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을 전공한 '서맨사'와 잘 나가는 비즈니스 맨 '이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두 사람은 런던의 집에서 오붓하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서로의 실수로 인해 어긋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서로 대화하던 중, 이언의 말에 상처받은 서맨사는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타고 이언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가도록 내버려둔다. 멀리서 차 뒤만 바라보던 이언. 그러다 갑자기 서맨사가 탄 택시가 다른 차와 충돌이 생기면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슬픔에 주저앉는 이언.
다음날 아침, 이언은 잠에서 깨는데 갑자기 옆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름 아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맨사가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어제 벌어졌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전날밤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오늘의 현실로 그대로 나타나 이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은 이언은 마지막 선택을 하고 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클리셰로 뒤범벅이 된 영화다. 온갖 상투성과 작위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영화다.
<이프 온리>가 개봉될 당시, 이 영화는 의외의 흥행을 거두었다. 아마도 가을 시즌에 개봉한 게 시기상으로 적절했고 한국인들의 감성에 어필이 될 만한 최루성 로맨스 영화였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내가 가을 시즌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단순히 <이프 온리>가 가을에 적합한 영화라서 만이 아니라 그 시기가 극장가에는 일종의 비수기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이즈의 영화가 즐비하지 않는 시기이기에 적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좀 전에 언급했듯이, <이프 온리>는 최루성 로맨스 영화다. 보통의 일반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장르지.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1980년대나 90년대에 충무로에서 볼 수 있음직한 영화다.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진부하고 촌스러울 수 있는지. 오해는 마시라. 내가 말한 촌스러움은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다. 영상은 나름 감각적이고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다. 그래 맞다. 개봉 당시 어떤 영화기자가 <이프 온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제니퍼 러브 휴잇의 90분짜리 뮤직비디오'라고 짧은 평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때 당시는 이러한 평가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근데 지금 와서 보니 일리가 있는 평가라고 여겨진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 받고 슬퍼하며 재밌어하는 관객들이 꽤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근데 그런 걸 가지고 본인들 스스로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착각은 안 했음 싶다. 감수성은 그런데다 갖다 붙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말 유치하고 단순하다. 기껏 보여준다는 게 초반부에 나오는 내용들이 꿈이라는 일종의 반전 아닌 반전이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 매우 촌스러운 트릭에 불과하다. 그 트릭만 아니었어도 1시간 만에 끝날 영화다. 이 영화에서 나온 반전(?)은 일종의 깜짝쇼에 불과하다. 난 도무지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도 없었고 공감도 가지 않았다. 전혀 슬프거나 가슴 아프지도 않았다. 내가 감정이 무뎌서? 감수성이 부족해서? 한마디로 이 영화는 판타지다. 말 그대로 지극히 영화적이다.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감동을 조작하는 게으른 연출 태도도 문제다. 예컨대, 슬픔을 조장하기 위해서 음악을 과장되게 입힌다던지 인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오열한다든지 하는 모습들. 눈물은 인물이 흘려야 하는게 아니라 관객이 흘려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처럼 인물들이 관객의 눈물까지도 다 뺏어서 울어재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영화를 날씨에 비유하자면, 티 없이 맑은 날씨에 비오는 격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청소년 혹은 20대 초반의 여성들에게만 딱 알맞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에서는 도무지 감흥이란 걸 느낄 수가 없다. 한 가지 그나마 건질 수 있었던 건, '이언'을 연기한 '폴 니콜스'다. 그 보다 인지도가 높은 제니퍼 러브 휴잇을 압도하는 매력과 연기력을 보여준다. 제니퍼 러브 휴잇의 연기는 개인적으로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과장되고 귀여운척하는 연기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당연히 사랑 이야기지만 '운명'을 주제로 삼고 있다. 영화 시작부터 두 사람이 '운명'에 대한 논쟁을 살짝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언은 운명은 언젠가는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반대로 서맨사는 운명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이언은 지난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나자 애써 부정하려 한다. 그래서 일부러 다르게 행동하고 피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운명을 받아들인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유일하게 달랐던 건 서맨사가 아닌 이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언의 결단과 희생으로 가능한 결과였다. 이언은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또한 운명을 바꿨다. 사실 그 택시를 끝까지 안 탈수도 있었고 런던으로 안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운명의 길을 택한다. 그의 이런 선택은 그의 대사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 인생은 값진 거니까."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서맨사의 말, "죽음도 사랑을 갈라놓진 못해." 그녀의 이 말에 그는 결심을 굳혔다. 영화에서 택시기사는 일종의 저승사자 역할 같다. 또한 이언이 서맨사를 진심으로 주저 없이 사랑하게끔 각성하고 채찍질하는 사랑의 전령사와도 같은 역할이다.
한 가지 궁금한게 있다. '11시'가 의미하는 건 뭘까? 이언의 시계가 깨질 때마다 시간은 11시로 정지되어 있고 서맨사와 이언이 각각 죽기 전 택시에 승차할 때도 시간은 11시다. 이것은 죽음의 숫자 혹은 불길한 운명의 숫자로 생각된다. 근데 뭐 그렇게 심각할 건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운명에 대해서 진중하고 깊이있게 고민하는 철학적인 영화가 아니니까. 그러기엔 영화가 너무 쉽고 감정의 메아리가 전혀 없다.


★☆
상투성과 작위적인 요소를 몸소 뿜어내는 별볼일없는 영화. 그나마 폴 니콜스의 연기만이 인상에 남는다. 어떠한 감흥도 느낄 수 없는 겉멋만 잔뜩 든 형편없는 영화. 그의 사랑은 위대하지만 영화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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