무어,
마이클 머피, 존 C. 라일리,
제이슨 로버즈, 멜로라 월터스
감상평
나의 평가 ★★★★★
마치 한 편의 웅장하고 장엄한 오페라를 본 것 같다. 시종일관 광기로 돌진하다 가까스로 용서와 화해를 주워 삼키며 일말의 희망으로 미소 하나 띄운 채 매듭짓는 영화 <매그놀리아>. 이 영화를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무려 20년이나 된 영화다. 1999년도에 제작된 작품이니까 정확히는 21년. 한국에서는 2000년도에 개봉이 되었으니 20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이 영화가 내게 당도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처음 본 것도 아니다. 아니 처음 봤다고 말하는 게 옳다. 그때는 보긴 봤으나 뭔지도 모르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봤고 워낙 오래되기도 했지만 보고 나서 최근에 다시 보기 전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었으니까. 단지 프롤로그가 어렴풋이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났고 개구리 비 시퀀스는 장면은 선명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다시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서 답을 하자면 이렇다. 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20년이라는 시간의 두께가 필요했다. 그때 난 어렸고 영화는 어려웠다. 다시 보기까지 3시간이라는 런타임도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10분에서 20분 정도는 덜어내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엔딩이 나오기 전까진. 그러나 마침내 하늘에서 개구리 떼가 쏟아져 내리는 장관이 연출되면서 극은 절정을 이루고 개구리 비가 그치면서 감정은 해소되며 사랑 고백 장면으로 로맨틱하게 엔딩을 장식함으로써 엔딩에 도달하기까지 감내해야 했을 다소간의 지루함과 정신 산만함은 보상받고도 남았다. 그만큼 강렬한 엔딩이었다. 마치 엔딩을 위해 그 모든 과정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엔딩을 위해 쉼 없이 가열차게 몰아치듯 달려온 것이다. 개구리 비 시퀀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장면이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로테스크하고 유니크한 장면이다.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자극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난 이 영화의 박력을 사랑한다. 가령 비장미 어린 음악을 깔면서 서스펜스 무드로 가다가 개구리 비 시퀀스에서는 재난 액션 블록버스터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할 만큼 스펙터클하다. 그러다 달콤한 멜로드라마로 끝맺는 식이다.
여기서 의문 하나. 감독은 어떻게 개구리를 생각해냈을까? 왜 하필 개구리일까? 가장 징그러운 것을 찾다보니 개구리가 낙점된 걸까? 감독은 혹시 변태인가? 톰 크루즈가 연기한 캐릭터도 그렇고 좀 수상한데? 개구리가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나온 개구리는 과연 실제 개구리일까 CG의 산물일까? 무엇보다 궁금한 건 영화의 제목을 왜 ‘Magnolia’ 즉 ‘목련’으로 했느냐는 것이다.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영화는 프롤로그서부터 인상적으로 시작한다. 세 편의 짧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우연’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우연’일까? 글쎄.. 난 오히려 속죄와 용서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영화 <매그놀리아>는 현대 미국인의 거대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신랄하고 적나라한 보고서이다. 이 영화에서 정상적인 인물은 하나도 없다.
지미는 바깥에서는 TV 역사상 가장 오래된 퀴즈 쇼의 명망 있는 사회자이지만 암에 걸린 시한부 인생이며 어린 시절 딸을 성추행했던 과오로 인해 딸의 집에 찾아가서도 문전 박대 당한다. 심지어 자신이 과거에 딸을 성추행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딸과 아내에게 모두 버림받는 신세가 되며 권총 자살을 시도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개구리 덕분에(?) 미수로 그친다. 지미의 딸 클로디아는 늘 코카인에 쩔어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피해 의식과 애정 결핍에 시달린다. 경찰관 짐 커링은 혼자 산다. 그의 자동 응답기에는 연애 상대를 찾는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다. 그는 출근하기 전에 방에 들어가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고 성호를 그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유달리 언어에 민감하다. 특히 욕설에 대해서 그렇다. 가령 극 초반 살인 현장에서 마주치게 된 흑인 꼬마와의 대화와 클로디아와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납득은 된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그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나쁜 일이 있을 때도 그는 언제나 주님을 찾는다. 여기서 좋은 일은 클로디아가 짐의 데이트 신청을 수락한 것을 말하고 나쁜 일은 짐이 범인을 쫓다가 총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렇게 웃었다가 울었다가 천당과 지옥을 바삐 오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적어도 그날은 그랬다. 경찰이지만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음 민원 때문에 클로디아의 집을 방문하게 된 짐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만 첫눈에 클로디아한테 반해 급기야 데이트 신청까지 하고 만다. 짐이 클로디아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녀에게 말로써 고백하기 이전에 이미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짐이 문을 두드리고 클로디아가 문을 열어줬을 때 짐이 클로디아를 보자마자 짓는 표정과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경찰봉을 떨어뜨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클로디아와 짐은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고 이렇게 둘은 만난 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짐이 먼저 클로디아에게 사랑을 표현하긴 했지만 늘 사랑에 굶주린 클로디아 입장에서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게 꼭 짐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누구라도 사랑할 것이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까봐 미리 심리적으로 방어의 벽을 두텁게 쌓아올리며 상대를 밀쳐내고 도망가 버리는 데에 있다. 과연 미친 여자와 미친 여자를 사랑한 어수룩한 경찰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얼은 본인 이름의 제작사가 있을 만큼 대부호이지만 암으로 병상에만 누워 있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의 현재 젊은 아내 린다는 거의 미쳐있는 상태이고 중증 히스테리 우울증 환자다. 그녀가 아버지뻘 되는 얼과 결혼한 것은 오직 돈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과 속된 말로 놀아났다. 그러나 막상 얼이 병상에서 신음하며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얼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속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얼의 아들 프랭크가 상속을 받게 되는데 그건 또 싫다고 말한다. 얼을 핑계대면서 말이다. 얼이 프랭크에게는 한 푼도 주지 말라고 했다면서. 급기야 간호사 필의 노력으로 겨우겨우 프랭크와의 전화 통화가 이뤄질 뻔한 순간에도 린다는 중간에서 파투를 놓는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 얼과 프랭크 두 부자의 만남은 이뤄진다. 얼은 전 부인 릴리와의 결혼 생활에서 수시로 바람을 피웠다. 아내가 아플 때도 자리에 없었다. 아내를 돌보는 건 언제나 어린 아들 프랭크의 몫이었다. 지금 얼의 아들 프랭크는 근처에 있지만 연이 끊긴 상태이다. 프랭크는 자신과 엄마를 버린 아버지를 평생 증오하고 경멸하며 살아왔다. 그는 이제 여성을 유혹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어린 시절의 결핍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프랭크는 클로디아의 남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곡된 여성상을 가진 가여운 인물. 극중 프랭크가 강연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Respect the cock!”이였다. 아버지 얼이 어린 아들 프랭크에게 곧잘 했던 말은 “Cock sucker”였다. 프랭크가 병상에 누워 있는 얼을 만났을 때 프랭크는 얼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들었던 그 욕을 그대로 돌려준다. 얼이 듣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프랭크는 얼에게 오랜 세월 가슴 켜켜이 쌓아 놓았던 울분을 모두 토해낸다. 저주로 시작해 끝내는 죽지 말라고 애원하며 통곡한다. 프랭크에게 가정사는 아킬레스건이자 치부였다. 그래서 이름도 잭에서 프랭크 매키로 바꾸고 인터뷰에서 여기자한테 굴욕을 당했던 것이다. 강연할 때 그는 누구보다 강력하고 터프해보이지만 실은 부서질 듯 연약한 자아를 가진 인물이다. 얼은 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전 부인과의 결혼 생활에서 바람을 피웠고 아내와 아들을 버렸다. 그것은 현재 아내 린다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아들 프랭크가 자신의 과거를 감추며 여성을 유혹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병상에서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저주를 토해내는 것으로서 고스란히 그에게 죗값으로 돌아온다.
도니 스미스는 어렸을 때 신동(quiz kid)으로 불리며 퀴즈왕을 차지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본인 말마따나 멍청이(stupid)가 되었다. 번개를 맞은 후유증에다 유년 시절 부모의 지나친 간섭에 따른 스트레스 그리고 자식이 퀴즈 쇼에서 탄 상금을 부모가 갈취함으로 인해 야기된 충격이 그를 망가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간은 아직도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꼼짝없이 유년 시절에 갇혀 정지해 있는 것이다. 영광과 좌절이 몸소 새겨진 시간. 한때 신동(quiz kid)이었다고 자랑하다가도 지금은 멍청이(stupid)가 되었다고 우울해지는 식이다. 그는 클로디아의 반대 버전이다. 클로디아가 사랑을 갈구하는 쪽이었다면 그는 사랑을 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쪽이다. 과연 그럴까? 단면적으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나 받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될 수 없다. 도니는 술집에서 일하는 바텐더 브래드에게 공개적으로 사랑을 고백함과 동시에 사랑을 구걸한다. 이때 갑작스러운 도니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브래드의 표정이란. 심지어 도니는 브래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아 교정 수술을 받으려고 돈까지 훔친다. 출근길에 실수로 차로 편의점을 들이받아 유리창을 부수고 직장에서는 일 못한다고 해고당하고 술집에서는 공개적으로 조롱과 굴욕, 망신당하기를 자초하고 돈을 훔치는 과정에서 열쇠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돈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는 추락 사고를 당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다. 이 정도면 멍청이(stupid)로서의 충분조건은 갖추고도 남았다고 봐야지.
도니 스미스의 유아 버전인 스탠리는 도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동으로 불리며 퀴즈 쇼에서 어린이 팀의 핵심 주축이다. 사실상 스탠리 혼자 어린이 팀을 이끌고 간다. 나머지 두 멤버는 스탠리한테 묻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일이 벌어진다. 스탠리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퀴즈 쇼 도중에 팬티에 오줌을 싼 것이다. 아이가 화장실에 가는 것보다 프로그램이 더 우선인 주객전도의 마인드를 가진 사회와 아버지의 극성스러운 교육열은 아이를 점점 망가뜨리고 있었다. 사회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응하던 스탠리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을 시도한다. 문제 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이상 어른들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도발적(?) 선언에 다름 아니다. 퀴즈 쇼는 중단되고 TV로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아들의 돌발(?) 행동에 분개한다. 부디 스탠리가 도니 스미스를 반면교사 삼아 퀴즈 쇼 선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듯 영화 <매그놀리아>는 아버지의 죄가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되는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날..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져 내리던 그날.. 그것은 구원이었다. 용서와 화해.
스탠리는 지쳐 쓰러져 있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한테 잘해주셔야 돼요.” 아버지의 대답은 “가서 자라.” 얼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과보를 받는 듯했으나 아들 프랭크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비록 저주를 퍼붓긴 했지만 나중에는 죽지 말라며 울면서 애원한다. 그제야 얼은 편안히 눈을 감는다. 린다는 단지 돈 때문에 얼과 결혼하고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얼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상속을 거부한다. 그리곤 얼이 먹을 약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약을 자신이 모조리 삼키며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결과적으로 미수에 그치고 만다. 병원에서 프랭크에게 전화가 오고 프랭크는 린다를 병문안하러 간다. 영화에서 정확히 나오진 않지만 확신컨대 린다가 프랭크에게 상속권을 양도하겠다는 뜻을 밝히려는 의도로 보인다. 과거에 딸에게 성추행을 했음을 은연히 암시하는 듯한 남편 지미의 뜻밖의 충격적인 고백에 집을 나와 딸 클로디아의 집으로 향하는 로즈. 개구리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집에서 조용히 혼자 코카인을 흡입하던 클로디아는 이 믿지 못할 광경에 비명을 지르는데 마침 엄마 로즈가 문을 두드리고 둘은 안도의 포옹을 한다. 도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훔친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경찰 짐에게 발각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개구리에 얻어맞아 바닥으로 떨어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다. 치아 교정 수술을 받으려고 돈을 훔쳤다가 이빨이 깨지고 피범벅이 되는 게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전날에 짐이 범인을 쫓다가 잃어버린 총이 다음날 아침 짐과 도니 앞에 뚝 떨어지는 것이다. 이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체포하려고 할 때는 총이 분실되더니 용서를 하자 총이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총을 떨어뜨리면서 짐에게 처벌할래? 용서할래? 양자택일하라고 주님께서(?) 묻는 것이다. 주변엔 죽은 개구리 천지다. 총은 단지 하나 뿐이고. 개구리가 총을 이겼다. 폭력의 종식.. 용서와 화해.. 구원으로 이르는 길.. 도니는 짐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 훔친 돈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법은 법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짐은 도니를 처벌하지 않기로 한다.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묻는다. “뭘 용서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번역이 정확한 지는 심히 의문이 들긴 하지만) “가장 힘든 부분은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거예요.” 짐은 클로디아에게 찾아가 진심 어린 사랑 고백을 하고 클로디아는 미소로 화답한다. 이때 클로디아의 시선은 관객을 향해 있다. 관객에게 보내는 미소이기도 한 것이다. 괜찮다고.. 우리 같이 견뎌보자고.. 마침 에이미 맨의 ‘Save Me’가 구슬프고 음울한 곡조로 흐른다. 날 구해줘..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꽉 붙잡으며.. 누군가는 사랑으로 구원받고 누군가는 용서로 구원받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구원받고 누군가는 저항으로 구원받는다.
재밌게도 여기 나온 주요 인물들 모두 하나같이 고백을 하더라는 것이다. 마치 고백을 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처럼. 그것이 저항이든 분노이든 참회이든 간청이든 어리석음이든 죄책감이든 사랑이든 후회이든 상처이든 용서이든 저마다 고백의 종류와 내용은 다르지만 사연은 다 구구절절하다.
<매그놀리아>는 다중 플롯의 구조를 가진 영화다. 쉽게 말하면 하나의 영화에 여러 편의 영화가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이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다중 플롯이라고 부른다. 독자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독자성만 있고 연결성은 없는 옴니버스와의 차이점이다. 간혹 더러는 다중 플롯과 옴니버스를 착각해서 혼동하는 병신들이 있는데 그건 이러한 차이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발생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지금에야 다중 플롯의 구조가 익숙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된 당시만 하더라도 낯선 방식이었을 게다. 물론 이전에도 로버트 올트먼이 ‘숏 컷’에서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에서 시도한 바가 있었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은 로버트 올트먼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로버트 올트먼의 적자(嫡子)라고 평가받는 그이기에.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적어도 당시엔 그랬다. 그러고 보니 로버트 올트먼이 작고한 지도 꽤 오래됐구나. 올트먼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중 플롯으로 극을 전개하는 것이 작가가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일단 등장인물이 많고 각기 개별적으로 서사를 부여하다 보니 이것을 추스르는데 있어 다중 플롯은 피할 수 없는 방식이 되었다. 각각의 독립된 서사는 서로 교차하고 간섭하고 충돌하면서 감정을 증폭시킨다. 사실 개별적 서사로 보면 빈약하고 단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다중 플롯의 구조가 영화를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감독의 판단이 옳았다.
3시간이라는 런타임만큼이나 거대한 영화. 물리적 스케일이 아니라 감정적 스케일이 블록버스터급인 영화. 메시지가 거대한 영화. 할리우드 영화의 파괴력은 이런 영화에서 나온다.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가 아니고.
<매그놀리아>를 보면서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한국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민규동 감독이 이미 공개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매그놀리아>를 노골적으로 벤치마킹한 영화다. 설사 이런 사실 관계를 모른다 하더라도 두 영화를 비교해 보면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흡사하다는 것은 다중 플롯의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을 제외하면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결도 다르고 정서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고 화면의 톤도 다르다. 한마디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매그놀리아>의 말랑말랑한 버전이랄까. <매그놀리아>에 비하면 피상적으로 훑는 수준이다. 당의정을 입혀 먹기에는 편하지만 대신 얄팍한 감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이쯤 되면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매그놀리아>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제목 벤치마킹. 만약 <매그놀리아>의 부제를 단다면 이렇게 달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생애 가장 특별한 하루. 그렇다. 놀랍게도 영화 <매그놀리아>는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3시간이라는 긴 런타임 동안 그렇게 많은 일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듯 여기저기서 벌어지는데 고작 하루라니. 마치 감독이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관객에게 최면을 건 거다. 일종의 트릭이랄까. 착각 현상을 일으킨 거지. 등장인물이 워낙 많기도 했고. 역시나 범인은 다중 플롯이다. 다중 플롯의 구조가 착시 현상(錯時現象)을 만든 거다. 시간적인 착각이 일어나는 현상. 생각해 보면 하루는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면 감독의 야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만들어 낸 현대 미국인의 황폐한 심리에 메스를 들이대 낱낱이 해부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그러면서 용서와 화해를 처방전으로 제시하며 구원으로 이끈다. 옛날에 영화 공부할 때 어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매그놀리아>를 보면 이건 진짜 세상 다 산 사람이 만든 영화다. 근데 이거 만들었을 때 감독의 나이가 서른도 안 됐었다. 한마디로 미친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교수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그나저나 나도 미친놈 소리 한번 듣고 싶다. 그런 의미의 미친놈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를 다 본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의 영화는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같다. 이 영화 <매그놀리아>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지끈거린다. 타란티노가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면 폴 토머스 앤더슨은 광기의 시인으로 불릴 만하다. 그의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광기가 서려 있다. 역시 예술은 광기의 산물이지.
프랭크를 연기한 톰 크루즈를 보면서 세 개의 키워드가 연상되었다. 인터뷰, 종교, 가정사. 프랭크는 여성을 유혹하는 법에 대해 강연을 하는데 흡사 교주 같은 그의 모습이 평소 톰 크루즈가 신봉하는 사이언톨로지를 떠올리게 했다. 인터뷰에서 여기자가 프랭크의 숨겨진 가정사를 들춰내자 프랭크가 흥분하는 장면은 예전에 톰 크루즈가 호주 기자와 인터뷰할 때 사이언톨로지를 사이비 종교로 의심하며 집요하게 추궁하는 호주 기자에게 흥분하던 모습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 그러고 보니 이후에 폴 토머스 앤더슨이 찍었던 ‘마스터’는 사이언톨로지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또한 톰 크루즈가 <매그놀리아>와 같은 해에 내놓았던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도 사이언톨로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묘한 연결점이다. 마지막으로 프랭크가 병상에서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원망과 증오를 표출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톰 크루즈의 자전적 경험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어쩐지 연기 같지가 않았다. 연기라고 하기엔 사실적이었다. 덕분에 빨려 들어가듯 감정 이입을 하게 됐다. 이렇듯 역할(허구)과 배우(현실)가 분리되지 않고 겹칠 수도 있구나를 새삼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톰 크루즈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최근 와서 더 심화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액션 배우로 전락한 것이다. 한때 톰 크루즈도 오스카의 부름을 받은 때가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오스카의 부름을 받은 영화가 바로 <매그놀리아>다. 이 영화로 그는 남우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99년도 영화 <매그놀리아>. 1999년이라는 숫자가 상징적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영화 <매그놀리아>에는 세기말적 분위기, 정서가 녹아 있는 듯하다. 그는 1999년도에만 <매그놀리아>, ‘아이즈 와이드 셧’ 이렇게 무려 두 편의 묵직한 예술 블록버스터(?)를 내놓는다.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봐도 1999년도는 이례적인 해이다. 그렇게 20세기를 끝으로 그는 오스카와 영원한(?) 작별을 선언한다. 21세기에 접어들며 그는 의도적으로 액션 블록버스터나 코미디, 로맨스물과 같은 대중 상업 영화만을 고집하며 오스카의 색깔을 지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행한다. 지금과 같은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배우가 과거에 폴 토머스 앤더슨, 스탠리 큐브릭, 닐 조든과 작업을 했던 사람인지 의아할 정도다. 반면 전 부인이었던 니콜 키드먼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21세기를 시작으로, 그와 결별을 하고 나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다. 최근에도 그녀는 오스카 후보에 올랐으며 앞으로도 언제든 오스카의 부름을 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는 의외의 발견이었다. 날고 기는 배우들이 떼거리로 나와서 균등하게 비중을 나눠 갖으며 기꺼이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너 나 할 것 없이 자처하는 가운데에서도 특히나 톰 크루즈의 연기 변신은 충격적이었다.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을 한 채 강연장에서 성적인 비속어와 제스처를 남발하고 인터뷰에서 가식으로 일관하다가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는 가면을 내려놓고 진심을 토해낼 때의 처연함은 보는 사람을 짠하게 만든다. 당시로서도 영화 <매그놀리아>와 프랭크 역은 그에게 있어 이채롭고 용감한 선택이었다. 근데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에서 프랭크와 엮이는 인물 중에 프랭크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간호사 필이 있다. 필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다. 공교롭게도 그와 톰 크루즈는 7년 후에 ‘미션 임파서블 III’로 재회한다. 톰 크루즈가 프로타고니스트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한다. 원래 연기 잘하는 배우가 악역을 맡는다. 예외가 있다면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크리스천 베일을 들 수 있겠다. 내가 필립 호프먼을 좋아하는 이유는 연기력이 워낙 탁월해서이기도 하지만 작품이 좋거나 감독이 좋거나 캐릭터가 좋다면 역할의 비중 따윈 고려하지 않고 어떤 작은 배역이라도 최선의 연기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매그놀리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중도 작고 사실 별로 도드라지는 역할도 아닌데도 그가 연기하니까 뭔가 달랐다. 인상적이었다. 가령 얼의 부탁으로 프랭크를 찾으려고 전화로 어쩔 수 없이 포르노 잡지를 구매할 때 난감해하는 연기는 디테일함의 끝장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그는 미묘한 떨림마저 능수능란하게 표현해 낸다. 사실 처음엔 그가 맡은 인물 필이 게이가 아닌가 생각했다. 남자 환자를 돌보는 남자 간호사라니. 뭔가 말투도 그렇고 섬세하달까. 더구나 다른 작품들에서도 게이 역할을 맡았었기 때문에. 가령 ‘플로리스’나 ‘카포티’에서. 근데 게이는 아니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해서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전에 그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페르소나로 불릴 만했다. 둘은 초기작부터 함께 했다. <매그놀리아>말고도 전작 ‘부기 나이트’, 마지막으로 함께 한 작품 ‘마스터’까지. 앞으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매그놀리아>에서 제일 짜증나는 인물은 줄리앤 무어가 연기한 린다다. 히스테리 쩌는 완전 미친년이다. 그녀가 나올 때마다 영화 관람을 중단하고 싶었다. 자살해서 뒈졌으면 좋았을 텐데. 아깝다. 그녀는 미친년 전문 배우인가 보다. ‘포가튼’에서도 그러더니. 왠지 그런 류의 역할이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허옇게 질린 창백한 얼굴에 온몸에 주근깨 가득하고 머리색은 불그스름한 외양부터가 이미 미친년 스멜(?)이 난달까.
도니를 연기한 윌리엄 H. 메이시는 찌질한 연기의 대가가 아닌가 싶다. 얼굴 생김새 자체가 이미 찌질이 관상이다. 도니는 ‘파고’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와 흡사한 느낌이다. <매그놀리아>에서 가장 울컥했던 장면 중의 하나가 도니가 술집에서 바텐더 브래드에게 공개적으로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굴욕을 자초하긴 하지만 그 절절함이 보는 사람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짐을 연기한 존 C. 라일리는 사실상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주요 인물들만 열 명이 넘게 등장하고 이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짐을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화자가 두 명 등장하는데 외부 화자가 있고 내부 화자가 있다. 내부 화자가 바로 존 C. 라일리가 연기한 짐이다. 그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존 C. 라일리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난 이런 배우를 좋아한다. 밋밋한 주연보다는 개성 있는 조연이 좋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성실한 연기.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내게는 마지막 두 장면으로 오래도록 잔상에 남아 기억될 영화. 개구리 비 시퀀스와 짐이 클로디아에게 사랑 고백하는 로맨틱한 엔딩. 특히 엔딩에서 감독의 연출이 기가 막힌다. 사랑 고백을 하는 짐이 프레임 인(frame in)하면 짐은 등만 걸쳐서 보여주고 말없이 고백을 듣기만 하는 클로디아의 미세한 표정만 앞에서 잡는다. 이때 짐의 대사는 낮게 깔리고 그 위에 에이미 맨의 ‘Save Me’가 처연한 가락으로 울려 퍼지며 얹히는 것이다. 덕분에 훨씬 더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을 향한 클로디아의 환한 미소로 화룡점정. 엔딩은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개구리가 아닐까. 개구리가 쏟아져 내리던 날.. 모든 게 바뀌었다. 바닥에 처박혀 피를 흘림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하였다. 개구리가 온 세상을 뒤덮는 날.. 인류의 구원은 찾아오는 것이다.
★★★★☆
개구리, 클로디아의 미소, 에이미 맨의 ‘Save Me’로 영원히 기억될 영화. 그래 맞다. 누가 누굴 용서한단 말인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그나저나 왜 제목이 '목련'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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