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 (1999/미국,독일)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감독 데이비드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험 카터, 미트 로프, 제어드 리토 |
줄거리
자동차 회사의 리콜 심사관으로 일하는 내레이터는 고급가구로 집안을 치장하는데 몰두하지만 일상의 공허함 속에서 늘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그는 출장행 비행기 안에서 '타일러 더든'이라는 독특한 친구를 만난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고급 아파트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타일러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한다. 이때부터 그는 공장지대의 버려진 건물에서 타일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와 타일러가 재미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서서히 그들에게 몰려들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파이트 클럽'이라는 조직이 생기기에 이른다. 물론 '파이트 클럽'의 리더는 타일러다. 타일러에 점점 매혹되던 그는 어느 순간, 타일러의 도가 넘는 행동에 점점 신물이 나기 시작한다. 차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다가 다음 날, 의식에서 깨어난 그는 타일러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알게 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9년 전이었다. 당시 나에게 이 영화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헌데 다시 이 영화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 때만큼 재밌지도 좋지도 않다. 전엔 이 영화가 폭력적이지만 너무나 매력 있고 인물들의 행동들도 그렇게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나름 감정이입을 하며 보았는데 다시 보니 거부감도 심하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그럼 내가 그 당시 과대평가를 했던 것인가. 그때 당시엔 좋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과대평가가 맞다.
우선 감독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지금 한참 '소셜 네트워크'란 영화로 상복이 터진 데이비드 핀처가 <파이트 클럽>의 감독이다. 그는 비주얼에 굉장히 능한 감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에이리언 3'라는 저주받은 데뷔작을 내놓기 전, 그는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다. 그 때,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쌓은 비주얼에 대한 노하우가 아마 그의 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실 할리우드에는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상당히 많다. 미셸 곤드리, 마크 로마넥, 스파이크 존즈, 마이클 베이 등등. 이들 감독은 모두 영화판으로 와서도 성공을 거뒀다. 우리가 흔히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은 비주얼에 능하지만 스토리텔링에는 약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감독들은 그런 고정관념을 손쉽게 불식시키며 비주얼과 스토리텔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비주얼과 스토리텔링은 분리된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서로 붙어있는 한 몸인 것이다. 예컨대,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연출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 또 한가지, 대개 좋은 영화는 연출뿐만 아니라 연기나 촬영 등등 모든 부분에서 훌륭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어느 한 부분을 잘하는 사람은 다른 부분에서도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파이트 클럽>도 비주얼이 상당하다. 전체적으로 어둡다. 영화의 주제도 어둡고 밤 장면이 많다 보니 더 어둡게 느껴진다. 영화의 주인공 '타일러 더든'이 사는 집은 폐가라 불릴만하다. 물을 틀면 구정물이 나오고 위층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층에서는 쿵쿵 소리가 나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마치 더럽고 악취 나는 창고 같다. 집 주위는 또 어떤가. 공장과 술집 주변은 전부 콘크리트 바닥에 나무 한그루 없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공간 같다. 마치 '8 마일'의 디트로이트가 연상된다. 그곳에서 내레이터(에드워드 노튼)와 타일러 더든은 싸움(fight)을 벌인다. 그리하여 '파이트 클럽'이라는 조직이 생기고 그들만의 세상이 지하세계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와 파이트 클럽을 오가는 내레이터의 이중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레이터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 초반에 언급되듯이 정신질환자다. 영화를 보면, 초반에 이상한 부분을 아마 몇 군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레이터가 사물을 응시할 때, 뭔가가 번쩍하면서 등장했다 사라진다. 혹자는 이걸 보고 필름이 뭔가 잘못된 거 아냐 혹은 테이프나 CD가 잘못된 거 아냐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다분히 의도된 연출이다. 내레이터가 마치 환시처럼 착시현상을 가끔 경험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연출인 것이다.
그는 물질 문명이 낳은 소외된 인간이다. 가구 수집에 중독되어 있고 일회용 물건들에 익숙해져있다. 회사에선 직장 상사에게 스트레스 받기 일쑤다. 그런 그가 답답하고 지옥 같은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그런 그가 만들어낸 인물이 '타일러 더든'이다. 타일러 더든은 그가 갖지 못한 강함, 터프함, 정력, 자유로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타일러 더든이 되어 파이트 클럽을 만들고 모든 테러 행위들을 진두지휘한다. 나중에서야 타일러 더든이 타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또 다른 자아임을 알게 되는게 이 영화의 반전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반전이 그렇게 중요치 않다. 한국 관객들이 가진 문제 중의 하나가 반전집착증이다. 이것은 고질병이다. 물론 타일러 더든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부분이긴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파이트 클럽>이 제작된 시기가 1999년도다. 20세기를 마감하고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그 경계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실제로 영화에선 세기말의 징후와 불안이 인물들과 상황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타일러 더든이 클럽 멤버들에게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우리는 2차 대전이나 공황은 겪지 않았지만 대신에 정신적인(spiritual) 공황에 고통 받고 있다."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에 동기부여가 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교회에 가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대신 지하세계에서 온몸으로 두들겨 패고 맞고 피와 신음을 토해내면서 구원을 얻는다. 맞고 때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답답하고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동시에 관객에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나도 한번 저렇게 피터지게 싸워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사도마조히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점점 더 강해지고 거침없는 사람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상을 파멸시키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 물질 문명에 대한 혐오와 화이트칼라에 대한 경멸 그리고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무정부주의자적인 태도로 테러를 자행한다. 내 눈엔 그저 무모하고 어리석게 보일뿐이다. 그들의 가치관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일정 부분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옳은 생각이라 하더라도 방법에 있어서 무차별적인 테러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화이트칼라에 대한 혐오 내지 경멸은 그들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것일뿐이다. 왜 꼭 기성세대나 사회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가. 가령, 음악이나 영화, 소설 혹은 정치참여와 같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서도 충분히 저항이 가능한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공황에 허덕인다는 타일러의 말은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질적인 결핍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이것은 아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에겐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울증은 이미 보편적인 정신질환이 된지 오래다. 그건 마치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감기와 비슷하다. 그 외에도 조울증이나 공황장애, 환청과 환시와 같은 매우 심한 증상까지 다양하다.
그는 자아가 분열된 인물이다. 그는 너무도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과 염증이 느껴지는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타일러 더든 이란 인물을 창조해내지만 타일러가 점점 그를 잠식해 들어오고 위험한 일들을 계속 벌이자 위기감을 느낀다. 그래서 타일러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타일러에게 총을 겨누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타일러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로소 눈을 뜬 그는 그 자신에게 총을 겨눈다. 그제야 타일러 라는 자아는 사라진다. 그는 그전까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늘 외부로 향해 있었다. 그가 비로소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현실을 자각하고 본래의 하나의 자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말라'와의 관계도 회복된다. 비록 폭탄으로 도배된 고층건물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밖엔 없었지만. 바로 이 영화의 엔딩이다. '픽시즈'의 'Where is my mind?'가 흐르면서 마무리되는 이 장면은 영화사상 최고의 엔딩 중의 하나로 꼽힐만하다. 두 시간이 넘는 긴 런타임에 후반부로 가면서 느껴졌던 지루함이 길이 남을 엔딩 장면 하나 때문에 만회가 된다.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 헬레나 본험 카터- 이 세 배우의 연기는 환상의 조합과도 같다. 다만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는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는 왜 늘 비정상적인 캐릭터들만 연기하는지. 브래드 피트는 야성적이고 터프한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에드워드 노튼의 손등에 잿물을 뿌릴 때의 그 섬뜩함이란. 헬레나 본험 카터는 앞서 언급한 카리스마 있는 두 배우에게 묻힐 만도 한데 전혀 묻히지 않고 그녀만의 존재감을 확실히 지켜나간다. 이게 바로 영국배우의 힘인가.
사실 굉장히 폭력적이고 센 영화다. 단순히 싸우는(fight) 장면때문만이 아니라 주제가 무겁고 그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무섭다. 사실 리얼리티는 떨어진다.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에선 도저히 일어나기 힘든 일이니까. 그래서인지 감독은 내레이터의 입을 빌어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건 영화다 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환기시킨다. 타일러 더든 뿐만 아니라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다들 심각한 정신병자들이다. 데이비드 핀처는 확실히 관객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드는데 선수다. 보면서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분명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극악무도한 행동이니까. 어떻게 보면, 그들은 원시인이다. 원초적인 에너지와 희열을 추구하며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깨지더라도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혀 본질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느껴지니까.
★★★
독특함은 인정한다. 그러나 거북하다.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괜찮은데 테러를 자행하는 장면들은 상식적으로 용납이 안된다. 긴 런타임과 더불어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한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엔딩만큼은 황홀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멋지다. 물론 그들만의 이기적인 엔딩이긴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