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괜찮은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선 배우들의 연기가 무엇보다 돋보인다. 주인공을 맡은 솔 윌리엄스는 이름 없는 배우지만 매우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연기를 펼쳐 보인다. 특히 그의 신음을 토하는 랩과 시는 인상적이며 정서적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말도 멋있지만 그 속에 울분이 담겨있어 진심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많이 갔다. 특별히 '로렌'을 연기한 소냐 손을 언급하고 싶다. 성(last name)으로 보나 얼굴빛으로 보나 한국인 피가 섞인 게 분명한 듯싶은 이 배우는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난 그녀의 연기를 영적인(spiritual)연기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남자배우인 솔 윌리엄스보다 몇 배는 더 강하게 느껴지는 폭발하듯 내지르는 연기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아마도 여자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세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시를 좋아하고 가슴에 한이 맺힌 인물이다. 레이(솔 윌리엄스)나 로렌 두 사람은 그런 면에선 너무 닮아 있다. 시 낭송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파워풀한 낭독과 골목에서 둘이 싸우는 모습은 마치 호랑이 두 마리가 포효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들이기도 하다. <슬램>은 그 당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영화다.
여기서 선댄스 영화제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자.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모두 독립영화(independent film)다. 우리가 흔히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만나는 미국영화들은 독립영화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대형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든 할리우드 상업영화들인 것이다. 간혹 가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가 극장에 걸리곤 하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선댄스 영화제가 시작되면, 보통 손에 꼽힐 만한 몇 개의 메이저 스튜디오(20세기 폭스, 소니 픽쳐스, 뉴 라인 시네마, 파라마운트 etc.)의 관계자들이 와서 영화들을 보고 배급을 결정한다. 그래서 수익이 되겠다 싶은 괜찮은 영화가 눈에 보이면 치열한 경쟁 끝에 배급권을 따내 자사의 산하 인디영화 배급라인으로 영화를 제공(present)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20세기 폭스는 폭스 서치라이트, 소니 픽쳐스는 소니 클래식, 뉴 라인 시네마는 파인라인 피쳐스- 이런 식으로 각각의 인디영화 배급라인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다. 참고로 파라마운트는 파라마운트 밴티지, 워너 브러더스는 워너 인디펜던트, 유니버설은 포커스 피쳐스 라는 각각의 인디 배급라인이 있지만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배급하는지는 확실치 않아서 여기서는 제외시켰다. 그래서 이런 배급라인 때문에 아무리 독립영화다 하더라도 보다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들보단 못하지만 말이다. 결국에 이런 혜택은 관객에게 돌아간다. 반면에 대형 메이저 스튜디오의 선택을 못 받은 독립영화들은 대부분 대도시(뉴욕, LA)에서만 한정 상영으로 일부의 소수 관객들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슬램>도 아마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 영화의 차이점은, 일단 자본의 규모가 다르다. 독립영화는 쉽게 얘기해서 저예산 영화다. 다만 메인스트림 영화가 갖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창의성이다. 메인스트림 영화는 아무래도 거대 자본이 들어가기에 스튜디오의 간섭과 통제를 받게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고만고만한 영화가 나오는 것이다. 흔히들 할리우드 영화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독립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제약을 덜 받다보니 대중성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독창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그래서 메인스트림 영화에는 없는 신선함을 주무기로 한다. 독립영화에는 흔히 얘기하는 '인디펜던트 정신'이 들어가있다. 내러티브는 좀 빈약할 수 있으나 그 여백을 채우는 풍성한 힘이 미국 독립영화에서는 많이 느껴진다. 과장되지 않으며 인위적이지 않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독립영화에서는 소외된 인물들을 주로 등장시켜 그들에 대한 가감 없는 시선을 보여준다. 대책 없이 그들을 동정하지도 않고 쉽게 결말을 내리지도 않는다. 촬영이나 영상은 좀 더 과감하고 투박한 게 특징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독립영화도 많지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작은 규모에 걸맞게 사소한 일상을 따라가는 소박함 그리고 따뜻한 정서가 녹아들어 있는게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슬램> 역시 독립영화다. 사실 미국 독립영화는 유럽의 예술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유럽의 아트하우스 영화처럼 난해하고 철학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쉽고 재밌다. 그러나 여기에서 쉽다는 의미는 결코 '가볍다'는 의미가 아니다. 곁가지를 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죽 달려나가는 심플함을 말한다. 이런 말이 있다. '대가 일수록 작품은 심플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때론 독립영화가 거대 자본이 들어간 메인스트림 영화를 넘어서는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흥행적으로나 작품성 면에서나. 결국 선댄스의 독립영화들도 엄연히 미국영화이고 그 자장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대중성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선댄스는 훌륭한 감독을 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너무도 영향력이 커져버린 크리스토퍼 놀런이나 브라이언 싱어, 대런 애러노프스키, 케빈 스미스 등등- 이 모든 감독들이 선댄스의 산물이다.
<슬램>의 감독 마크 레빈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감독답게 굉장히 사실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나름 스타일리쉬한 영상과 가슴을 쿵쿵 때리는 힙합 음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영상은 거칠고 건조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영화는 흑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들의 비루한 삶을 보여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마튼 루서 킹의 연설도 흑인들을 구원하진 못했다. 마튼 루서 킹이 죽고 나서도 흑인들에 대한 대우나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다보면,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도 통용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미국에서 흑인에겐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했다. 농구를 해서 성공하거나 마약하면서 길거리에서 총 맞아 죽거나. 사실 나라도 그런 환경에 있다면 감옥에 가지 않을까 싶다. 주위 환경은 혼자의 힘으론 바꿀 수 없는 거니까. 결국 환경에 지배당하게 되어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숨 쉴 수 없이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여있고 거리는 삼엄하며 골목에 늘어서있는 집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공간. 저런데서 어떻게 살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지만 정작 그런 공간에 놓여있는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교도소 시퀀스가 나오지만 이 영화는 '쇼생크 탈출'이 아니다. 레이는 친구 덕분에 너무 쉽게 교도소에서 나온다. <슬램>은 레이의 교도소 내에서의 생활과 교도소에서 출감된 후의 일들이 영화에 주된 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비폭력주의자의 모습은 멋지다. 특히 교도소에서 어느 갱단에도 속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그가 보여주는 랩은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처음엔 그가 작정하고 내뱉는 말이 시인지 랩인지 헷갈렷다. 근데 시나 랩이나 한끝 차인데 무슨 상관이랴. 시에다 운율을 싣고 빠른 비트로 토해내면 그게 랩으로 발전되는 거니까. 레이에겐 시와 랩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이다. 그런 그에게 로렌은 또 하나의 탈출구이자 희망이 된다. 흑인은 많은 음악 장르를 탄생시켰다. 소울이나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힙합. 그것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영혼과 울분이 담긴 장르라는 것이다. 특히 힙합은 흑인들의 말투와 억양에서 배어있는 리듬과 운율을 빨리 말해서 그것이 랩으로 발전한 장르다.
엔딩에 이르러선, 레이가 로렌의 조언대로 다시 감옥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다. 레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감옥에서 살아 나오게 되면 로렌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슬램>은 뭔가 내 마음을 확 사로잡기엔 좀 부족한 영화였으나 내러티브도 괜찮고 연기와 연출, 촬영도 꽤 훌륭한 영화다. 뭔가 정서적 자극은 있었으나 감흥을 주기에는 모자랐다.
화면전환기법으로 페이드인-아웃을 많이 사용했는데,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여담인데, 영화에서 욕설을 하고 발광하면서 인상적인 등장을 보여주는 중국계 미국인 '지미 후앙'은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만다. 일종의 '인물의 맥거핀'인가. 나는 이 인물이 대단한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으로 나와서 좀 의외였다.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은 없다.


흑인들의 비루한 삶을 사실적으로 포착해낸 영화. 솔 윌리엄스와 소냐 손은 격정적인 연기를 펼친다.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지만 마음을 확 잡아당길만큼의 여운과 감흥은 느껴지지 않아 좀 아쉽다. 음악이 좋다. |
'영화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Girl, Interrupted (0) | 2010.08.06 |
---|---|
Flawless (0) | 2010.08.02 |
Changing Lanes (0) | 2010.07.27 |
Catch Me If You Can (0) | 2010.07.20 |
집으로... (0) | 2010.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