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영화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이 영화만 보더라도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다. 그는 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느린 호흡으로 전개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마찬가지다. 비록 호흡은 느리지만 지루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참 신기한 현상이다. 오히려 그의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젖어들게 만든다. 더 몰입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를 보면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묘한 공기가 흐른다.
'미스틱 리버'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말을 가지고 있다. 뭔가 씁쓸하면서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기묘한 정서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쉽게 동의할 순 없지만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다. 프랭키는 매주 성당에 나가 예배를 드리지만 신앙에 대해 의심을 항상 품는 인물이다. 프랭키의 그런 모습에 신부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고 귀찮아한다. 세상에 그런 나쁜 신부가 어디 있나 싶다. 암튼 프랭키는 신의 뜻에는 어긋나지만 결국 매기의 뜻에 따라 그녀를 놓아준다. 누군가는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쉽게 규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당사자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가망이 없고 계속 병실에 누워서 숨만 쉴 수 있는데.. 두고만 볼 것인가..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프랭키의 행동에 나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게 되었다.
프랭키는 냉소적인 인물이다. 세상사의 희로애락을 몸소 뼛속까지 체험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칭찬에 인색하고 고집스럽다. 반면에 그가 운영하는 체육관의 청소부이자 그의 조언자 '스크랩'은 정이 많고 부드러운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잘 맞는다. 프랭키에게 자신의 트레이너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매기는 성실하고 인정 많은 인물이다. 프랭키와 매기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외로운 영혼들 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스크랩이나 떠버리 연습생 '데인저'- 모두 외로운 영혼들이다. 그들에겐 가족이 없고 있다하더라도 있으나마나한 존재들이다. 프랭키는 딸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지만 편지는 반송되어 돌아오기 일쑤다. 매기는 가족이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자 걸림돌이다. 솔직히 말해서 매기를 때려눕힌 '푸른 곰 빌리'보다 그녀의 가족이 더 나쁜 쓰레기다. 그들이 보여준 말로 표현 못할 행태가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프랭키와 매기는 피가 섞인 관계는 아니지만 그들의 가족이 주지 못했던 정을 그들은 서로에게 나누고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서로를 신뢰하고 있음을.. 매기는 오직 프랭키가 자신의 트레이너가 되어주길 원했다. 프랭키는 이미 매기를 자신의 가족.. 정확히 말하면 딸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이는 중요치 않다. 피조물로서 서로를 사랑한 것이다.
프랭키는 겉으론 괴팍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매기는 겉으론 강한척하지만 알고 보면 너무도 약한 사람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영화다. 복싱이란 스포츠를 통해 철학을 이야기하고 삶을 반추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다. 다만 지옥같은 현실을 버텨나가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에겐 거대한 희망 따윈 꿈꿀 수조차 없다. 다만 삶속에서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뿐.
'매기'라는 역할은 힐러리 스왱크 외에는 떠올려지는 배우가 없을 정도다. 그녀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몸을 아끼지 않는 육체 연기와 영혼을 울리는 감성 연기가 합쳐져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모건 프리먼은 목소리가 워낙 좋은 배우라 영화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 떨어져 보는 내내 경건하게 만든다. 그를 통해서 연기란 제왕적 카리스마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부드럽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훌륭한 감독이자 탁월한 배우다. 개인적으로 배우로서의 그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다. 감독임을 떠나서 말이다. 그는 참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음악까지 맡았으니... 참 이 영화하면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잔잔한 선율의 음악이 영혼을 울린다.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촬영이다. 현란하진 않지만 영화의 분위기에 맞게 촬영이 잘 되어있는 영화라는 게 내 소견이다. 인상적인 장면도 꽤 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둡다. 내용도 어둡지만 화면자체가 어둡다. 깜깜한 체육관 내부가 특히 자주 등장한다.
재밌는 사실 하나, 영화 중반부에 가면 매기와 프랭키의 복싱 의상이 녹색이다. 왜 그럴까? 그건 프랭키가 책 읽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노력하되 현실을 받아들여라.


★★★★
모쿠슐라~ 프랭키가 매기를 고통에서 놓아주는 장면에서조차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그순간 영화는 신파로 빠지지않고 절제미의 최고봉이 된다. 영화를 보고나면 현실에 대한 감독의 냉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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