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Identity

찰나21 2011. 1. 12. 20:22

 

 
 
 아이덴티티 (2003/미국)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존 큐잭, 레이 리오타, 어맨다 피트, 존 혹스, 알프레드 몰리나,
       클리어 두발, 존 C. 맥긴리, 윌리엄 리 스캇, 제이크 뷰지,
       프루잇 테일러 빈스, 레베카 드모네이


줄거리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밤, 네바다 주의 사막에 위치한 외딴 모텔에 10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리무진 운전사와 그가 태우고 가던 여배우, 다정다감한 부부와 그들의 아들 '티미', 경찰과 그가 호송하던 살인범, 라스베이거스 매춘부와 신혼부부 거기다 신경질적인 모텔 주인까지 포함한 총 11명. 사나운 폭풍우로 길은 사방이 막혀버리고 사람들은 어둠과 폭우가 걷히기를 기다리지만 연락이 두절된 호텔에 갇힌 이들은 하나 둘씩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죽음으로 시작된 살인의 그림자는 그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간다. 현장에 남겨진 것이라곤 모텔 룸 넘버 10이 적힌 열쇠뿐. 연이은 죽음의 현장에는 9,8,7..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열쇠만이 남아 끝나지 않은 살인을 예고하는데... 과연 범인은 누굴까? 아니면 이 모든 게 그저 유령들의 저주 때문일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내가 계단을 올라갔을 때 난 거기에 없었던 남자를 만났다. 그는 오늘도 거기에 없었다. 난 그가 사라졌길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에서 총 세 번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각각의 대사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엔 '말콤 리버스'의 음성으로, 두 번째에는 '에드'의 음성으로, 마지막엔 '티미'의 음성으로 흘러나온다. 결국 최종적으로 이 음성은 모두 말콤 리버스의 음성이다. 독백처럼 들리는 이 대사는 그가 어렸을 때 쓴 시다. 사실 이 대사는 영화의 핵심과 주제를 나타내는 대사다. 영화에 총 세 번 등장하고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대사다. 영화를 그냥 보는 사람에겐 무심코 스쳐지나가기 쉬운 대사지만 감독은 이 대사를 통해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미 관객에게 결말에 대한 힌트 혹은 암시를 던져주는 셈이다. 그러나 이 대사가 힌트라는 사실을 눈치 챌 관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설령 힌트나 암시임을 눈치 챈 다해도 이 대사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인식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의미를 깨닫게 된다. 곧이어 한 남자가(한눈에 정신과 의사임을 눈치 채기 비교적 쉬운) 녹음테이프를 계속 돌리면서 단서를 찾기 위해 몰두해있다. 그러더니 공간이 갑자기 점프해서 관객을 허름한 모텔로 옮겨놓는다. 비가 폭포수처럼 내리고 외딴 곳의 허름한 모텔이 보인다. 벌써 초장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떨 것임을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질 것임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초반부가 굉장히 흥미로운데, 앞 장면에서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바로 뒤 장면에서 원인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냥 순차적으로 보여줬어도 큰 무리는 없었겠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순서를 뒤집는 편집과 '프리즈 프레임' 기법을 적절히 사용한 덕분에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사실 이 부분만 놓고 봤을 땐, '메멘토'가 떠올랐다. 물론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게 느껴졌다. '메멘토' 같은 경우엔, 영화에서 이러한 부분이 전체적으로 사용된 반면에 <아이덴티티>에선, 부분적으로 사용됐다는 점이 다르다. 덕분에 초반부터 영화에 크게 몰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편집은 '메멘토'에서 영향 받은 게 분명하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모텔에는 총 열 명이 묵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명씩 죽음을 맞이한다. 모두가 핏대를 올리며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말이 없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티미'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들 중에서 유일한 꼬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미스터리를 품은 듯한 묘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인물이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인물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의심을 해봄직하지만 그 조그만한 아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자행할 것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특이할만한 사실은, 죽은 사람에게는 꼭 방 열쇠가 남겨져있다. 이것도 일종의 이 영화만의 발명품이다. 근데 중요한 사실은, 그 방 열쇠에 새겨진 숫자는 죽은 사람이 묵은 룸 넘버가 아니라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다. 한명씩 차례로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근데 영화를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조그만한 어린 아이가 덩치 큰 어른들을 상대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심지어 그 짧은 시간에 시체들을 모조리 깨끗이 치운다는 게 말이 되냐는 얘기다. 그러기엔 육체적으로 힘이 너무 약하잖아. 물론 실제 상황이 아닌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모텔에서 행하는 그 상황만 놓고 볼 때는 조금은 무리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이 영화에서 인물이 하나씩 죽는 건 실재하는 인물이 죽는 게 아니라 말콤 리버스의 뇌를 관장하는 열 한 개의 인격들(티미까지 포함하여) 중에서 각각의 인격이 하나씩 죽는 걸 의미한다.

 

'Identity'는 '정체성'이란 뜻이다. 굉장히 중요한 단어다. 특히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정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프로이트'와는 달리 '에릭슨'이라는 사람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든 친구관계나 사회관계는 모래성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체성을 확립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같이 사회성이 요구되는 시대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꼭 누군가의 이론이 반드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에릭슨의 이런 주장에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무심코 흘려들을 수는 없는 말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다중인격은 보통 유년 시절에 학대받고 상처받았던 아픈 기억이 만들어낸 정신질환이다. 전문적인 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보통 다중인격으로 만들어지는 인격은 환자 자신이 결핍되어 있는 부분을 메꾸기 위해 그러니까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인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던 이상향의 인격을 만드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직면하기 힘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회피하기 위해 왜곡된 자아를 만들기도 한다. 영화에서 예를 들면, 창녀인 '패리스'는 그의 엄마로부터 나온 인격이다. 그의 엄마는 범죄자이자 창녀였다. '조지'와 '앨리스' 부부는 그가 원하던 부모상으로 탄생한 인격이다. 이렇듯 각각의 인격은 모두 다 나름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연으로 만들어졌다.

 

엔딩에 다다르면, 이제 말콤 리버스의 못된 인격들이 다 사라지고 '패리스'라는 선한 인격만 남아 깨끗이 치유가 되었다고 안심하던 찰나, 교묘히 숨어있던 사악하고 간교한 인격 '티미'가 발현된다. 결국 '맬릭' 박사는 죽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선한 인격 패리스도 죽는다. 이제 악마의 인격 티미가 말콤의 의식과 몸을 완전히 점령해버린다. 결국 말콤은 끝내 치유되지 못했다. 관객과 맬릭 박사 모두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킬러는 '에드'가 아니라 티미였다. 모두가 티미를 간과했다. 비극적인 엔딩이다. 모든 정신분열증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다중인격은 치유되기가 정말 힘들다. 본인 스스로가 인지하기도 힘들뿐더러 설사 인지한다해도 제어하기 힘들다. '다중인격'이란 소재는 이미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서 다뤄진바 있다. 그러나 <아이덴티티>만큼 확실하게 다뤄지진 않았다. 이 영화에선 실제로 다중인격 환자가 등장하니까. 반전만 놓고 봤을때는, 다른 미스터리 영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

 

사실 감독의 연출도 훌륭하지만 작가의 발상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 구성도 짜임새 있고 보고 나면 여운이 약간 남는다. 퍼즐을 짜 맞추는 듯한 재미가 있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머리가 아프다. 이제는 머리가 나쁘면 영화도 못 본다. 7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머리가 멍했던 기억이 있다. '디 아더스'와 비교하자면, 반전은 '디 아더스'보다 훨씬 더 강력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나 주제의식은 <아이덴티티>가 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런타임이 좀 짧다고 느껴진다. 결말이 다소 성급하게 맺어진다는 느낌을 약간은 들도록 만든다.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훌륭하다. 누구 하나 나무랄 데가 전혀 없다. 각각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그에게 정말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

말콤 리버스가 그의 인격들에게 동일한 생일날짜와 지명 이름으로 각각의 이름을 붙인 부분에선, '유주얼 서스펙트'가 연상된다. 그리고 초반에 앞 장면에서 결과를 보여주고 뒤 장면에서 원인을 보여주는 부분은 '메멘토'가 연상된다. 반전만 놓고보면 어떤 영화보다도 강력하나 전체적인 완성도나 주제의식은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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