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많이 보다보면 본인에게 특별한 영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조금은 특별한 영화다.
<처음 만나는 자유>. 다소 원제의 의미와는 많이 동떨어진 제목으로서 제목이 너무 단순화되어 감상주의적인 타이틀로 변질됐다는 느낌이 앞선다. 원제는 'Girl, Interrupted'로서 한글로 번역하자면, '가로막힌, 뭔가 단절된 소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입된 제목으로 보자면, 닫힌 공간이 연상되고 원제로 보면, 정신질환이 떠오른다. 그렇다. 이 영화는 정신병동에 갇힌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수재나 카이즌. 그녀의 말로는 부모님이 정신병동에 집어넣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본인이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했다고 말하는 게 옳다. 그에 대한 단적인 증거로 상담 장면을 들 수 있다. 수재나가 입원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그녀의 담당의사가 수재나에게 퇴원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녀의 대답 "어차피 집에 가도 마찬가지일텐데요."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포함되어 있다. 수재나가 처음 병동 안을 들어가서 그곳의 환자들을 보고 반응하는 표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듯한 표정. 너무나도 낯선 공간과 그동안 살면서 보지 못했던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살 떨리는 공포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영화는 여자 정신병동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정신병동은 남녀 구분이 엄격하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제목과 달리 이 영화의 키워드는 자유가 아니다. 굳이 키워드를 말하자면, '회복'이다.
우리는 정신병원에 대해서 너무나도 큰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이상한 사람 흔히 말하는 폭탄머리에 침 질질 흘리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도 꽤 있다. 정말 미쳐서 날 뛰는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란 얘기다.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갖게 된 사람들이 꽤 많으며 중증환자 뿐 아니라 경미한 증상의 환자들도 있다는 사실. 문제는 정신적으로 문제도 없는데 다른 이유로 가족 중의 누군가가 강제로 입원시키는 경우도 꽤 있으며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입원은 자유지만 퇴원은 결코 맘대로가 아니라는 사실.
근데 하나 의문점을 제기해보자. 현실에서도 영화처럼 간호사와 보호사들이 천사같을까? 혹시 환자를 대할 때 학대나 인격모독을 스스럼없이 하지 않을까? 인간 취급도 안하면서 말이다. 물론 나라마다 병원마다 차이는 있겠지. 확실히 미국은 자유국가인가보다. 환자들이 환자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
영화에 등장하는 클레이무어 병원은 그 당시 시점으로 봐도 역사가 무지 오래된 병원이다. 이것은 서양의 정신분석학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프로이드는 이제 정신분석학에서는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렸다. 그에 반해 한국은 정신분석학의 역사가 짧다. 기껏해야 1990년대부터 비로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문명 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람들 간의 정이 각박해지고 소외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이슈화가 된 것이다. 물질과잉의 시대는 정신공황을 가져온다. 이미 미국은 1960년대에 그러니까 우리보단 3,40년 전에 그 시대를 겪은 것이다. 1960년대에 미국은 경제적으론 너무나 풍요로운 사회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혼돈의 시대였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히피가 창궐했으며 사회는 급속도로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그토록 추구하던 가치가 진정 무엇이었느냐?하는 물음과 함께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으로 결핍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재나 처럼. 그러나 발레리의 말처럼 수재나는 미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친 척을 하는 것뿐이다. 자신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게으름뱅이이자 비관주의자. 그녀는 만족을 몰랐고 늘 뭔가를 갈구했다. 어린 나이에 걸맞게 치기와 반항으로 똘똘 뭉친 수재나는 리사를 보면서 그녀를 동경하기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병원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고 택시기사의 조언과는 반대로 소위 말해 병원에 맛을 들인다. 그러나 그녀의 리사에 대한 갈망도 그리 오래가지 않아 꺾인다. 그녀는 리사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다. 리사가 얼마나 무지막지하고 위험한 인물인지를. 이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은 스키터 데이비스의 'the end of the world'가 흐르는 가운데 수재나가 목매단 데이지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영원히 잊혀지기 힘든 장면이고. 그러나 여기서도 리사는 한 치의 감정의 동요 없이 태연하게 데이지의 돈을 훔친다. 이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 리사는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수재나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며 죄책감에 울분을 토해낸다. 타인의 죽음, 그것도 자신과 가깝진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병원생활을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후, 그녀는 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죽음을 동경하지 않게 되었고 각성(awakening)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퇴원을 눈앞에 두고, 독설만 내뿜던 리사의 심장에 화살을 꽂아 리사를 각성시킨다. 난생 처음, 주위사람으로부터 직설적인 충고를 들은 리사는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리사도 그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수재나는 입원한지 근 1년 만에 드디어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또 다른 시작. 수재나에게 있어 클레이무어는 종착지가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바깥세상의 빛이 그녀에게 닿지만 세상이라고 그녀에게 늘 햇빛만 비추는건 아니다. 그늘도 있고 때론 시커먼 먹구름이 끼며 천둥번개도 친다. 그때마다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면 지금의 삶에 감사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자유>는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 영화다. 특별히 이 영화가 재밌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양한 캐릭터들 때문이다. 정신병원에서의 개성있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극의 입체감을 더한다. 주연배우인 위노나 라이더는 여린 성격의 수재나를 매우 감성적으로 표현해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이고 연기력이 상당히 뛰어난 배우다. 그녀의 뛰어난 연기 덕에 수재나라는 인물에 쉽게 감정이입 할 수 있었다. 앤절리나 졸리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다. 반항기 넘치는 카리스마의 여장부 리사는 그녀 외에는 다른 배우가 떠올려지지 않을 만큼 매우 실감나게 열연한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그녀의 연기를 보고 그녀의 남편 브래드 피트가 오버랩되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수재나의 표현대로 간혹 보여주는 리사의 텅 빈 눈빛은 정말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정말 정신병원에 가면 저런 인물이 있을 거 같다는 느낌마저 안겨준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을만하다. 또 한명을 거론하자면, 우피 골드버그다. 코미디 연기에만 능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진지한 역할을 이토록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그녀는 정말 대단한 배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장면전환에 있다. 독창적일 정도로 눈에 번쩍 띄는 이 영화의 장면전환은 압권이다. 사실 처음엔 일종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속된 말로, 멋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근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바로 수재나라는 캐릭터의 특성 때문이라는 것을. 수재나는 알다시피 '경계선 인격 장애'로 진단받은 정신질환자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고 있다. 일종의 증상인데, 그런 그녀의 증상을 표현한 게 이 특이한 장면전환이다. 이처럼 한 개인의 특성을 영화적인 기법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이 창의력은 정말 돈 주고라도 사고 싶다.
음악도 인상적이다. 영화적 시대배경에 따라 그 당시의 락 음악들이 흘러나오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향수를 자극한다.
이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있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병동 내에서의 에피소드 그리고 밖에서의 에피소드가 보는 사람을 계속해서 집중시킨다. 스토리텔링이 굉장히 뛰어난 영화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수재나 카이즌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얼마나 각색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실화의 힘은 대단하다. 굉장히 밀도 높은 이야기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건 영화 내내 흐르는 정서와 분위기 때문이다. 때론 데일 것처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뭔가 정적이고 차분하면서도 폭발할 것같은 에너지가 내제된 영화다. 그런 상반된 정서가 함께 녹아있어 더욱 매력적인 영화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위노나 라이더와 앤절리나 졸리는 과거에 실제로 정신질환을 앓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재나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을까. 어디에 있든 그녀의 마음은 늘 그들에게 향해 있겠지.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도 미친 사람일수 있다. 다만 그들보다 덜 미친 사람일뿐. 엔딩은 수재나에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만 남았다. |
'영화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Moulin Rouge! (0) | 2010.08.14 |
---|---|
American History X (0) | 2010.08.12 |
Flawless (0) | 2010.08.02 |
Slam (0) | 2010.07.30 |
Changing Lanes (0) | 2010.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