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님은 먼곳에

찰나21 2012. 4. 6. 02:35

 

 
 
 님은 먼곳에 (2008/한국)


장르 드라마, 전쟁
감독 이준익
출연 수애, 정진영, 정경호, 엄태웅, 주진모, 신현탁

 

 

줄거리

가끔씩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인 '순이'는 외아들 '상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매달 군대 간 남편의 면회를 간다. 그러나 언제나 살가운 말 한마디 없고 무뚝뚝하기 만한 남편 상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을 면회 온 순이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상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순이는 한 달 후 다시 면회를 가지만, 상길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월남으로 이미 떠나버린 상태이다.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나기를 결심한 순이. 민간인 자격으로는 베트남을 갈 수 없게 되자, 순이는 어떻게든 목적지를 가기 위해 리더 '정만'이 속한 위문공연단의 홍일점 보컬로 합류하는 우회로를 대신 택한다. '순이'에서 '서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그녀는 화염과 총성이 가득한 베트남, 그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데... 순이는 그녀의 바램대로 남편 상길과 재회할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가끔 그런 경우를 보게 된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어떤 특정 영화가 비평가 집단과 대중들에게 공개되고 그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격론이 벌어지는 경우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어느 한 개인 또는 다른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 <님은 먼곳에>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대상이 어느 한 개인이라면 그 사람은 어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만약 그것이 <님은 먼곳에>와 같이 특정 영화라면 그 작품은 시대를 앞서가는 영화 혹은 유니크한 영화일 확률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화된 데이터(data)도 아니고 도그마가 될 수도 없다. 다만 영화든 사람이든,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논쟁을 점화시키는 대상은 대중들로 하여금 분명 뭔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아마도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극단적인 호불호가 절대적 지지(반대)나 보편적 지지(반대)보다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난 개인적으로 절대다수 혹은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나 작품은 별다른 매력을 못 느끼거니와 크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물론 보편적 지지를 무시하거나 불신하진 않는다. 보편성이라는 건, 중요하고 신뢰할 만하니까. 적어도 절대적 지지보다는 충분히 신뢰한다.

 

그럼 본격적으로 본 영화의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님은 먼곳에>에 대한 그동안에 나의 평가는 호(好)보다는 불호(不好)에 가까웠다. 지금에서야 이 영화에 대해 호불호의 역전현상이 이뤄진 것이다. 아마도 엔딩의 압도적인 이미지와 여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감독의 전작인 '라디오 스타'에서도 그랬지만, 확실히 이준익은 인상적인 엔딩을 잘 남기는 연출자다. 특히 한 장의 스틸 컷을 방불케 하는 엔딩에서의 강렬한 정지화면으로 끝을 맺는 마무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성싶다. 그럼 엔딩이 <님은 먼곳에>의 전부일까. 물론 아니다. 역대 한국영화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오프닝을 남긴 작품으로 <님은 먼곳에>를 떠올려도 좋을 듯싶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마치 하늘이 열리듯 카메라가 화창한 날씨의 하늘을 고요히 비추고 주인공 '순이'가 부르는 노랫가락이 들리는 가운데 타이틀 자막이 그 사이로 조용히 뜨더니 연기처럼 사라진다. '올드보이'나 '살인의 추억'을 생각하면 유니크 하다고 말하기는 좀 찔리지만, 인상적인 오프닝임에는 틀림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특히 주인공 서니(Sunny)를 연기한 수애는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동세대 충무로의 젊은 여배우들 가운데 가히 톱클래스(top class)에 들 만한 출중한 연기력의 소유자라고 감히 단언한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평소에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성적이다 못해 자폐적인 성향을 가진 모습의 이미지가 박혀있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주로 닫혀있고 폐쇄적인, 어둡고 그늘진 인물들을 연기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그녀의 성정(性情)이 '연기'라는 매체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며 제대로 폭발하는 것이다. 끼가 많고 외향적인 사람이 연기를 잘할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다수의 생각과는 달리, 내성적이고 심지어 자폐적인 성향의 사람이 깊은 우물을 퍼 올릴 수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 깊고도 섬세한 연기를 하는데 있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연기의 스펙트럼이 더 넓다고 봐야하기에, 보다 다양한 캐릭터를 무리 없이 다양한 연기로 탁월하게 소화하는데 있어서 강점을 지녔다고 판단된다. 그래선지 <님은 먼곳에>서 수애가 맡은 순이라는 역할은 실제 그녀의 모습과도 상당부분 포개지는 듯한 기시감마저 들었다. 그녀가 연기한 순이라는 캐릭터는 외유내강 형에 가깝다. 겉보기엔 한없이 유약한 가련한 여인네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강인한 어머니의 심장을 가진 억척스러움을 품고 있는 여성으로 다소 이중적인 인물인 것이다. 정진영을 포함한 주요 조연 진들의 연기도 훌륭한 편이다. 이준익의 페르소나(persona) 정진영은 <님은 먼곳에>에서 다소 악랄하면서도 비열한 캐릭터를 익살스러운 연기로 덧칠해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탈바꿈시키는 얄미울 정도의 탁월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는 엄태웅이다. 이름값에 비해 출연분량이 적어 명목상 특별출연으로 크레디트 상에 올랐을 뿐, 실은 극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가 연기한 박상길이란 인물은 이 영화에서 속된말로, '야마'에 해당된다. 영화는 그를 구심점으로 해서 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이가 베트남으로 떠난 것도 남편인 그를 찾기 위함이고, 그가 월남 전쟁터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비로소 극이 탄력을 받아 전개된다. 한마디로, '상길'은 작가와 감독에게는 극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인 셈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쟁 한복판에 놓여있는 상길의 장면들은 극의 큰 서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니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끼어 간간히 보여지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이 모든 일들이 '상길'로부터 시작되었고 촉발되었음을 말해주며 상길이란 인물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동시에 서니 중심의 이야기에서 간간히 벗어나는 시점의 이동을 통해 상길과 김 상병의 관계변화를 보여주며, 서니의 이야기와는 다른 느낌을 전이시키는 일종의 정서적 환기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본질적인 중요도가 아닌 피상적인 비중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엄태웅은 적은 비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결코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알게 모르게 빛을 발하는 존재감 있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아마 역대 이준익 영화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님은 먼곳에>는 그의 전작들과는 달리, 비주얼이나 기술적인 부분들에도 꽤나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하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기대 이상이다. 전쟁 시퀀스들만 봐도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능가한다. 시기적으로 <님은 먼곳에>가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늦게 제작되었기에 기술적인 발전이나 노하우 축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준익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 만큼 결과는 고무적이다.

 

4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들었던 생각이 -대체 감독은 영화를 통해 뭘 말하고 싶어서 굳이 저 먼 타국까지 건너가서 힘들게 고생하며 촬영했을까-였다. 모든 영화감독들은 당연히 영화를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 물론 간혹 단세포의 뇌를 가진 감독들이 단순히 볼거리를 위해 관객들에게 시각적인 욕망만 충족시키는 행태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블록버스터와 같은 상업영화 혹은 오락영화가 메시지가 전혀 없는 껍데기만 있는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상업영화의 컨벤션 안에서도 얼마든지 작가적 야심이나 철학을 투영시키고 녹여내는 작품들이 꽤 많으니까. 최근에야 다시 본 <님은 먼곳에>는 분명 뚜렷한 메시지를 내장한 작품이다. 그전에도 어렴풋이 이 영화의 주제를 읽긴 했지만 약간은 흐릿해보였던 메시지가 지금은 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님은 먼곳에>는 철저하게 순이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남자들이 저지른 전쟁이라는 만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야만적이고 매우 어리석은 존재로 그려진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돈 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도, 걸핏하면 무력을 사용해 전쟁이라는 폭력을 일으켜 약소국의 힘없는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괴롭히며 그들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야만적인 존재도 모두 남자이다. 여성을 돈으로 착취하거나 협박해 성노리개로 삼는 악행도 남자들의 짓이다. 그 속에서 순이로 표상되는 여성은 아무 힘없고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진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약하고 지고지순하며 수동적인 순이는 강하고 자존심이 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서니로 변해간다. 순이가 서니로 바뀌어가는 사이, 반대로 기세등등하던 남자들은 점점 쇠락해져만 간다. 그러더니 이윽고 마지막에 가서는 영원히 남성들에게는 군림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여성(약자)이라는 존재 앞에, 이젠 초라한 명분으로 고개조차 들 수 없어 그녀(들)에게 매를 맞으며 깊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딱한 신세가 된다. 그렇다고 '여성은 무조건 다 약자다'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건 상대적이다. 기본적으로 여성은 약자에 속하지만, 같은 여성이라도 그 여성이 만약 미국(강대국) 여자라면 혹은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영화에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 즉 월남인들은 모두 약자에 속한다. 불미스런 일로 월남에 차출된 상길과 김 상병도 약자이고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 모두 약자이며, 심지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도 미국 정부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낸 희생양이다. 범위를 좁히면 약자는 소수에 불과할 테지만, 범위를 넓혀 상위 몇 퍼센트의 권력자 혹은 위정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들을 몽땅 약자로 규정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강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라 할지라도 악마적인 힘을 보유한 막강한 권력은, 다수라는 인해전술을 무력화시킬 만큼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님은 먼곳에>는 전쟁국가 미국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고 있다. 폭력과 섹스를 일삼고 탐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한다. 순이는 남편을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 '정만'이 이끄는 위문공연단에 합류해 월남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군보다는 미군들 앞에서 성노리개 역할을 확실히 한다. 바로 거기에 한국과 미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역으로 교차한다. 한국은 미국을 경외로운 눈빛으로 우러러보지만 동시에 열등의식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하대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우월의식을 가진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매우 일면적이고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 첨언을 하자면, 영화를 보고 전엔 몰랐던 다소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영화상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진 않지만, 순이가 남편을 면회하러 간 이유가 임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의 강요로 남편을 면회하러 가지만, 남편 상길은 아내 순이를 보고도 시큰둥하기만 하다. 시대적-공간적으로 유교문화와 가부장제 질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님은 먼곳에>에서 여성은 그저 애를 낳기 위한 기계에 불과한 일종의 부속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인 남자들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고, 평화와 순수함을 간직한 여자는 점점 힘을 얻어 수면위로 부상하는 관계의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종국적으로 남자들이 저지른 전쟁의 상처와 아픔, 고통은 한없이 넓은 품을 가진 어머니(여성)라는 일종의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 위로 받고 치유된다. 

 

사실 미국에게 있어서 베트남전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라크전과 더불어 실패한 전쟁으로 꼽힌다. 이라크 전쟁은 부쉬 정부가 남긴 실패의 산물로서,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이미 밝혀졌다. 미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끝없이 추락했고, 테러의 온상으로 불리던 중동국가들을 벌집 쑤시듯 자극하여 테러 위험에 늘 부산을 떨며 더욱더 삼엄해진 경비 태세를 갖추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빚더미에 올리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베트남전은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을 민주주의 국가로 계도시킨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 상당수가 전쟁 후유증을 겪어야했고, 미국 내부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때 평화를 주창하는 반전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진보와 저항의 물결이 넘실댔으며 히피가 창궐하고 사회심리학적으로 정신적인 방황과 공황상태가 극에 달했다. 이렇게 하나의 전쟁이 미국을 내부의 분열로 몸살을 앓게 했고, 베트남과 한국을 적국으로 만들었다. 하나 개인적인 의견을 첨언하자면, 명분이 있다는 전제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정당화를 수반한다고 보지 않는다. 목적과 명분의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강자가 선하고 옳은 명분을 근거로 약자를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계도하려는 행위는 다분히 위험하고 그 자체로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옳다고 하는 그 잘나빠진 명분도 결국 강자의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니까. 설령 그것이 옳다 해도 상대가 싫다고 거부하면 더 이상 강요해선 안 되는 것이다. 강요하는 순간, 옳지 못한 것이 된다. 본질로 깊숙이 들어가서 말하자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절대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의견은 서로 간에 다를 수 있고 진리는 상대적이다. 보편적 진리는 있을 수 있지만,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자신의 신념에 끼워 맞추기 위해 전도하는 행위는 행위 자체의 몰지각함 이전에,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아래 이미 행동의 정당성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장면이 있는데, 서니 일행이 베트콩들에게 붙잡혔을 때, 그들 중 우두머리 한 사람이 서니 일행에게 평화의 의미를 묻는 대목에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있었다. 미국(강대국)이 생각하는 평화와 베트남(약소국)이 생각하는 평화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강자는 폭력으로라도 명분과 목적을 달성하면 그것이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약자는 설득과 비폭력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평화로 여긴다. 평화라는 가치에 대한 해석이 보는 각도와 시각에 따라 이렇게 극과 극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기엔 한국도 미국과 다를 바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야만국인 것이다. 재밌는 건, 강자와 약자의 역학관계다. 서니 일행을 하나의 국가로 상정한다면 베트콩들 위에 군림하는 강자에 속하지만, 그저 하나의 소집단으로 보면 총 하나 다룰 줄 모르는 힘없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반대로 베트콩들을 하나의 국가로 상정한다면 서니 일행에 군림당하는 약자이지만, 역시 하나의 집단으로 보면 군복과 총기로 단단히 무장한 덕분에 서니 일행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힘있는 존재들이다. 이제 위치가 바뀌었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강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어제의 약자는 오늘의 약자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실컷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러나 동굴을 벗어나면, 절대강자(미국)가 강자와 약자의 역학관계에 놓여있는 그들에게 살 떨리는 공포감을 조성하고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먹잇감(베트콩)을 사살로서 제거한다. 마치 강자와 약자의 역학관계를 마음껏 비웃듯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강자(미국)의 오만은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삶의 진리는 상대성에 있다. 강자와 약자의 위치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위기 때마다 서니 일행을 구해주는 것이 노래라는 사실이 재밌다. 더 재밌는 건, 서니는 자신(한국)의 노래를 부르며 진심어린 호소를 하는 반면에 정만은 그들(미국)의 노래를 부르며 일종의 꼼수로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잔꾀를 부린다는 점이다. 어쨌건 결과적으로는 전자와 후자 둘 다 위기를 모면했으니 됐다 치자. 이준익 영화답게 <님은 먼곳에>서도 음악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다만 고정된 레퍼토리의 음악들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어,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전작인 '즐거운 인생'에 이어 또 다시 밴드가 등장한다는 점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영화에 삽입된 곡 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가슴 뭉클하게 느꼈던 음악은 아일랜드 민요로 잘 알려진 'Oh Danny Boy'이다. 제니 역할을 맡은 조미령이 바에서 불렀던 첫 등장도 좋았지만, 엔딩에서 가사 없이 흐르던 'Oh Danny Boy'의 멜로디를 잊을 수 없다. 원래 가사의 의미는 아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그리운 정을 노래한 것으로,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아들이 살아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원하는 애잔한 마음과 사랑을 담은 노래라고 한다. 이것을 <님은 먼곳에>의 내용으로 대입시키면, 말없이 전쟁터로 떠난 남편 상길에 대한 아내 순이의 원망스러운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남편과 무사히 재회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애잔한 마음을 담은 노래라고 재해석할 수 있겠다. 

 

다소 영화가 길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진 않다. 아무래도 호흡이 다소 느리고, 이야기 자체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재미를 주는 요소가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거기다 영화의 정서가 요즘 시대의 흐름에 다소 어긋나는 지지리 궁상맞은 면이 있어서 이런 부분들이 흥행을 저하시킨 주요 원인들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물리적인 런타임에 의한 작용이라고 보진 않는다. 극의 팽팽한 긴장감과 몰입 그리고 흥분되는 재미를 관객이 체험하는데 긴 런타임이 장애요소가 되진 않는다.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런타임이라는 피상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야기라는 본질에 있는 게 아닐까.

 

<님은 먼곳에>도 그렇지만, 확실히 이준익은 대단히 정치적인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님은 먼곳에>가 만들어진 동기도, 어쩌면 그전까지 미국의 일방적이고 자국 중심적 시각을 대체적으로 드러냈던 대개의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 반기를 들고자한 감독의 반골기질 때문이리라. 미국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시점에서, 더 나아가 당시만 해도 약자에 해당했고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여성의 시각으로 베트남전을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했던 감독의 포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준익의 영화가 외견상으론 쉬운(easy) 영화로 보이지만, 그래서 그것이 비평가나 대중들이 이준익 영화를 비판하는 중요요소가 되곤 하지만, 사실 이준익은 나름 대단한 내공을 가진 연출자다. 비록 겉으로 보기엔 그의 영화가 단순하게만 느껴질지 모르나, 사실 보통의 평범한 관객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이상의 뭔가 남다른 메시지를 작품에 녹여내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작인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에 비하면, <님은 먼곳에>서는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간 느낌이 들어 다소 무겁게 영화를 감상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영화를 훑어보거나, 그저 이준익이 창조해낸 전쟁의 지옥도에 젖어만 든다면, 영화가 끝난 후 꽤 짙은 여운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극의 후반부로 접어들면, 서니가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모하더니 급기야 엔딩에서는 남편의 따귀를 연신 후려친다. 자칫 엔딩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서니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혹자는 심한 행동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시간 넘도록 달려오며, 남편이 벌인 일로 인해 서니가 머나먼 타국에서 겪어야만 했던 참담한 고생담을 관객 모두가 알기에 서니의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속이 후련했다. 비록 남편을 만나기 위해 순이가 떠났던 여정이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안을 경험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은 순이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이쯤에서 다시 질문을 해보자. 엔딩이 이 영화의 전부일까. 그렇다. 전부에 가깝다. 관객들도 순이의 시점을 따라가며 응어리졌던 가슴이 엔딩에서의 예기치 못한 순이의 돌발(?) 행동에 처음엔 조금 당황하다가, 이내 순이에게 적극적인 내면원조를 행사하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화염과 시체들 그리고 총소리와 굉음으로 뒤덮인 전쟁터 한복판에서 오로지 순이와 상길만이 외딴 섬처럼 자리를 잡고 평화롭고 고요한 둘만의 고해성사를 치른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공간에 놓여있는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전쟁터 한복판에서 살육을 멈추지 않고 죗값을 눈덩이처럼 불리며 고해성사의 시간을 한없이 뒤로 늦출 뿐이다. 엔딩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순이와 상길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영영 헤어졌을까 아니면 상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순이와 상길은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순이는 가부장제를 전복시킬 위인이고, 상길은 더 이상 가부장제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한다. 제아무리 옹고집 있는 사람일지라도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앞에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뭐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구시대적 가치관을 애써 끝까지 답습하려는 인간은 퇴보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 집단이나 사회는 쪽박을 차게 될 위험이 크다.  

 

최종적으로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간혹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저 장면은 대체 왜 나왔을까.. 저 인물은 당최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네..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순간 말이다. <님은 먼곳에>서도 그런 장면이 하나 나온다. 순이가 베트남에서 미군들 앞에서 했던 첫 위문공연을 망치고 나서, 실의에 잠겨있을 때다. 어느 귀엽고 예쁜 월남 소녀가 문을 빼꼼히 열더니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생각에 잠긴 순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그녀에게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음 날인가 순이가 공연단 식구들과 앉아서 다음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맞은편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겁을 먹고 허겁지겁 도망가던 한 소녀가 미군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총탄세례를 받고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더니 순이와 눈이 마주친다. 순이에게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던 바로 그 소녀이다. 대체 왜 뜬금없이 감독은 이 장면을 영화에 집어넣었을까. 사실관계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소녀가 폭탄테러범이다. 물론 소녀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다. 아마도 베트콩의 지시를 받았겠지. 그리고 폭탄이 터진 건물은 미국인 혹은 미군들이 자리하고 있던 장소이다. 소녀가 겁을 먹은 건, 폭탄 터지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눈치 챈 미군들에 의해 사살당할 것이 두려워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지는 의미이다. 이 장면을 계기로 순이의 삶, 더 나아가 순이라는 인간 자체가 변모하기에 이른다. 소녀가 총에 맞아 죽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순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때, 감독은 의미심장하게도 슬로우 모션과 음향 기법으로 장면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이후부터 순이는 위문공연단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고 더불어 나약한 순이에서 강인한 서니로 변화한다. 소녀가 죽었을 때, 수동적이기만 했던 순이도 같이 죽은 것이다. 이 영화에서 소녀가 갖는 의미는, 일종의 (순이의 캐릭터적 변화 혹은 성장을 위한)희생양 혹은 제물이다. 이처럼 이 세상 어떤 영화도 작가나 감독이 아무 의미도 없는 장면을 영화에 마구 배치하지는 않는다. 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서 영화 안에 삽입을 하는 것인데, 다만 관객이 찾지 못할 뿐이다. 영화에 있어서 쓸데없는 연출은 있어도 쓸데없는 장면은 없다는 게, 내가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

앙숙이었던 상길과 김 상병이 둘만 월남으로 차출되면서 전쟁 한복판에 놓이자, 증오의 관계에서 연민의 관계로 발돋움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서로를 의지할수 밖에 없는 두 사람. 순이가 나약한 여성에서 강인한 여성으로 변화한것도 그놈의 전쟁 때문이다. 전화위복? 씁쓸한 아이러니. 어쨌든 전쟁은 무조건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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