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The Green Mile

찰나21 2019. 7. 17. 00:36

 



 



 




그린 마일 (1999/미국)


장르 범죄, 드라마, 판타지, 미스터리
감독 프랭크 대러본트
출연 톰 행크스, 데이비드 모스, 보니 헌트, 마이클 클락 덩컨,          제임스 크람월, 마이클 지터, 그람 그린, 더그 허치슨,
        샘 락웰, 배리 페퍼, 제프리 드먼,
퍼트리샤 클락슨,
        해리 딘 스탠튼

 

 

줄거리

양로원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폴 에지콤. 64년 전 교도소의 간수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한 사형수와의 만남이 떠올랐기 때문. 폴은 양로원에서 가장 친한 동료 일레인에게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1935년 대공황기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삭막한 콜드 마운틴 교도소. 폴 에지콤은 사형수 감방의 간수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사형수들을 보호, 감독하고 그린 마일이라 불리는 초록색 복도를 거쳐 그들을 전기의자가 놓여 있는 사형 집행장까지 안내하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콜드 마운틴 교도소로 존 커피라는 특별한(?) 이름의 사형수가 이송되어 온다. 거구의 몸집을 지닌 그는 두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흉악범.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눈망울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의 어리숙한 모습에 폴은 당혹감을 느낀다. 게다가 그는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비한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 폴의 오랜 지병을 씻은 듯 깨끗하게 치료해주기까지 한다. 존 커피를 전기의자로 데려가야 할 날이 다가오면서 폴은 그가 무죄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 <그린 마일>은 시작부터 관객에게 긴장감을 부여한다. 누렇게 황금빛으로 물든 목화밭이 펼쳐지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산탄총을 들고 목화밭을 헤치며 뛰어간다. 무리 중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한 사내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목화에 걸린 찢겨나간 작은 옷 조각을 발견하고는 애타게 절규하는 목소리로 케이티! 코라!”라고 외친다. 추측컨대 유괴된 자신의 딸들 이름을 부르는 듯하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슬로우 모션으로 연출되었다. 곧이어 암전 상태에서 정체모를 어떤 남자의 음성이 들리고 그 목소리에 잠을 깨는 노인. 악몽을 꿨다. 노인이 잠을 깬 곳은 양로원. 노인의 이름은 폴 에지콤. 배식 담당 직원이 폴에게 토스트를 주며 묻는다. 날마다 산책하러 어딜 그렇게 가시냐고. 폴의 답은 간명하다. 단지 산책이 좋을 뿐이라고. 그러나 표정은 간명하지 않다. 폴은 뭔가 비밀을 품은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토스트를 받아들고는 눈치를 살피더니 곧장 우비를 입고 몰래 산책을 하러 나간다. 그렇게 혼자 산책을 하고 돌아와 동료들과 텔레비전을 보는데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폴. 옆에 있던 동료 일레인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자리를 뜨고는 한적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두 사람. 이제 폴은 그의 인생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1935년도의 기억을 털어놓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영화는 1999년에서 1935년으로 그러니까 무려 64년 전으로 되돌아가 폴 에지콤이 경험했던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플래쉬백(flashback) 구조로 서사를 전개해나가는 것인데 전형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타이타닉도 그랬고 이러한 구조 형태는 할리우드가 많이 애용하던 방식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대단히 진부하게 느껴질 것 같지만 강력한 드라마와 탁월한 연출이 그런 진부한 방식을 덮고도 남는다. 아무래도 프랭크 대러본트는 스티븐 킹에게 감사해야할 것 같다. 영화 <그린 마일>의 탄탄한 드라마는 원작자 스티븐 킹에게 많은 부분 빚졌다고 할 수 있겠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일단 드라마는 차치하더라도 영화에 영감과 소스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게다가 스티븐 킹의 명성이야 두말할 나위 없는 것 아니겠나. 이미 검증된 작가인데 말해 무엇 하랴. 실제로 스티븐 킹은 이야기 고갈에 시달리는 할리우드 공장을 먹여 살리는 할리우드의 젖줄이다. 프랭크 대러본트가 연출한 총 4편의 장편 극영화 중에서 마제스틱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작품(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스트)이 모두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세 작품 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마제스틱은 실패했다. 물론 마제스틱의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내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세간의 객관적인 평가로서 말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프랭크 대러본트는 스티븐 킹에 최적화된 감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티븐 킹 없는 프랭크 대러본트는 앙꼬 없는 찐빵이랄까. 가히 스티븐 킹의 광팬이라 할만하다. 실제로도 둘이 친구 사이라고 알고 있다. 스티븐 킹의 원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제스틱을 제외하고 내가 본 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걸작이었다. 비록 과작이지만 위대한 감독이다.

 

프랭크 대러본트는 공간을 다루는 데에 익숙하고 탁월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쇼생크 탈출과 이 영화 <그린 마일>은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다뤘고 미스트에서는 마트라는 공간으로 인물들을 몰아넣었다. ‘쇼생크 탈출에 이어 다시 한 번 감옥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든 그는 이번에는 전작보다 더 큰 야심을 담아 작정하고 만든 듯하다. 일단 런타임이 훨씬 더 길어져 세 시간이 넘는데다 종교적인 메타포와 판타지적인 요소, 인종 차별에 대한 비판, 사형 제도의 모순 거기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까지. 그러나 쇼생크 탈출의 감동에는 미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다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일까? 뭔가 전작보다 거대해지고 거창해진 것 같긴 한데 사이즈는 커지고 깊이는 줄어든 모양새 같다. 거창한 장광설로 그쳤달까. 그렇다고 실패작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만 신학적인 요소가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지. 3시간이 넘는 영화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몰입도가 강한 영화다. 그만큼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적인 작법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판타지적인 장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결합된 영화.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적인 드라마투르기(dramaturgy)가 힘을 발휘한 영화. 그러니까 술수 쓰지 않고 기교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나아간 영화의 힘. 할리우드 전통 고전 영화를 계승하는 작품이랄까. 요즘의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면 확실히 고전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리우드 영화는 아니지만 ‘7번방의 선물같은 저질 쓰레기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7번방의 선물외에도 사형에 관한 영화는 많다. <그린 마일>에서 존이 교도소에 처음 들어올 때 존을 감방으로 인도하면서 퍼시가 쩌렁쩌렁 반복적으로 외치는 대사가 영화 제목인 데드 맨 워킹도 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저명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이례적으로(?) 별점 빵점을 투하한 허접 스릴러 데이비드 게일도 있다.

 

<그린 마일>은 정확히 딱 20년 된 영화다.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온 영화. 사실 난 어느 정도 내용은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봤었던 영화였기에.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몇몇 에피소드들도 기억하고 있었고 결말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다시 보니 마치 새로 본 영화처럼 또렷해졌다. 이 영화는 전체적인 서사도 대단하지만 그 안에 자리한 자잘한 에피소드들의 향연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대단한 웃음과 재미를 선사한다. 덕분에 영화는 더 풍성해졌다. 물론 그 에피소드들은 전체적인 서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겠지만 에피소드만 딱 떼어놓고 봐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다. 적재적소에 쓰인 시각 효과도 꽤나 인상적이다. 대개는 존 커피와 관련된 장면에 많은 부분 사용됐다. 존이 기적을 행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영화 <그린 마일>에서 씬 스틸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징글스는 실제 쥐인가? 아님 컴퓨터 그래픽인가? 실제 쥐라면 대단한 연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동물 연기 중 최강(?)이랄까. 어떻게 훈련을 시켰는지 궁금하다. 만약 CG라면 어떻게 그렇게 진짜처럼 사실적으로 구현해냈는지 놀랄만하다. 이렇든 저렇든 하여간 대단해. 엔딩 크레디트를 보아하니 실제 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왜냐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쥐 한 마리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쥐라면 각본대로 연출자의 지시대로 움직여줄까? 쥐가 밟혀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나 살아나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나 이건 필시 CG로 구현된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1999년도 작품이긴 하지만 이미 그때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상태였을 것이기에 쥐를 구현함에 있어서도 핍진감 있는 결과물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CG인 게 티가 좀 난다. 결론적으로 꽤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듯 놀랍게도 이 영화도 실사를 기본으로 하고 부분적으로 CG가 합성된 영화로 탄생했다.

 

영화는 늙은 폴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과거로 돌아가면 지체 없이 존 커피의 등장을 알린다. 폴이 책임자로 있는 콜드 마운틴 교도소 E 구역의 새 죄수로 존이 들어오는 것이다. 존 커피가 교도소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 카메라는 좀체 그의 얼굴은 비추지 않고 다리와 얼굴 아래쪽까지만 잡는다. 브루틀의 대사가 이미 말해주듯이 범상치 않은 체구를 지녔음은 분명하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첫 등장부터 뭔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존은 베일에 싸인 미스터리한 인물이고 이것은 관객에게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감방 앞에서 폴이 존에게 질문을 하고 존이 대답을 하는 순간에 존의 얼굴이 공개된다. 이때 카메라는 앙각으로 존을 잡는다. 아직까지는 존을 위압감 있는 존재로 그리는 것이다. 죄수이고 흑인에다 덩치가 코끼리만하니까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감방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베일은 벗겨지기 시작한다. 감방 안으로 들어가자 카메라는 존과 폴을 같은 선상에서 비춘다. 존을 눈높이 각도로 잡는 거다. 존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그를 더 이상 위압감 있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 교도소에 오자마자 그는 울먹였다. 어두우면 무서워서 잠을 잘 못 잔다고 울었고 소녀들을 살리지 못했다고 울었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것 때문이 아니었다. 두 소녀를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때문에 울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덩치와 달리 그는 매우 순박한 인간으로 보인다.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굳어지고 영화 말미에 이르면 그의 죽음이 다가옴과 동시에 그에 대한 슬픔도 커진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흑인인데다 덩치가 컸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사건 현장에 죽은 두 소녀를 안고 있었기에 그는 명백한(?) 살인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만약 동일한 상황에서 백인이었더라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까? 그런 점에서 존이 억울하게 성폭행 살인 누명을 쓴 것은 1935년이라는 시대성과 남부라는 공간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도출 가능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야만적인 시대와 야만적인 공간이 만나서 야만적인 죽음을 가져온 것이지. 특히 영화에서 충격적이었던 장면이 존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폴에게 존의 변호사가 흑인을 똥개와 비교를 하면서 물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는 대목이었다. 그 편견에 찬 단순 무식한 논리가 어찌나 가관이던지 변호사 맞나 싶더라. E 구역의 최악의 사고뭉치 빌은 백인은 흑인과 같은 전기의자를 사용할 수 없다며 존이 듣는 앞에서 대놓고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 발언을 한다. 빌은 정신 나간 죄수라서 그렇다 쳐도 소위 배웠다는 놈이 그렇게 무식하게 인종 차별 발언을 하다니. 극과 극은 통한다 했지 아마? 변호사가 이럴진대 일반인들은 오죽했겠으며 당시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얼마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고 심했다는 얘긴가.

 

이 영화의 주된 핵심 배경은 교도소이지만 교도소 바깥으로 벗어나면 우리가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늘상 봐왔던 전형적인 미국의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보면서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 TV 시리즈 초원의 집을 보면서 느꼈던 미국의 전원 풍경에 대한 낭만과 노스탤지어, 판타지가 언젠가부터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고 살벌하고 으스스하고 무시무시한 살풍경으로 다가오더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무식함은 처형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스파키(sparky)라고 불리우는 전기의자에 처형을 한다. 근데 왜 하필 전기의자일까? 다른 방법은 없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도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이 전기의자에 처형당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영화 <그린 마일>의 잔인함은 단지 전기의자에 처형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광경을 피해자의 가족이 구경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가족 말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처형 장면을 앉아서 구경한다. 심지어 남자들은 정장 차림으로 멋지게 여자들은 곱게 차려입고 와서 마치 연극 관람이라도 하는 듯 사형 쇼를 즐긴다. 피해자의 가족은 사형수에게 대놓고 저주를 퍼붓고 사형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때늦은 고해 성사를 한다. 그러면 사형 집행을 하는 간수는 하나님의 자비 운운하면서 전기로 감전시켜 사형수를 처형한다. 사형수는 아멘하면서 처형당한다. 죽이면서 왜 하나님의 자비를 운운하는지. 하나님이 죽이라고 그랬나? 사법부의 명망 있는 판사가 사형을 언도해서 당신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을 사형시켰나? 이 모든 게 하나의 정신 병동을 보는 것 같다. 죽이면서 슬퍼하고 울질 않나. 사형수보고 저승사자 운운하면서 지옥에 떨어질 거라 저주하고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이니 두 번 죽이라고 하질 않나. 그렇게 하면 피해당한 상처가 치료가 되나? 살해당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랠 수 있나? 다시 살아 돌아오나? 처형은 인간이 하는데 하나님한테 자비를 요청하다니. 마치 신이 심판한 것처럼 가증과 위선을 떨면서. 판사는 신의 대리자인가? 판사가 신을 자처하는 것인가? 대체 이게 뭘까? 한 편의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사디즘 코미디(sadism comedy).

 

난 이 영화가 왜 19세 이상 관람 가인가 했더니 전기의자 장면이 너무 잔인해서 그랬구만. 이제 좀 이해가 간다. 특히 델의 처형 장면은 끔찍했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존의 처형 장면이 제일 슬프고 먹먹했지. 사실 자칫하다간 신파로 흐를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잘 넘긴 셈이다. 거장 프랭크 대러본트가 그런 우를 범할 리는 없지. 물론 간수 딘이 운다거나 전등이 깨지면서 스파크가 일어나거나 하는 장면은 오버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눈감아 주련다. 유독 이 영화에선 존과 관련해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주로 존이 기적을 행하는 장면에서 등장하고 존이 고통을 느끼는 장면에서도 일어난다. 스파키(sparky)와 스파크(spark) 묘하게 어울린다. 전기의자와 불꽃. ‘spark’에서 ‘y’를 붙이면 전기의자가 되고 ‘sparky’에서 ‘y’를 빼면 불꽃을 일으키는 기적이 된다. ‘y’가 붙느냐 안 붙느냐로 튀김닭이 되거나 기적이 되거나 그러네. 고통과 기적은 한끝 차이이며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 고통이 없이는 기적도 없는 법. 마지막 존의 처형 장면에서는 스파키(=고통)와 스파크(=기적)가 묘하게 만난다.

 

존은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다. 민감한 영혼이다. 예전에 스크린이라는 영화 잡지에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봤는데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대목이 하나 있다. John Coffey(존 커피)의 이니셜을 따면 ‘J.C.’가 된다. 그게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와 이니셜이 같다는 거다. 당시엔 이해가 잘 안됐는데 다시 영화를 보니 그 말이 맞다. ‘John Coffey’‘coffee’와 발음이 똑같다고 해서 ‘coffee’와 비교됐지만(물론 철자는 다르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환생인 것이다. Black Jesus(검은 예수). 존이 기적을 행하는 장면만 봐도 그렇고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도 그렇고 선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베풀고 사랑하고 악(‘퍼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벌을 내리는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들이 그를 예수로 보이게끔 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강신주식으로 표현하면 그에게는 3인칭 죽음이 없다. 2인칭 죽음만 있다. 1인칭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겐 모두가 너다. 그래서 그에겐 죽음이 안식 같은 거다. 성인(聖人)의 죽음이 바로 그와 같다. 그에게 삶은 고통이고 저주일 뿐이다. 삶은 지옥이다. 그의 표현대로 머릿속에 항상 유리가 박혀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는 피로감을 자주 토로하곤 했다.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양 모조리 흡수하는 민감한 영혼이었고 아귀다툼만 벌이는 어리석고 추악한 인간에 대해 환멸과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늘 외로웠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외로움도 있지만 남과 다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외로움. 이것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치유력도 있지만 예지력도 있어서 빌이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이미 부정적인 기운을 느끼고 폴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다만 팔만 잡혀도 존이 빌의 범행을 알게 된다거나 폴의 손을 잡아 자기가 본 것을 똑같이 보여준다거나 하는 설정은 다소 오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판타지적인 요소가 조금은 거슬렸달까. 빌의 범행으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과정을 뜬금없고 느닷없이 팔 하나 잡는 것으로 뚝딱 해결하는 것은 안이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존의 캐릭터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황당한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의 범행이 영상으로 펼쳐지는데 거기에 보면 빌이 클라우스의 집에 페인트를 칠하는데 빨간색 페인트가 밑으로 흘러내린다. 이것은 빌이 클라우스의 두 딸을 살해할 것임을 암시하는 너무나 뻔하고 상투적인 연출이다.

 

존은 지적인 능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영적인 능력은 타고났다. 마치 그런 쪽으로 안테나가 곤두서 있어 주파수를 맞춰 다 잡아내고 흡수하는 것 같다. 마치 성령으로 치유하듯 쥐도 살리고 폴의 요도염도 고치고 아무도 살릴 수 없다는 교도소장의 부인 멀린다도 살려낸다. 솔직히 멀린다를 살리는 장면에서 전등의 불이 갑자기 더 환해지고 괘종시계의 시계추가 멈추고 벽시계 유리에 금이 가고 집이 흔들리고 그런 장면들은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멀린다를 치료할 때 멀린다 입에서 병마가 나와서 존의 입으로 들어갈 때 불빛이 비치고 광채가 나고 그런 장면은 마치 오컬트(occult)적인 느낌이 있다. 오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판타지적인 느낌이 강하달까. 사실 난 판타지 장르를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판타지뿐만 아니라 범죄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다. 범인이 와일드 빌로 밝혀지는 부분이 미스터리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영화에서 부차적인 장르이고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영화의 주된 장르는 드라마다. 강력한 드라마.

 

존은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선의로 가득 찬 티 없이 순결한 영혼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물론 여전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존이 치료를 행하고 나면 반드시 하는 작업이 있다. 치료를 하면 환자의 병이 치료자한테 오게 되어있다. 예전에 강신주가 말하기도 했지만 누군가 고민을 얘기했을 때 들어주는 사람이 마음이 가벼우면 상대는 아직 고민의 짐을 덜지 못한 거고 들어주는 사람이 힘들면 상대는 가볍게 고민의 짐을 덜은 것이다. 그래서 존은 환자로부터 자신에게 전이된 병을 입을 열어 하늘로 날려 보낸다. 그때 벌레 떼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예외적으로 멀린다를 치료할 때는 병을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퍼시의 입에다 병을 전이시키는데 꽤나 끔찍하다. 그리고 그렇게 병이 잔뜩 들어 버린 퍼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정신이 아닌 빌에게 총을 뽑아 들어 난사하고 빌은 피범벅이가 되는 장면은 꽤나 강렬한 충격이다. 결국 권선징악이다. 어떻든 간에 악한 인간들은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존의 전략은 이거다. 자기가 직접 죽일 순 없으니 퍼시를 미치게 만들어 퍼시가 빌을 죽이게끔 만든 것이다. 한 놈은 정신병자로 만들고 다른 한 놈은 골로 보낸 거지. 악이 악을 응징하도록 만든 거다. 예수가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힐 순 없잖은가. 이참에 퍼시는 빌에게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었고. 물론 대신 퍼시는 감옥 대신 정신 병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것도 본래 행정직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곳이었는데 환자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참으로 지독하게 웃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빌은 전기의자 대신 총 맞아 죽게 되었고. 그렇게 존은 두 명의 악한 인간을 심판했다. 대신 자신은 빌 대신 억울하게 전기의자에 앉게 되었고. 물론 예정된 일이었다. 폴은 존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걸 알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법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특히나 당시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만큼 또한 존이 사건 현장에 죽은 두 소녀를 안고 있었던 만큼 결과가 뒤집힐 순 없었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사형이라니! 죽이기는커녕 두 아이를 살리려고 한 사람을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살인범으로 만들다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 마지막 존의 처형 장면을 보면 복장이 터지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사형 제도의 폐지 주장에 힘이 실릴 만큼 사형 제도의 모순이 드러난다. 물론 지금에야 억울하게 사형 당하는 경우가 옛날에 비하면 현저히 감소했겠지만 글쎄 어디까지나 이것도 내 개인적인 추측이다. 어찌됐건 존의 처형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왜냐면 존은 예수이기 때문에. 존의 죽음은 사실 순교인 것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사형수의 죽음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그러했듯이 존도 억울하고 참혹하게 죽은 두 아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한 짓이 아님에도 기꺼이 전기의자에 묶여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가 그린 마일에 온 것은 사형수로서가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둠 속의 한줄기 빛으로 임재한 것이다. 영화 중반쯤에 변호사가 폴에게 존을 가리켜 하늘에서 떨어진 놈 같다고 표현을 하는데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말로 다가온다. 예수가 덩치 큰 흑인 사형수로 환생한 것이지.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공간적으로도 당시 남부라는 곳의 특성상 보수주의 기독교의 뿌리가 강한 밑바탕을 깔고 있는 정신세계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어쩔 수 없구나. 미국 놈들이란. 지금은 많이 탈기독교화됐지만 예전엔 심했다. 이게 미국이란 나라의 한계이고 이 영화의 한계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분명 재미도 있고 감동적이긴 한데 피상적인 감동에 머무르는 느낌이랄까.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길어 올리는 우물 같은 감동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창동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여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러한 요인에는 만듦새나 완성도의 차이도 있겠지만 정서의 차이도 큰 것 같다.

 

이 영화의 성공에는 배우들의 공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한 명의 배우가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앙상블 연기가 돋보여야 하는 영화였는데 서로 밸런스가 잘 맞게끔 잘 조율이 된 연기였다. 호흡이 좋았다. 톰 행크스야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는 신뢰감 백 퍼센트의 배우이니까. 그만큼 고르고 안정감 있는 연기를 매번 보여주는데 그래선지 연기가 비슷비슷하단 생각도 든다. 뭐랄까 스테레오 타입화된 배우? 아님 말고. 나름(?) 연기 변신도 하는 배우다. ‘로드 투 퍼디션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성공적인 연기 변신의 한 사례다. 내가 알기로 그는 작품 선택을 참 잘하는 배우다. 물론 좋은 각본이 일단 그한테 먼저 가니까 선점 효과가 있겠지만.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특히 90년대는 그의 해였으므로 그가 선택하는 작품마다 특별히 망한 영화는 없고 어지간하면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좋은 영화는 언제나 그의 몫이었으므로. 마이클 클락 덩컨은 이 영화로 오스카 남우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주연인 톰 행크스 못지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흡사 전() 농구 스타 섀킬 오닐을 연상시키는 공룡 같은 체구에 순박하게 웃거나 어린애처럼 우는 모습은 정말 아주 극한 대조를 보이며 보는 사람을 심리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는 마력을 선사한다. 이후 벤 애플렉 주연의 데어데블에서 킹핀이라는 악당으로 나왔으나 영화는 폭망했고 그의 연기 변신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듯 한 배우의 얼굴에는 상반되는 두 얼굴 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 더그 허치슨이 연기한 퍼시는 간수지만 죄수보다 더 악질인 놈이다. 그는 퍼시라는 역할을 참 얄밉게도 연기한다. 체구도 작고 야비한 인물이다. 빌과 더불어 교도소의 말썽쟁이로 이 새끼하고는 안 부딪히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문제적 인물. 그렇게 주변 모든 사람에게 미운털이 박혀도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까닭은 소위 말해 빽이 막강한 집안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고 있기 때문. 한마디로 제멋대로 막 나가는 철부지에 찌질하고 못난 놈이다. 주로 프랑스계 죄수인 델을 놀려 먹는 재미로 사는 그는 빌이 들어오면서 막강한 적을 만나게 되고 소위 말해 뿌린 대로 거두듯이 빌에게 보복을 당하게 된다. 델과는 틈만 나면 으르렁대다가도 빌한테는 꼼짝도 못한다. 드디어 악랄한 간수가 더 악랄한 죄수를 만났다. 천적을 만난 것이지. 폴과 브루틀이 한패가 되어 퍼시와 벌이는 간수 간의 기싸움도 볼만하다. 퍼시는 사디스틱(sadistic)한 캐릭터다. 그의 사디즘(sadism)은 자신이 처형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폴에게 강력하게 피력하는 대목과 델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죄수지만 존은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나 다름없다. 델도 인간적인 사람이다. 좀 깐족대고 수다스럽고 그렇긴 하지만. 극중에서 제일 먼저 처형되는 비터벅은 거의 수행자 느낌의 묘한 매력의 인디언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씬 스틸러는 샘 락웰이 아닐까. 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게 아마 이 영화였을 게다. 아님 미녀 삼총사거나. ‘미녀 삼총사보다는 이 영화에서 먼저 봤던 것 같다. 정말 상또라이 역할을 잘 해냈다. 주로 이 배우는 또라이 캐릭터나 악역을 잘 해낸다. 내 기억으론 한 번도 노멀하고 정상적인 역할을 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본 영화들에서는 그랬다. 작년에 쓰리 빌보드로 오스카 남우 조연상도 받고 해서 지금에야 웬만한 영화 팬이라면 이 배우를 모를 리 없겠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는 신인 배우라 할 만큼 인지도가 굉장히 낮았지. 하여간 다른 건 몰라도 연기력 하나는 출중한 배우다. 진짜로 교도소에 가면 저런 또라이 하나 정도는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연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샘 락웰은 이 영화에서는 괜히 애먼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도록 만드는 인물이었는데 컨빅션에서는 본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인물로 나온다. 배리 페퍼가 여기 나온 줄은 이번에 보고 처음 알았다. 하긴 당시엔 몰랐던 배우였으니까. 미국 인디 영화계의 대모(大母)라고 불리는 퍼트리샤 클락슨의 출연도 반갑다. 특히나 그녀가 맡은 역할이 이채로웠다. 하필이면 심하게 병든 환자로 나오는데 존 커피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보여 주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이지. 두 딸을 잃은 피해자 아버지로 나오는 윌리엄 새들러와 간수들 중 한 명으로 나오는 제프리 드먼은 이 영화의 감독 프랭크 대러본트의 페르소나라 할 만하다. 윌리엄 새들러는 감독의 전작 쇼생크 탈출과 아직까지는 대러본트의 마지막 장편 극영화 미스트에도 나온다. 특히나 제프리 드먼은 감독의 모든 영화에 다 출연했다. 심지어 TV 시리즈 워킹 데드에도 나왔다. 진정 페르소나라 할 만하다. ‘파리, 텍사스에 나왔던 해리 딘 스탠튼은 이 영화에서 모범수로 나온다. 그래서 빌에게 빵도 팔고 마지막에 존의 소원인 영화 감상에서 필름 영사기도 돌린다. 특히나 그의 연기의 압권은 리허설 장면에 있다. 사형 집행 전에 리허설을 하는 것이다. 그때 사형수의 대역으로 그가 리허설에 참여를 하는데 장난기 가득한 그의 태도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리허설 문화가 많이 발달된 것 같다. 심지어 사형 집행에서도 리허설을 하다니. 진귀한 장면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예전에 보니까 오스카 시상식도 리허설을 하더라. 그것도 당일 리허설이 아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거 보면서 참 준비성이 철저하고 치밀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에서 해리 딘 스탠튼은 파리, 텍사스에서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때는 거의 자폐증 환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얼마나 수다스럽던지.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지만. 참고로 20년이 된 영화라서 그런지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들이 꽤 많다. 그를 포함해서 노인 폴 에지콤을 연기한 배우도 죽었고 폴의 양로원 친구 일레인 역을 한 여배우도 죽었다. 그리고 두 마이클(Two Michael)이 죽었다. 마이클 클락 덩컨은 꽤 이른 나이에 죽었고 델을 연기한 마이클 지터도 죽었다. 참고로 마이클 지터는 여기서는 죄수로 출연했고 패치 아담스에서는 정신 병원 환자로 출연했다. 갇히는 역할 전문인가 보다.

 

영화 마지막에 가면 왜 늙은 폴이 날마다 산책을 갔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온다. 바로 징글스 때문이다. 오래 살게 되면 그만큼 많은 죽음을 봐야만 한다. 그게 일종의 저주지. 징글스가 오래 사는 만큼 노인도 죽을 수 없는 거다. 돌볼 게 있는 사람은 그만큼 삶의 끈을 놓기가 힘들다. 돌보는 게 사라지면 그제서야 끈을 놓게 되겠지. 그런데 쥐의 수명이 그렇게 긴가? 징글스가 늙어서 이제는 둥근 장난감을 잘 굴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웃기면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의 사형 집행 날 그린 마일을 걸어갈 때 존은 이제껏 영화에서 가장 밝은 모습을 보인다. 도리어 존을 사형장으로 인도하며 걸어가는 간수들의 표정이 어둡다. 마치 입장이 바뀐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처형 장면이 총 세 번 등장하는데 마지막으로 처형당하는 죄수가 존이다. 역시나 마지막 존의 처형은 폴이 맡는다. 사실 폴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사형을 직접 집행한 적이 없었다. 존의 처형을 맡기 전까진. 그저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이었지. 이것은 그만큼 둘 사이가 각별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의 슬픔은 고조된다. 그린 마일(중의적인 의미로 표현)에서 가장 특별하고 아끼는 관계였던 두 사람인데 폴은 존을 죽여야만 하고 존은 폴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슬프고도 잔인한 역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차피 존은 처형당해야만 하는 운명이고 그랬을 때 폴이 존을 처형하는 것은 영화가 이 두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인 것이다(물론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설정이지만). 폴은 자신이 직접 존을 천국으로 떠나보낸 것에 대해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존은 폴의 집행으로 처형을 당하는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기에. 존의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폴이 존의 처형을 맡은 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다.

 

영화는 존의 처형 장면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처형 전에 존과 폴의 절절한 대화와 슬픔에 빠진 간수들의 리액션, 전기의자에 앉고 나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존의 모습에 상당 부분 분량을 할애한다. 처형 전까지의 과정을 좀 세세하게 보여주고 전기의자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은 짧게 보여주고 넘어간다. 왜냐면 존이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현실 자체가 이미 잔인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사디스틱(sadistic)한 영화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형 집행을 전시하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영화가 아니라 사형 제도의 모순과 사형 집행의 잔인함을 통해 시대의 잔인성과 남부라는 공간의 잔인성 더불어 사형수들의 의외의 인간적인 면모, 간수들의 고뇌, 사형수와 간수의 묘한 우정,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비록 죄를 진 인간이지만 사형수를 보면서 간수는 묘한 연민을 느끼고 사형수는 간수를 보면서 뭐라 느낄까?

 

이 영화가 훌륭한 건 교도소를 배경으로 사형수들이 등장하는 만큼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흐를 법도 한데 거기에 적절하게 유머를 섞어서 마냥 무겁지도 마냥 가볍지도 않게 절묘한 배합으로 균형감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진지하면서 웃기고 웃기면서 슬픈 영화다. 유머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이다.

 

제목 그린 마일은 감방에서 사형장까지 걸어가는 복도를 의미한다. 그 복도 색깔이 녹색이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엔딩에서 노인 폴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그린 마일을 걷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형수다. 죽음 앞에선 모두 사형수다. 꼭 스파키에 앉아야만 사형수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대사가 지금 나의 말과 포개진다. 오 신이시여, 가끔씩 나의 그린 마일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요.

 

★★★★

재밌다. 감동적이다. 그러나 길고도 거창한 장광설? 도식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과 감동에는 크게 못 벗어나는 영화 같다.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존이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들은 쉽사리 용서(?)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 존의 처형 장면에 흐르는 감정 과잉도 좀 거슬리고.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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