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트 러쉬 (2007/미국) 장르 드라마, 음악, 로맨스 감독 커스틴 셰리든 출연 프레디 하이모어, 케리 러슬, 조너선 라이즈 마이어즈, 테렌스 하워드, 로빈 윌리엄스, 윌리엄 새들러, 메리언 셀즈, 마이켈티 윌리엄슨, 로널드 거트먼 |
줄거리
촉망 받는 첼리스트인 '릴라'는 시끌벅적한 파티를 뒤로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야외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매력적인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가 달을 보며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울려 퍼지는 음악을 조용히 혼자 듣고 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불같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그러나 릴라의 아버지에 의해 둘은 헤어지게 되고, 뱃속에 있는 아기마저 교통사고로 유산이 됐다는 말만 들은 채 그녀는 상심에 빠진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릴라를 떠나보낸 루이스는 음악에 대한 열정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11년 후, 고아원을 나와 스스로 자신의 부모를 찾겠다고 뉴욕으로 향한 '에번'. 우연히 괴짜 매니저 '위저드'를 만난 에번은 '어거스트 러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거리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릴라는 병세가 악화된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아이가 살아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릴라는 자신의 아이를 찾아 뉴욕으로 향한다. 뮤지션으로서의 삶을 버렸던 루이스 역시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운명적 사랑과 음악에의 열정을 쫓아 뉴욕으로 향하게 되는데... 음악은 이들 세 사람을 하나로 엮어 기적적인 만남을 가능케 할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이 영화가 20년 전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본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 어거스트 러쉬와 비슷한 나이에 이 영화를 봤다면... 지금의 내가 <어거스트 러쉬>를 보고 느꼈던 감정과는 아마 굉장한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굵어지고 마음의 때가 묻은 것이고, 좋게 말하면 객관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나였다면, 이 영화는 내게 엄청난 감동의 메아리로 다가왔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영화로 느껴진다. 대한민국도 그렇고 미국 자국에서도 그렇고, <어거스트 러쉬>는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후한 평가란 일반 대중들의 평가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다분히 과대평가된 영화라는 게, 내 생각이다. 마치 영화가 단세포의 뇌를 가진 다수 관객들을 향해 내건 주술에 다들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형국이랄까.
<어거스트 러쉬>는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여기서 언급한 판타지는 장르적 판타지 보다는 내러티브적 판타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말한 주술이란 의미도 판타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쉽게 얘기하면, 한마디로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만큼 영화 속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지나치게 우연에만 기대는 측면이 강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감독은 영악하게도 그러한 비현실적인 부분을 음악이라는 영화의 중요한 매개체로 흡수시키거나 혹은 덮어버리려는 일종의 술수를 사용한다. 아무리 이 영화를 허구적인 fairy tale이라 감안하더라도 다소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 싶다. <어거스트 러쉬>에는 과도한 감상주의와 낙관주의가 영화 전반에 만연히 흐른다.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동화 혹은 할리우드식 드라마. 낙관주의, 낙천주의, 긍정주의 - 이것들 모두가 미국이란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의식 또는 가치관이라 말할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식 낙관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식 낙관주의는 종교와도 상당한 연관이 있는데, 다분히 청교도적인 가치관에 근거한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근엄함, 성실, 노동의 신성함, 근면, 독립정신, 가족의 중요성 강조, 선민사상 등등의 보수적인 가치들이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주된 요소들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만큼이나 해롭다. 작금의 미국을 보라. 과도한 낙관주의가 부른 병폐가 현재 미국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적 메타포(metaphor)로 풀이하자면, 흔히들 자아결핍이 문제라고 하는데 자아비대증 이야말로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증상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정치적으로 복기해서,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몸살은 그들이 가진 선민사상이나 우월의식이 빚어낸 참극(?)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르시시즘에 취해 상대 나라가 자기들 입맛에 안 맞으면 막 삿대질하며 욕을 하고 때론 물리적인 폭력과 강제적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 반대로 입에 착 달라붙으면 강력한 동맹이라며 두 팔 벌려 격한(?) 포옹도 아끼지 않는다. 스탁데일 패러독스 Stockdale Paradox란 말이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것이 개인이든 기업이든 성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대책 없는 낙천주의에 대한 위험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낙관주의를 경계하라는 경고성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현실주의가 그에 대한 적합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현실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영화의 비현실성은 프레디 하이모어가 연기한 어거스트 러쉬라는 캐릭터에서도 드러난다. 도무지 요즘 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티 없이 맑고 착하기만 하다. 솔직히 내가 이 아이 입장이라면, 나를 버린 부모에 대해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아무리 혈육이고 친부모라 해도 말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원망이 더 클 것 같은데도, 영화 속 주인공 어거스트 러쉬는 도리어 부모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바다 같은 넓은 마음씨를 지녔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자신을 버린) 부모를 만나러 여정길에 오른다. 어거스트 러쉬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도 부모를 원망의 대상이 아닌 그저 자신들에게 언젠가 내리쬘 한줄기 빛으로 여기며 기다린다. <어거스트 러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음지는 없고 양지만 있는 영화. 모범된 길로만 계속 가는 따분한 영화.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위저드'를 제외하고는, 온통 선한 인물들로 가득한 그야말로 착한 영화. 마치 솜사탕을 두 시간 동안 물고 있는 듯한, 그래서 금방 질리는 영화. 지나치게 달콤한 음식은 이빨을 썩게 만들 뿐 아니라, 심하면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당뇨병을 동반하기도 한다.
재밌는 건, <어거스트 러쉬>의 감독 커스틴 셰리든이 아일랜드 영화의 명장 짐 셰리든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드라마 연출에 강한 아버지의 영향 덕분인지 딸도 장르적으로는 드라마에 천착하는 듯하다. 그런데 아버지를 넘어서려면 내공부터 차근차근 더 쌓아야할 것 같다. 전체적으로 평이한 드라마와 음악의 다소 과도한 사용 그리고 장르에 부합되지 않는 속도감 있는 연출은 관객에게 지루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간간히 보여지는 스피디하고 동적인 연출은-예를 들면, 어거스트 러쉬가 번잡스런 뉴욕 중심가에 첫발을 내딛는 시퀀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나 스릴러를 보는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는데, 이 영화의 장르가 드라마임을 감안하면 다분히 상충하는 부조화의 느낌이 든다. 아마도 요즘 상업영화의 트렌드에 일정 부분 부합하려는 의도였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다분히 작위적인 요소가 가득한 내러티브와 특색 없는 연출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음악과 간혹 정신 사납게 느껴지는 현란한 촬영은 <어거스트 러쉬>가 비판받을 부분이라 생각된다. 거기다 신파의 감성에 기대려한 부분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감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분히 인위적으로 감동을 전달하려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감동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역시 신파의 힘은 무섭긴 무섭나보다. 충무로의 과잉 신파와는 다르게 그나마 절제된 신파라서 아주 거슬리진 않았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건, 결국 음악이다. <어거스트 러쉬>는 한마디로, 음악의 숭고함을 예찬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음악의 위대함과 특별함을 웅변하는 영화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얼마 전 방송에서 한 말이 있다. 음악이 중요한 건, 역설적이게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음악의 위대함은 무목적성에 있다고 말한다.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곡으로 MTV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불세출의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지만, 기본적으로 여전히 음악은 듣는 예술이다. 강요된 게 없기 때문에.. 여백이 있기 때문에.. 음악은 불완전한 예술이다. 거기에 음악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본래 완전은 불완전을 의미하고, 불완전은 완전을 의미하는 법. 이렇듯 인생은 아이러니 투성이다. 음악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음악을 만만하게 생각한다. 음악은 누구나 쉽게 접하고 들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여타 예술과는 다른, 음악만이 가진 차별화된 장점이 있다. 접근성의 용이. 무목적성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음악은 누구나 재미로 그저 일상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즐기는 수단으로서의 가장 저렴하면서 동시에 고급스런 예술인 것이다. 음악을 통해 슬픔을 달래고 혹은 반대로 슬픔에 젖어들고 때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즉 감정의 찌꺼기를 게워내는 일종의 삶의 활력소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추상적 미의 체험을 들 수 있다. 음악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영역에 있는 것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 감정의 전이이고 느낌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차원에 놓인 예술이다. 영화에서, 음악이 없는 곳 즉 어거스트 러쉬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아원은 음악이 없기에 지옥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음악으로 가득 찬 바깥세상은 천국으로 그려진다.
<어거스트 러쉬>는 기본적으로 음악에 관한 영화이고, 한 소년의 음악적 여정과 동시에 부모를 찾으려고 떠나는 실존적 여정을 따라가는 로드 무비이자 성장영화이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다. 소년은 부모를 만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떻게(How)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법. 현실이라면 다르겠지만 이것은 영화이기에 때문에, 작가와 감독은 어거스트 러쉬와 부모의 만남을 어떻게든 일정기간 유예시켜야만 한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고아원에서 나온 어거스트 러쉬가 어이없게도 명함을 잃어버려 아동복지사도 못 만나고 번잡한 뉴욕 중심가를 쓸데없이 헤맬 필요는 없었다. <어거스트 러쉬>를 단편영화로 만들 수 없었던 커스틴 셰리든은 '아서'와 '위저드'라는 인물을 투입시켜 극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리곤 교회로 줄리아드 학교로 다시 거리로 돌고 돌며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천신만고 끝에 어거스트 러쉬는 부모를 만난다. 근데 조금은 허무하고 야속하게도, 감독은 어거스트 러쉬가 부모를 만나는 장면에서 바로 영화를 끝내버린다. 하긴 더 해봤자 사족이 될 뿐이지 뭐. 목적달성 했음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나.
사실 극중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나쁜 캐릭터로 그려지긴 했지만, 그의 탁월한 연기 때문인지 오히려 난 '위저드'란 인물에게서 연민이 느껴졌다. 버림받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구속하고 착취하는 그이지만 자식을 맘대로 버린 부모보다 나쁘다고 쉽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그래도 그는 그들에게 잠잘 곳은 마련해준다. 비록 허름하긴 해도.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진 않지만, 위저드 역시 그들처럼 부모에게 버려진 아픈 과거를 간직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영화 후반부에, 부모를 찾으려는 몸부림으로 길거리 연주를 멈추지 않던 어거스트 러쉬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며 절규 어리게 내뱉는 위저드의 대사에서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애칭이긴 하지만, '위저드'란 이름은 영화의 주제와도 일견 맥이 닿아있다고 보여진다. 음악이 곧 마술이고 마법이다 는 의미로 해석된다. 문제는 작위적인 내러티브를 정당화 혹은 무마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도로서 영화의 고귀한 주제를 악용한 부분이 느껴진다는데 있다. 캐릭터와 내러티브적 측면에서도, '위저드'는 버려진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그들로 하여금 철저히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만들고 이것은 그대로 내러티브에 적용된다. 그가 아이들에게 부린 마법은,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음악이라는 본질적 마법과 동시에 삶의 터전 제공이라는 실존적 마법이다. 위저드는 공간적으로 폐쇄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철저히 권력자(위저드)에 의해 통제된 세계이고 권력자는 자신의 단면적인 우주를 그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세뇌시킬 뿐이다. 아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강당 같은 곳이고, 더 나아가 봤자 음악 공연을 위한 광장이나 지저분한 길거리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제한된 행동반경 안에 머물러 있다. 결론적으로, 아이들은 물리적인 공간에서나 의식적인 공간에서나 모두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위저드가 어거스트 러쉬를 돈 벌기 위한 일종의 생산수단으로서만 이용한 건 아니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여느 아이들에게 했던 착취의 행동도 어거스트 러쉬에게 만큼은 예외였다. 물론 처음엔 위저드도 어거스트 러쉬를 착취의 대상으로 봤겠지만,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그의 남다른 음악적 재능과 특별함 그리고 티 없이 맑은 순수함을 알아채면서 단지 생산적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를 대하게 된다. 비록 그를 줄리아드 학교에 입학시킬만한 능력도 못 되는 그저 한낱 길거리의 미치광이(lunatic) 매니저에 불과하지만, 위저드라고 왜 욕심이 없었겠나. 어거스트 러쉬를 데리고 있는 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는 듯한 외부의 환경은, 그로 하여금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날개가 꺾인 어거스트 러쉬에게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날개를 달아줘 스타로 만들어야겠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오고 더 서두르게 만든다. 그래서 이름을 러쉬(rush)라고 지었나보다. 위저드가 어거스트 러쉬를 대하는 태도는 단순히 기획사 사장의 마인드가 아니라 인간적인 애정과 더불어 일종의 대체 부모로서 자식에 대해 갖는 보호본능에 가깝다. 문제는 그것이 과잉보호라는 데 있을 뿐.
사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초반부는 약간 지루하고 몰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순간 몰입이 되기 시작했던 부분이, 극중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영화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어거스트 러쉬를 연기한 프레디 하이모어와 그의 부모를 연기한 케리 러슬 그리고 조너선 라이즈 마이어즈 이기에 그들의 연기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데도, 내가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로빈 윌리엄스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로빈 윌리엄스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감칠맛 나게 연기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거스트 러쉬>에 그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영화가 지금보다 더 밋밋하고 심심했을 거라 생각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썸니아'와 '스토커'로 이어지며 기존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악역 캐릭터를 맡으며 변신을 시도하더니 <어거스트 러쉬>에서 정점을 찍는 듯하다. 타이틀 롤을 맡은 프레디 하이모어는 '네버랜드를 찾아서'로 처음 봤을 때, 이미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직감했었다. 초롱초롱 맑게 빛나는 총명한 눈빛부터 조용조용 속삭이는 듯한 말투까지 어느 것 하나 비범해 보이지 않는 게 없다. 이토록 비범한 아이를 눈도장 찍은 사람이 나뿐만 아니었는데,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 같이 공연한 대배우 자니 뎁은 한눈에 이 아이를 알아보고 그의 다음 작품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찰리 역할로 프레디 하이모어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특히 할리우드가 그런 경향이 강한데, 가끔 아역배우가 성인배우를 능가하는 연기력과 혜안을 가진 경우를 보게 된다. '아이 엠 샘'의 다코타 패닝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지금은 육체적으로 많이 성장했지만, 당시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80세 노파가 그녀 안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어거스트 러쉬>의 프레디 하이모어도 극중에서 열한 살 혹은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성숙한 인간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나잇값 못하는 어르신들을 반성케 하는 계몽적인 캐릭터다. 테렌스 하워드는 '허슬 앤 플로우'에 출연해 생애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로 자신의 이름을 올린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되는데, 그것은 물밀듯 밀려와 그의 집 한 켠에 쌓이는 스크립트(script)들로 형상화된다. <어거스트 러쉬>도 수북이 쌓여있던 스크립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테렌스 하워드는 흑인배우 특유의 영적인(spiritual) 연기를 패턴으로 가진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떨리는 듯한 음성의 대사처리는 묘한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인상적이다.
이러한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도 다소 튼실하지 못한 내러티브를 커버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내게 <어거스트 러쉬>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어거스트 러쉬란 이름도 평범한 이름은 아니다. 푸른 잎이 가득한 싱그럽고 찬란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나 음악계에 돌풍을 일으켜라.. 위엄있게 돌진하라.. 는 의미로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사람(대중)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주며 존경과 구애를 한 몸에 받으라는 위저드의 개인적인 소망이 투영된 작명이 아닐까 싶다. 정확히 말하면, 작명이 아니라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단어를 그저 순간적으로 캐치(catch)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이름이다.
영화 초반, 아직 바깥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곧 경험 직전에 놓여있는 어거스트 러쉬에게 아동복지사 제프리즈는 창문 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단다. 그렇다. 여기서 온갖 소리들이란 말에 주목해야한다. 세상엔 좋은 소리도 있지만 나쁜 소리도 있다. 아니 오히려 더 많다고 느껴진다. 날마다 들려오는 비극적인 뉴스들.. 시도 때도 없이 위층에서 들려오는 층간소음.. 누구랄 것도 없이 남 탓만 하는 개소리들.. 외롭고 서러워서 울부짖는 절규의 음성들.. 배고픔에 굶주려 아우성대는 목소리들.. 약자에게 감히 무한 폭력을 행사하며 온갖 막말과 저주를 퍼부으며 버젓이 인격살인을 저지르는 개버러지쓰레기들의 극악무도한 행태들.. 병마와 싸우며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는 아픈 영혼들의 신음소리들.. 그 속에서 과연 좋은 소리가 존재할 수나 있을까. 그런 악취가 나고 구역질나는 시궁창 속에서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마음의 귀를 조금이라도 열어 보일 사람이 있겠느냔 말이다. 설사 좋은 소리가 그 속에서 존재한다하더라도 더럽고 추악한 소리들에 무참히 덮여 버려 금세 묻히고 말 것이다.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시종일관 관객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적인 결말로 영화는 끝이 났지만, 정작 나는 이 영화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다. 그런 거짓으로 점철된 피상적인 희망은 마치 독약과도 같다. 잠시나마 달콤한 잠에 빠지게 할 순 있지만 깨어보면 지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달콤한 잠은커녕 마치 선잠을 잔 듯 개운치 않았다. 그래도 남들보다 허탈감은 덜했겠지. 달콤한 백일몽이 아니라 지독한 아이러니 투성이의 잔인한 현실을 일깨우고 직면하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이고, 또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인 질문.. 당신은 아직도 판타지를 믿는가? 그럼 어서 꿈이나 깨.
사족인데, <어거스트 러쉬>에 구혜선과 타블로가 엑스트라로 잠깐 출연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유심히 찾아봤다. 간신히 두 사람 모두 발견하긴 했는데, 대체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선 탑 스타인 두 사람이 굳이 미국에까지 가서 겨우 몇 초 정도 그것도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을 촬영하려고 그런 수고를 했다는 게 의아하게만 느껴져서다. 본인들은 하나의 좋은 경험이었다고 짤막한 소회를 밝히긴 했지만 글쎄..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도 구혜선은 타블로보다는 미세한 차이지만 분량이 조금 더 많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놓치게 될 테니, 유의(?)해야 한다.
★★★
감수성 풍부한 부모의 우월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 받았으니, 어거스트 러쉬가 음악 신동으로 불리며 돌풍(rush)을 일으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영화 전체로 봤을 때,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현실과의 괴리는 지울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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