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굿 컴퍼니 (2004/미국) 장르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 감독 폴 위츠 출연 데니스 퀘이드, 토퍼 그레이스, 스칼릿 조핸슨, 마그 헬젠버거, 데이비드 페이머, 클락 그렉, 필립 베이커 홀, 프랭키 페이즌, 타이 버렐 |
줄거리
잘나가는 잡지 '스포츠 아메리카'의 광고 이사 댄 포먼은 아내와 사랑스런 두 딸을 거느리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업합병으로 인해 댄 포먼은 회사에서 강등되고 새파랗게 젊디젊은 스물여섯 살의 '카터 듀리아'를 신임이사로 모시게 된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댄 포먼. 정작 그를 더 화나게 하는 건 따로 있다. 그의 큰딸 알렉스가 카터 듀리아와 연인관계라는 사실이다. 그에 반해,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던 카터의 인생도 얼마안가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카터의 아내는 결혼 7개월 만에 그에게 일방적인 결별통보를 하고 떠나버린다. 회사에서도 카터는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지 못하고 일에 대한 의욕을 점점 상실해간다. 댄 포먼이라는 외부적인 요소 때문에 알렉스와의 사랑도 순탄치 않다. 댄과 카터가 각자의 인생에 서로가 끼어든 순간부터, 두 사람 모두 사면초가에 봉착하는데... 댄과 카터는 각자 자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한마디로 너무 '착한 영화'다.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 <인 굿 컴퍼니>는 재미없고 심심하며 매력이 전무한 영화다. 이 말을 잘 읽어주길 바란다. 나는 지금 '착한 영화는 매력 없다'는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나쁜 영화'가 '착한 영화'보다는 좀 더 자극적이고 센 재미와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이다. 간단한 예로, '올드보이'를 봐도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플롯이다. 착한 영화라고 해서 재미없고 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일일이 다 기억을 더듬어 볼 순 없지만, 그동안 내가 봐왔던 재밌는 영화들(의외로 많은 영화들을 섭렵하진 못했다) 가운데 상당수의 작품들이 착한 영화(들)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만 이들 작품은 짜임새 있는 플롯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어떤 영화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무기로 하거나 혹은 그것을 맛깔스런 양념으로 내러티브에 적용시켜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인 굿 컴퍼니>와는 반대로, 진부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신선한 플롯 혹은 독창적인 연출로 승화시켜 아예 새롭고 매력적인 내러티브로 탈바꿈시키는 경우도 있다. 때론 배우의 독보적인 연기가 영화를 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내러티브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받쳐줄 때 가능하다 말할 수 있다. 하나의 건축물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요소는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이다. 배우가 바로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죽어있던 활자를 비로소 살아서 팔딱이는 영상언어로 변모시키니까. 그러나 사람을 건물에 살게 만드는 건 건물이 있기 때문이고, 건물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의 건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재와 자재비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건축 설계를 제대로 해야 부실공사를 예방할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 좋은 재료보다 플롯의 뼈대와 골격을 튼실하게 세우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런 다음에야 배우의 역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한 기본 전제가 깔려있지 않은 상황에서 펼치는 배우의 연기는 모래성을 쌓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 굿 컴퍼니>는 플롯이 가지는 매력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솔직히 이 영화의 컨셉은 매력적이다. 평범한 가장이자 직장에서는 어엿한 중책을 맡고 있는 50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기업합병이라는 일종의 외세침략을 당해 곧바로 자신은 강등되고 속된 말로, 외부에서 쳐들어 온 스물여섯의 새파랗게 젊은 놈을 보스로 모시게 된다는 스토리. 더 재밌는 건, 자신이 끔찍이도 아끼는 큰 딸이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어린 보스와 연인관계라는 기막힌 영화적 설정이다. 참 짓궂은 감독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인 굿 컴퍼니>의 각본은 감독 폴 위츠 본인이 직접 집필했다. 문제는 그나마 흥미로운 소재를 더 흥미롭게 극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개봉당시, 포스터를 봐도 그렇고 홍보나 마케팅도 그렇고 스칼릿 조핸슨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스칼릿 조핸슨은 거의 조연급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판 포스터에는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주연에 해당하는 데니스 퀘이드와 토퍼 그레이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있고 스칼릿 조핸슨은 둘 사이에서 비교적 작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크레디트 상으로도, 국내에서의 인지도와는 무관하게 스칼릿 조핸슨은 자신의 이름을 세 번째에 올린다. 영화는 데니스 퀘이드가 맡은 인물 댄 포먼과 토퍼 그레이스가 연기한 카터 듀리아를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관객 입장에서는 왜곡된 홍보와 본질 사이에서 분노와 배신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관객석을 하나라도 더 채워야하는 그들 입장도 전혀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미국 교외의 어느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가장 댄 포먼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가 4시 반을 알리는 알람시계를 비춘다. 중년의 남자가 깊이 잠들어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침대에서 나와 샤워를 한다. '헤드윅'으로 유명한 작곡가 스티븐 트래스크의 음악이 감미로운 선율을 타고 오프닝 시퀀스에 흐른다. 이쯤에서 영화는 벌써 관객에게 꽤 많은 정보들을 흘린다. 관객은 주인공의 직업과 나이 대를 유추할 수 있고, 장르를 가늠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영화의 분위기 나아가 어떤 식의 무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프닝에서 보여지는 댄의 모습은 그에겐 하루 일과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직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하루의 시작이고, 하루를 삶 전체로 가정한다면 삶의 시작이며 동시에 영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오프닝이 마무리되고 곧이어 장면전환하면 카터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때,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댄과 카터 두 인물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까라는 호기심어린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다음날 아침, 새 직장에 첫 출근을 하는 카터와 오프닝에서 보여졌던 댄의 딸 알렉스가 서로 엇갈리며 지나친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 '연인관계형성'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날 것임을 이미 관객으로 하여금 짐작케 한다. 곧이어 회사에서, 서로 한눈팔며 지나가던 카터와 댄이 몸을 격하게 부딪히는데 이 장면은 앞으로의 둘의 관계설정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낸다. 두 사람이 라이벌 혹은 적대관계에 놓일 것임을 확실하게 암시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재밌는 부분이 바로 교차편집인데, 댄과 카터의 서로 대비되는 상황 혹은 비슷하게 겹치는 상황이 교차편집을 통해 다소 상투적이지만 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또 하나, 장면전환도 꽤 재치있고 적절하게 사용되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서두에 보면 댄 포먼이 자신의 단골 거래처 회장 칼브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댄과 칼브의 만남은 영화 말미에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이때는 카터가 둘 사이에 끼여 같이 등장한다. 칼브는 자신의 사위가 자기를 공룡이라고 부른다며 푸념 비슷하게 말을 하는데, 댄은 한때 공룡이 지구의 지배자였다고 농담 식으로 맞받아치며 그를 위로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공룡모양의 휴대폰을 재기발랄하게 프리젠테이션 하는 카터의 모습이다. 재밌지 않은가. 마치 카터가 댄을 지배할 지배자의 역할을 담당할 적임자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얼마안가 그러한 예견은 영화 속에서 현실이 된다. 그러나 더 잔혹한 현실은 댄의 큰 딸이 그가 상사로 모시게 된 카터와 연인사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카터와 알렉스에게도 이런 상황은 잔혹한 현실이지만, 영화의 주인공 댄에게 좀 더 가혹한 현실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걸 바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카터가 때 이른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새로 구입한 명차로 주행을 시도하자마자 다른 차량과 부딪혀 차체 왼쪽 앞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지고 운전자에게 욕을 얻어먹게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인생의 내리막길로 향하는 지름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바로 뒤, 카터는 결혼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변덕심한 아내 킴벌리로부터 일방적인 결별통보를 받는다. 회사에서 여전히 책임자 자리에 있으면서도 내심 자신의 미래가 불안했던지 카터는 알렉스와 푸스볼을 하는 도중,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제 내게 남은 건 내리막길 밖에 없다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는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는 회사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지 못하고 정말 내리막길을 걷더니 급기야 해고되기에 이르고, 알렉스와의 관계도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반대로 영화 초반에, 댄은 기업합병이라는 변수를 만나 회사에서 강등되고 젊은 놈을 상사로 모셔야하는 굴욕을 당한다. 거기다 뜻밖에 벌어진 아내의 임신 소식은 그에게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보다는 경제적-심리적 부담을 가중시킨다. 애지중지 키워 아직도 그에겐 다섯 살 꼬마 아이로 여겨지는 자신의 딸 알렉스가 그가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던 카터와 연인관계라는 사실은, 그를 완전히 '멘붕'상태로 몰고 간다. 그러나 그가 회사에서 남몰래 쌓아온 20년의 노하우는 얼마안가 그를 다시 제자리로 복귀시키고 알렉스는 그 옛날 귀여웠던 소녀로 다시 그의 품안에 돌아왔으며, 그리하여 새로 태어난 아기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경제적-심리적) 여유마저 찾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한다. 두 사람의 역학관계에서 나타나듯, 반드시 한쪽이 가라앉을 때 다른 한쪽이 떠오르고 동시에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과 동일한 원리인 셈이다. 그렇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너무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을 맛본 탓에 혈기왕성한 에너지와 패기 밖에 모르던 카터는 공적으로는, 비록 자신의 부하이긴 했으나 댄의 노련함과 일을 대하는 프로페셔널한 자세 그리고 사업수완능력을 배우며 자신의 한계를 체감하는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사적으로는, 실연의 상처와 배신감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며 어른으로 한 단계 성장한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전자가 코미디 드라마라면 후자는 로맨틱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성장 드라마다. 특히 카터에겐 절대적으로 그렇다.
<인 굿 컴퍼니>를 보면서, 이 영화가 미국의 보수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보통의 미국인들의 평범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직장에서는 근면하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다하고, 딸은 학교에선 학생으로 집에선 사랑스런 딸로서 살아간다. 가족의 생일을 챙겨주고, 젊은 남녀는 연애를 하며 사랑을 나누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사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가정과 직장내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과 행동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것 같다. 딸의 장래를 위해 비싼 등록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적극지원을 약속하는 극중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랑 똑같다. 곱게 키운 딸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때론 집착(?)을 낳기도 하는데.. 댄이 둘째딸 재나와 남자친구의 통화에 끼어들며 남자친구에게 귀여운(?) 협박을 날리는 장면이라던가, 처음으로 도심에서 혼자 생활을 하게 된 알렉스를 염려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가스분사기를 선물로 주며 기숙사 곳곳에 카메라를 몰래 설치해놨다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그에 해당된다. 영화에서는 다소 짓궂으면서 재미난 장면으로 묘사가 되어 순간적으론 크게 웃었지만,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딸을 지키려는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 안에 짙게 배어 있어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직장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 당연히 매번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는 모습이나 회사에서 해고될까 두려워 벌벌 떠는 직원들의 모습, 무엇보다 해고통보를 받고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 반대로 축 처진 어깨로 말없이 사무실을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같은 상반되는 인물들의 리액션을 통한 정서적 공감대는 국경을 초월해 문화적 차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사실 노동자에게는 직장에서 해고된다는 것이, 단순히 수입원이 없어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직장에 대한 원망 나아가 사회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에 참 어려운 문제다. 물론 회사입장에서 본다면, 사업체 유지를 위해 경제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감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 이 문제는 양측의 이해관계에 따른 상이한 입장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엄연히 현 사회에 존재하는 냉엄한 현실이다. 단, 일방적인 대규모 감원이나 불공정한 해고는 분명 사측에 엄벌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좀 안타까웠던 부분 중의 하나는 직원 중 누군가 해고를 당할 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동료직원들의 리액션이 달라지는 대목이었다. 극중에서 최초로 해고되는 인물이 일명 '기괴한 살인미소' 엔리키 콜런이다. 그가 회사를 떠날 때, 동료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박수를 치며 정의가 살아있다는 말까지 내뱉는다. 그랬던 사람들이 반대로 모티가 회사를 떠나자, 모두들 슬퍼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그에게 위로를 건넨다. 평소에 드러난 두 인물의 행동을 보건대, 감정적으로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큰 온도차를 느끼게 하는 상반된 리액션이 내게 가져다주는 당황스러움과 씁쓸한 뒷맛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람이라는 동물이 참 간사하고 냉정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한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평판(reputation)이 중요하다는 다소 불편한 진실을 각인시킨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그렇게 되묻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과신은 금물이라는 격언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영화 속 모티의 위치에 서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님 언제나 당사자가 아닌, 대상을 향해 야유의 박수를 보내거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이중인격자(?)의 입장에만 있을 거라 확신하는가? 평판이 특정인물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순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진실과 본질에의 접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고, 혹은 진실과 본질을 왜곡해서 형상화한 피상적인 평면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흠이 있다.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박수를 받으며 떠났던 엔리키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수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엔리키도 누군가에겐 귀한 아들이고 결혼을 했다면 누군가의 다정한 남편이며 누군가에겐 자랑스런 아버지일 것이다.
댄의 딸 알렉스는 카터에게 다소 의외의 자기고백을 하는데, 평범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난 자신의 환경이 저주라고까지 표현한 것이다. 다소 경멸적인 언사를 태연하게 내뱉는 이 철부지 아가씨는 자신이 마치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착각하는 듯하다. 물론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알겠으나, 다소 배부른 소리로 여겨지는 건 왜일까.
사실 '평범함의 저주'는 그녀가 아니라, 이 영화에 해당되는 말인 듯싶다. <인 굿 컴퍼니>는 나름 훈훈한 결말로 문을 닫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훈훈하게 시작해서 훈훈하게 끝난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용상 훈훈한 것과 보는 사람의 마음이 훈훈한 것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거의 벗어나지 않은 채 정석대로 흘러간다. 한마디로 이야기전개가 뻔하다는 얘기다. 도식적이고 상투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제작자와 감독은 이런 식의 무난한 이야기 접근이라면, 적당한 감동과 재미로 많은 수는 아닐지라도 일정 정도의 관객은 끌어 모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를 했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예상은 대략 맞아떨어진듯하다.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착한 영화에 쉽게 돌을 던지겠는가. 이런 유의 영화는 극찬은 받기 힘들어도, 최소한 범작이라는 고만고만한 평가는 얻어낼 수 있다. 이런 식의 안이하고 게으른 태도가 개인적으로는 괘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이런 영화를 태작(怠作)이라 부르고 싶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보여줬던 그의 연출력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정확히 말하면, <인 굿 컴퍼니>는 그의 전작과는 달리 폴 위츠 한 사람이 연출을 맡았지만 온전히 그만의 독립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크리스 위츠가 폴과 함께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걸 보면, 전작의 영향권 아래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하긴 '어바웃 어 보이'의 경우는 작가 닉 혼비의 탄탄한 원작이 밑바탕으로 깔려있었기에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을 게다. '어바웃 어 보이'를 무척 인상 깊게 본 내 입장에선, 그 때 위츠 형제가 보여준 독창적으로 번뜩이는 코미디 감각과 발군의 드라마트루기(Dramaturgy) 솜씨가 그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인 굿 컴퍼니>를 크리스가 연출했거나 혹은 형제가 같이 연출했다면 지금보다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지는 의문의 부호로 남겨둬야겠다. 영화가 맹탕으로 나온 걸 보면서, 신인 때('어바웃 어 보이'가 그의 데뷔작이 아닌 관계로 엄밀히 말하면 신인은 아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은 위험성이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다. 일찍 타오르던 재능이 그렇게 순식간에 실종돼 버리고 꺼져가는 경우를 <인 굿 컴퍼니>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너무 일찍 찾아온 성공의 기쁨이 채 만끽하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던 카터의 짧았던 행복의 단면처럼. 그러고 보니 혹시 카터가 감독(작가)의 분신 아닐까. 작가의 단편적인 삶이 투영된 자화상 같은... 한마디로 영화 안에 작가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공존한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직장에서 해고되고 야인으로 돌아간 카터가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한다는 열린 결말이 혹 이 영화 이후에 작가의 미래를 보여주는 단서가 아닐까. 이다음 작품 이후로 아직까지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가 없는 걸 보면, 지금 현재 작가의 심리상태가 이 영화 말미에 보여지는 카터의 굳은 다짐어린 마음과 공명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도 세간의 평을 의식하며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그들의 삶은 계속된다. 카터는 자신의 말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주류 사회라는 원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끊임없이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혹 너무 세게 밀쳐 절벽에 다다르게 한 후에도 알아서 제몸 살리라며 그냥 던져놓고, 제풀에 지쳐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에겐 분명 힘든 싸움이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댄은 여전히 회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으며 가정과 직장내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고, 알렉스는 바쁜 대학생활을 즐기며 자신만의 꿈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카터에 관한 재미난 장면이 있는데, 영화 초반에 자연을 배경으로 전화통화를 하며 열심히 달리던 카터를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을 하는 카터의 모습으로 진실이 밝혀진다. 배경으로 나온 자연도 실은 브라운관에서 자연다큐가 나오는 영상이 카메라의 트릭 효과를 통해 순간적인 착시효과를 일으켜 실제 자연이라고 오해를 발생시킨 것이었다. 일종의 반전연출이다. 운동을 마친 카터는 어항 속의 물고기에게 말을 거는데, 여기서 카터의 다소 사차원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이 장면이 중요한데, 카터라는 캐릭터에 대한 의미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즉 카터의 현재를 말해주는 일종의 메타포가 담겨있다. 이 장면은 그가 얼마나 외로운 인간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침 그의 '단기간' 아내 킴은 떠났고, 친구도 가족도 그렇다고 마땅히 동료도 없는 그는 이곳저곳 전화를 하며 기계의 힘을 빌려 땀을 빼고, 급기야는 금붕어에게 말을 거는 신세가 되었다.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가 자신의 처지와 모습을 연상케 했는지, 연신 금붕어에게 손짓을 하며 말을 걸지만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으니) 금붕어마저 그를 외면한다. 다른 하나의 메타포는, 카터가 러닝머신을 뛸 때 배경으로 등장했던 자연다큐에서 찾을 수 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글을 빗대어, 살벌한 무한경쟁의 사회 그 한복판에 내던져진 카터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그렇다고 카터만 정글사회에 던져진 건 아니다. 댄도 마찬가지.
댄과 카터의 대비되는 모습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건, 비록 두 사람이 라이벌 구도에 놓인 불편한 관계이지만 실은 삶이 고단한 건 둘 다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댄이 딸 알렉스의 학비 마련을 위해 집을 저당 잡는 서류에 서명을 하는 장면은 카터가 아내와의 이혼서류에 서명하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내에게 버림받고 친구하나 없이 그저 같이 식사할 파트너를 애걸복걸하며 구하는 가엾은 카터보다 딸의 고액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고되긴 하지만 그래도 가정이 있고 새로 태어날 아이를 맞이할 기쁨을 누리는 댄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상기시킨다면, 언젠간 카터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아니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도 가능하다. 어찌됐건, 댄에게도 카터로 인해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고 한땐 증오했으나 이젠 애정어린 충고를 해줄 수 있게 된 귀중한 친구 하나를 더 얻은 셈이니 결과적으로 댄의 입장에선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엔딩에 이르면, 벌써 변화의 한줄기를 잉태한 카터의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나타난다.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카터가 전화통화를 하며 자연을 배경으로 달리고 있다. 이윽고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다소 놀랍게도 실제 자연을 배경으로 모래사장 위를 달리고 있는 카터의 모습이 나온다. 반전연출은 더 이상 없었다. 만약 반전연출이 있었다면 그것은 카메라 기법을 통한 꼼수 섞인 반전이 아니라, '카터'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자기 자신에게 변화로서 증명해보인 진정한 반전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실내에서 기계장치를 이용해 제자리걸음만 하던 그가 이제는 사방이 뻥 뚫린 해변가 모래위에서 맑고 탁 트인 공기를 마시며 앞으로 주욱주욱 나아가며 달려간다. 두렵고 살 떨리는 모험을 감내하겠다는 기백어린 용기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불안한 미래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더 이상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의 신세를 벗어나 저 넓고 푸르른 광활한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큰 고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안온함과 익숙함에 젖어 어떤 것에도 도전하지 않는 좀비에서 벗어나 과감히 밧줄을 끊고 집채를 집어삼킬만한 거대한 파도와 마주쳐도 결코 항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결의가 어항에서 그를 탈출시킨다. 그래야 비로소 살아 숨 쉬는 나를 보게 될 테니까.
이건 여담인데, 아무래도 토퍼 그레이스는 딸을 가진 모든 아버지들에겐 공공의 적인가보다. 공교롭게도 '트래픽'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딸을 마약세계로 인도해 파멸시켜 마이클 더글러스를 분노케 하더니, 여기서는 또 하필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하인 데니스 퀘이드의 공주 같은 어린 딸을 건드려 데니스 퀘이드에게 '분노의 주먹'을 가격 당한다. 보너스로 심한 욕설까지. 물론 내가 본 토퍼의 영화는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한 '오션스 일레븐'은 제외하고) 두 편 뿐이다. 토퍼.. 설마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건 아니겠지?
★★
영화를 보면, 다인종 다문화 국가 미국의 풍경이 살며시 드러난다. 차이나타운.. 초밥.. 회.. 이국적인 유럽식(정확히 그리스인지 이탈리안인진 모르겠지만) 레스토랑. 물론 철저히 이 작품은 백인들의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레이시즘 영화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미국의 보수성이 드러나는 따분한 영화인건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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