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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샘 (2001/미국) 장르 드라마 감독 제시 넬슨 출연 숀 펜, 미셸 파이퍼, 다이앤 와이스트, 더코타 패닝, 리처드 쉬프, 로레타 드바인, 더그 허치슨, 로라 던 |
줄거리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진 샘 도슨은 커피 전문점에서 일하며, 아내가 버리고 간 딸 루시를 키우며 힘들지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루시가 일곱 살이 되면서 사회 복지 기관 전문가가 이들 사이에 끼어들게 된다. 샘의 지능은 일곱 살 수준이기 때문에 루시가 일곱 살이 넘게 되면 샘이 루시를 정상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 만일 샘이 그의 양육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루시는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야 한다.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샘은 친구들 중 한 명이 전화번호부에서 본 중에 제일 좋은 광고 중 하나라며 추천한 곳으로 연락을 하고 직접 찾아가게 된다. 거기가 바로 변호사 리타 해리슨의 사무실이다. 샘은 리타에게 자신의 변호사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지만 리타는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아빠로서의 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반전이 일어난다. 리타가 샘의 변호를 그것도 무료로 맡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유는 별게 아니다. 자신의 이미지 세탁을 위한 전략으로서 얼떨결에 맡겠다고 공언해 버린 것이다. 비록 변호를 맡게 된 계기는 부실하고 무책임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샘의 루시에 대한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리타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함께 변화됨을 느낀다. 이제 샘과 리타, 샘의 친구들은 한 팀이 되어 루시를 되찾아 오기 위한 지난한 여정을 밟게 되는데.. 과연 샘은 루시를 되찾아 올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는 주인공으로 추측되는 인물의 캐릭터부터 먼저 보여주며 시작한다. 카메라에 클로즈업된 주인공 인물의 손은 상자 안의 뭔가를 색깔별로 끼워 맞추고 '스타벅스 커피'라고 새겨진 로고가 정확히 앞으로 보이게끔 커피잔을 가지런히 정돈하는데 바삐 움직인다. PPL이 이렇게 노골적이어도 되나. 스타벅스 홍보(?) 영화가 아닌가 싶을 만큼 스타벅스는 극중에서 꽤 빈번하게 등장하는 유의미한 공간으로서 심지어 한 장면에서는 도처에 가득한 수많은 스타벅스 간판을 버젓이 대문짝(?)만하게 연쇄적으로 보여주며 일종의 전시(?) 효과를 획득한다. 한마디로 스타벅스의 자랑질이지. 미국인들의 스타벅스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영화 끄트머리엔 주인공이 직장을 옮기면서 '핏자 헛'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아이 합', '밥스 빅 보이', '비틀즈', 월리의 대사로 언급되는 고전 영화들까지. 그러고 보니 온통 PPL 투성이네.
여하튼 첫머리에 언급했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일차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주인공은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며 두 번째는 그가 다분히 강박증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곧이어 우리의 주인공 샘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투와 행동을 보건대 뭔가 좀 이상하다.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 그는 흔히 말하는 지적장애인이다. 그런 그에게도 딸이 생기고 비틀즈의 광팬인 샘은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착안을 하여 딸의 이름을 '루시'라고 짓는다. 시간은 쏜살같아서 어느덧 루시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일곱 살의 지능을 가진 샘은 아이러니하게도 루시에게 아빠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존재이다. 동갑내기 친구. 그러나 사회는 이들의 관계를 좋게 보지 않고 부정적이고 심지어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샘과 루시의 부녀 관계를 강제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7세의 지능을 가진 샘은 아버지로서 딸 루시를 감당할 수 없고 키울 수 없다며 억지로 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샘이 감당할 수 없는 건 루시의 존재가 아니라 부재인데 말이다. 누가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찢어놓으려 하는가. 왜? 그럴 자격이 대체 누구에게 있냐 말이다. 7살의 아빠는 7살, 10살, 13살의 딸을 키울 수 없는 것인가? 그럼 반대로 30살, 40살의 아빠는 7살의 딸을 잘 키우나? 부모의 지능이 낮다고 아이가 잘못 크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지능이 정상적이라고 아이가 잘 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회가 지들 멋대로 누군가를 단지 지능이 낮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자격을 박탈하는 무지에 의한 어마어마한 폭력을 저지른다. 어불성설이 따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샘을 지능이 낮다고 무시했지만 정작 지능 낮은 행동을 보인 건 샘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딸에 대한 사랑만 놓고 본다면 샘은 지극히 정상이다. 보면서 화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 어떤 부분은 이해가 안 가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법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참 무섭고 좆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결과는 해피 엔딩이다. 딸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한 과정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엔 딸을 잃지 않았다. 거기다 덤으로 엄마까지 얻었으니. 샘이 위탁가정의 엄마 랜디에게 루시의 엄마가 되어달라며 일종의 공동 양육권을 제안한 것. 여기서 샘의 성숙함을 엿보게 된다. 지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샘은 성장한 것이다. 샘의 생각은 이러했다. 자신은 7살에 지능이 머물러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루시에겐 엄마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이 더 절실히 요구될 것이라고. 물론 샘과 랜디는 부부 사이가 아니다. 랜디에게는 남편이 따로 있다. 다만 아이가 없을 뿐. 그러니 모두에게 잘 된 셈이지. 각자에게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서로 채워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 <아이 엠 샘>은 장애인 아빠와 일반인 딸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싸우며 승리를 일궈내는 과정을 감동 스토리로 엮어내기 위해 이 둘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눈물 콧물 다 빼는 일종의 신파 전략으로 전개 방향을 설정한다. 그러다보니 무리수를 두기도 하는데 거기서 야기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작위성이다. 예컨대 샘이 리타에게 자신의 변호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리타는 단칼(?)에 거절한다. 객관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봤을 때 그녀의 거절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났다면 리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겠지. 문제는 다음이다. 리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샘의 변호를 그것도 무료로 맡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 것이다. 단지 주변의 눈치와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서. 사회적 약자를 향한 진심이나 숭고한 정신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미지 세탁 차원에서 얼떨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승낙은 설득력이 없다. 갑작스럽고 뜬금없고 느닷없으며 당혹스럽다. 샘이 시간당으로 돈을 주겠다는데도 변호 자체를 거부하더니 이제는 변호는 물론 무료로 해주겠다고 하니. 리타가 샘의 변호를 맡을 수밖에 없는 보다 설득력 있고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너무 쉽고 게으르게 설정을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게다가 애초에 샘이 리타와 상담 예약을 잡을 수 있었던 것조차 원래는 불가한데 임시 직원의 실수로 인해 가능했다는 설정 또한 다분히 우연성에 기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위성이다. 샘과 루시 두 부녀의 감동 스토리를 위해 다소 극단적인(?) 설정을 가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법정에서 리타의 적수로 등장하며 샘과 루시의 부녀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터너'라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열하고 재수 없는 캐릭터로 그리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불가피한 설정이었다고 보여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터너에게 악역을 맡긴 거다. 좀 과하게 말하면 이 감동 스토리의 희생양이랄까. 반대로 위탁가정에서 루시의 엄마 역할을 하는 로라 던이 연기한 '랜디'라는 인물은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아서 좀 의외였다. 마지막에 샘에게 진심을 토로하며 기존의 강경한 태도에서 벗어나 양육권을 포기하고 루시를 놓아주겠다는 그녀의 눈물에서는 영화 속 의외의 한방이랄까.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결말이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대한민국에서 길러진 나로서는 문화 차이인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 법이 이 부녀를 단지 아빠가 지능이 낮다는 이유로 지들 멋대로 갈라놓는다는 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설정이 황당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이해가 안 갔다. 미국에선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인가. 아님 영화적 설정인가. 어차피 이 영화는 실화는 아니다. 오리지널 각본이다. 즉 작가가 상상으로 쓴 글이다. 물론 작가가 주변의 실제 이야기에서 모티브만 삼아서 각본을 구성했을 수도 있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암튼 이러한 설정이 좀 과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갈라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그게 얼마나 작위적인가. 아니 지가 딸을 키우겠다는데 왜 지랄들이야. 딸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학대를 한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키우겠다는데.. 그것도 딸이 아빠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딸도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도 딸을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야? 지능이 7살에 머물러 있는 지적장애인을 매춘 혐의로 몰고 그것도 딸을 가진 아빠한테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딸의 생일 파티에서 단지 딸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했을 뿐인 보통의 아빠와 다를 바 없는 그에게 애(들)를 겁주고 난리를 쳤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결국엔 그와 딸을 강제 분리를 시킨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고 악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짓거리다. 이 모든 게 지적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선입견, 편견에서 비롯된 문제다. 지능이 떨어진 아빠와 같이 살면 아이가 불행하고 위탁가정에서 자라야 행복하다는 건 억지 논리, 억지 주장 아닌가.
다만 루시의 그림에서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림 속에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루시는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아빠 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간다. 그러니까 부녀지간이 전도된 거다. 딸 루시는 어른이고 아빠 샘은 아이이다. 마치 모자지간 같았달까. 아빠가 딸을 키우는 게 아니라 딸이 아빠를 키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이들을 갈라놓은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사회가 이 두 부녀를 멋대로 갈라놓으려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어쨌든 영화는 재밌다. 나름 재밌다. 근데 장르적 특성상 런타임이 다소 길다는 느낌은 들었다. 좀 더 줄였으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일단 이야기의 힘이 컸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그리고 화면 전개가 빠르다. 원색의 화려한 색감을 주된 톤으로 사용하여 눈길을 부여잡고 속도감 있게 짧게 끊어지는 잘게 잘게 쪼개는 편집으로 쉼 돌릴 틈 없이 몰입하게 하며 나름(?)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흥분감을 도취시킨다. 거기에는 분명 음악이 특히 한몫을 담당한다. 영화 내내 거의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온통 비틀즈 노래로 가득차 있다. 비틀즈 특유의 감미롭고 서정적인 선율의 멜로디가 귀에 착 감길 뿐만 아니라 영상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며 감성을 적시고 감정을 증폭시킨다. 음악 뿐 아니라 대사로도 끊임없이 인용되고 언급되며 심지어 이들을 패러디하고 오마주한 장면도 등장한다. 샘이 루시의 학교 학예회에서 가발을 쓰고 비틀즈 의상을 입고 가짜 기타를 메고는 숀 레넌(숀 펜 + 존 레넌)으로 부활(?)하여 아이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이 패러디에 해당하고, 샘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루시가 빨간 풍선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은 정확히 비틀즈의 '애비 로드' 앨범 재킷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감독이 귀엽고 깜찍하고 밝은 동화 느낌이 나도록 재해석해서 연출한 오마주다. 후자의 이 장면은 앨범 재킷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카메라 각도까지 정확하다. 재밌는 장면이다. 이러한 의미들로 볼 때 영화 <아이 엠 샘>은 비틀즈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또 있지. 비틀즈의 노래들로 아예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한 뮤지컬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이런 거 보면 비틀즈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진하고 각별한지 엿볼 수 있다. 비틀즈도 비틀즈지만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에 대한 예찬도 빼놓을 수 없다. 빅터 플레밍 연출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오즈의 마법사', '록키 호러 픽쳐 쇼' 그리고 비교적 앞의 작품들보다 덜 오래됐지만 극중에서 유독 잦은 언급으로 강조되는 영화 '크레이머, 크레이머'. 특히 '크레이머, 크레이머'는 영화를 직접 보지 못해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짧은 정보로 짐작컨대 부모 사이의 아이의 양육권 줄다리기를 다룬 영화로서 이 영화 <아이 엠 샘>과 부분적으로나마(?) 공통 분모를 이루는 영화인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실 뻔한 할리우드 감동 스토리다. 내겐 진부하게 느껴진다. 못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게는 그냥 무난하고 평이한 영화다. 피상적인 감동만 줄 뿐이다. 보면서 흐뭇하긴 하지만 가슴을 확 때리거나 먹먹하게 하진 못한다. 하긴 기대할 게 따로 있지. 결말도 그렇고 과정도 그렇고 결국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장애인 아빠의 승리로 끝난 것인데 그것도 참 클리셰다. 현실에서 가능하기나 할까. 모르겠다. 난 기적을 믿지 않으니까. 실화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건 중요치 않다. 이것이 실화라고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영화 속 샘의 승리가 현실 세계의 모든 장애인들의 승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아이 엠 샘>을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에게 바치는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저 한 편의 감동 스토리를 위해 장애인 아빠와 일반인 딸을 끌고 들어와 이들을 전형적인 결말과 이야기 전개로 구성되어 있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의 컨벤션에 철저히 복무하고 충실히 따르도록 활용하고 써먹고 이리저리 굴리는데 희생시켰을 따름이다.
타이틀 롤을 연기한 숀 펜은 가히 '레인 맨'의 더스틴 호프먼에 비견되는 출중한 연기를 선보인다. 둘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공교롭게도 '크레이머, 크레이머'에도 더스틴 호프먼이 출연한다. 사실 숀 펜의 작품 성향과는 <아이 엠 샘>이라는 영화는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도 지적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는 도전 정신에서 비롯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고 특별히 오스카를 의식하고 선택한 것 같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숀 펜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반골이고 '미스틱 리버'로 첫 오스카 트로피를 받기 전까진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라도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들 중에서도 연기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타공인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소유한 무시무시한 배우. 할리우드에 숀 펜이 있다면 우리에겐 조승우가 있다. 역시나 '말아톤'에서 지적장애인을 연기한 조승우는 <아이 엠 샘>에서의 숀 펜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어떤 면에선 숀 펜을 능가하기도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말아톤'에서 보여준 조승우의 연기가 숀 펜의 그것보다 더 인상적이었고 더 감정을 건드렸으며 그래서 더 울컥했다. 아마 여기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많은 기여를 한 것도 같다. 암튼 조승우.. 엄청난 배우다. 한국이라고 얕보지 마라. 숀 펜의 연기는 참 사실적이다. 정말 지적장애인 같았다. 숀 펜은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오스카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명한 영화 비평가 로저 이버트는 수상자로 숀 펜을 예상하지만 트로피는 '트레이닝 데이'의 덴젤 워싱턴에게 돌아간다. 그의 헛발질은 이게 끝이 아니다. 2004년도 오스카에서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빌 머리를 수상자로 점찍지만 재밌게도 이번에는 숀 펜이 '미스틱 리버'로 트로피를 가져간다.
미셸 파이퍼는 특별히 인상적인 연기는 아니었고 그냥 무난한 연기를 보여준다. 속물근성의 세속적인 그러면서도 백치끼가 있는 여자 변호사를 연기하는데 꽤나 잘 어울렸다. 언제나 그 고양이상의 얼굴은 매력적이다. 좀 늙어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더 늙었겠지. 개인적으로 숀 펜과 미셸 파이퍼의 로맨스가 아니어서 아쉽네. 약간 그런 분위기가 될(?) 뻔도 했지만 언감생심. 지적장애인 남성과 성공한 여변호사의 로맨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니까. 슬프게도.
누가 뭐래도 결국 <아이 엠 샘>은 부녀로 나오는 숀 펜과 더코타 패닝의 영화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더코타 패닝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엿한 숙녀가 됐지만 이때만 해도 말 그대로 어린 꼬마였다. 너무 귀엽네. 참고로 극중에서 4살 때의 루시는 더코타 패닝의 실제 여동생 엘 패닝이 연기했다. 탁월한 선택이다. 실제 자매지간이니 이보다 적합한 캐스팅이 어딨겠나. 더코타 패닝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우주 전쟁'에서 그녀와 같이 공연한 톰 크루즈는 더코타 패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치 70대 노파가 그녀의 내면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아이 엠 샘>에서도 그녀가 연기한 루시는 나이에 비해 너무나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조숙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의 아빠가 정신 연령이 어리다 보니 루시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고 나라도 빨리 어른이 되어 아빠를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둘 다 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아이가 아이를 키울 수는 없는 법. 일종의 생존 전략이랄까. 아이지만 어른 같은 루시와 어른이지만 아이 같은 샘. 어찌됐든 숀 펜은 어른이 할 수 있는 아이를 연기했고 더코타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어른을 연기했다. 사실 이 영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숀 펜의 연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고 특히 부녀를 연기한 숀 펜과 더코타 패닝의 화학 작용이 큰 매력을 발산하는 영화다. 말하자면 부녀지간의 로맨스랄까. 부녀이지만 동갑내기 친구이자 일종의 애인(?) 사이. 아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리타는 이들 부녀를 통해 관계 회복을 한다. 게다가 리타의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리타가 남편과도 관계 회복을 이룬다는 것이다. 참고로 리타의 남편은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다른 인물들의 대사로서만 등장할 뿐. 그러고 보니 샘과 루시는 부녀 관계이고 리타와 그의 아들 윌리는 모자지간이다. 일종의 데칼코마니랄까. 샘과 루시에겐 사랑이 있지만 현실이 이들을 갈라놓고 반면에 리타와 윌리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지만 대신 사랑이 없다. 그러나 이 두 커플의 결핍된 부분들은 종국적으로 완전히(?) 채워진다. 샘과 루시는 리타의 도움에 힘입어 법적으로 도둑맞은 부녀 관계를 되찾고 리타는 이들 두 부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며 새삼 자식에 대한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으며 스스로 차버린 모자 관계를 회복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 본인의 삶도 주변 타자의 삶도 모두 변화시킨다는 이 상투적인 설정 또한 지극히 할리우드적이다. 다분히 이상적이랄까. 투쟁하다 큰 장애물을 맞닥뜨려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포기하다가도 누군가의 말에 자극받아 다시 일어나서 싸우고 그렇게 해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 도식. 미국적인 가치관이 투영된 영화다. 노력만 하면 무조건 다 이룰 수 있다는 대책 없는 이러한 낙관주의는 사실 위험하다.
지금쯤 루시는 이미 20대 성인의 문턱에 다다랐을 것이고 여전히 샘은 7살에 머물러 있을 게다. 이들의 현재가 몹시도 궁금하다. 샘과 루시를 갈라놓았던 것도 사실은 주변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이었다.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 그들이 이 두 부녀의 삶에 끼어들고 개입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지들끼리 알콩달콩 잘 살 텐데 괜히 들쑤셔놓고 이 두 부녀의 가슴에 멍만 아로새기고 힘들게 괴롭히기만 했으니. 이럴 땐 무관심이 약인데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비록 비중은 적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루시의 대모이자 피아노 선생님 '애니'. 그녀는 샘의 오래된 이웃으로서 루시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루시를 알았고 샘이 루시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조언과 실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쉽게 얘기해서 루시를 키운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루시에게 일종의 정신적 엄마 또는 대체 엄마 역할을 한 인물이다. 나중에는 그 자리를 젊은 새엄마(?)라고 할 수 있는 랜디가 채운다. 어쨌거나 애니는 샘의 증인으로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애니의 불우했던 과거가 드러난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꽤 오랜 세월을 세상과의 소통은 차단한 채 두문불출해왔다. 오직 샘에게로 난 창만 조그맣게 열어 놓았을 뿐. 그런 의미에서 애니도 장애인이다. 사회적 장애인 또는 심리적 장애인. 자폐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지. 자신도 장애인이니 무의식적으로 샘에게 이끌렸던 거 아닐까. 소위 말하는 정상인들에게는 마음의 문을 닫아 소통할 수 없었고 샘을 보며 동병상련의 처지로서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샘에게만큼은 감정 이입을 하고 친구가 되었던 것. 또한 기존의 아버지들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소위 정상인 아빠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자식을 때리고 상처주고 학대하기 바쁜데 장애인 아빠인 샘은 누구보다 딸을 아끼고 사랑하고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다. 애니는 샘과 루시를 통해서 작게나마 치유를 얻었을 것이다. 결국 <아이 엠 샘>은 상처받은 자들의 연대에 관한 영화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장애인이라는 온갖 편견과 차별, 무시 속에 살아가는 샘도 그런 사람을 아빠로 둬서 친구에게 조롱감이 되는 루시도 남편과 아들, 숨겨진 열등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리타도 맨날 일에만 바쁜 부모를 둔 아들 윌리도 좋은 집에 좋은 남편을 뒀지만 자녀가 없어 늘 결핍감에 사로잡히는 랜디도 심지어 적의 편에 서 있지만 아이들이 무책임하거나 능력이 없는 부모로 인해 상처받는 것에 민감한 터너조차도 모두 상처받은 인간들이다. <아이 엠 샘>은 터너를 제외한 나머지 상처받은 이들이 한데 모여 서로 부둥켜안고 보듬고 위무하는 영화다.
확실히 숀 펜은 내면 연기에 능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에 격랑을 일으키고 잔잔한 물에 큰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연기를 선보인다. 기교로 장난치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건드린다. 촌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담백(?)하고 직선적인 연기랄까.
극중 샘의 친구 월리가 아마 영화광으로 보이는데 법정 복도에서 리타와 어떻게 증언을 할 것이냐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록키 호러 픽쳐 쇼'와 거기에 출연한 수즌 서랜든이 대사로 언급된다. 월리는 수즌 서랜든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배우라고 말한다. 재밌게도 수즌 서랜든은 숀 펜과 '데드 맨 워킹'이란 영화에 출연했었다. '데드 맨 워킹'의 연출은 지금은 이혼했지만 당시만 해도 수즌 서랜든의 남편이었던 배우 출신 감독 팀 라빈즈가 맡았었다. 숀 펜 역시 배우 겸 감독이다. 그리고 훗날 팀 라빈즈와 숀 펜은 감독이 아닌 배우로서 역시나 배우 출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에 같이 출연한다. '데드 맨 워킹'으로 숀 펜과 수즌 서랜든은 각각 주연상 후보에 오르는데 수즌 서랜든만 수상을 한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봤을 때 숀 펜이 수상하고 수즌 서랜든은 수상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긴 남우 주연상, 여우 주연상 각각 따로 경쟁을 하는 거고 각각의 카테고리 안에서 상대적으로 제일 잘한 배우에게 트로피를 부여하는 거니까 이해해야지 뭐. 어쨌거나 본 지 오래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단지 둘을 비교한다면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데드 맨 워킹'에서 숀 펜은 너무나 인상적인 명연기를 펼쳤고 수즌 서랜든의 연기는 그냥 무난한 정도였다.
<아이 엠 샘>은 무려 15년 전 영화다. 한국에서는 미국보다 1년 정도 개봉이 늦어져서 14년 전 이맘때쯤 관객들을 찾아왔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아마도 13년 전이다. 그 사이 영화의 감동은 무뎌지고 이 영화가 가진 뚜렷한 한계를 보게 됐다. 그래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왠지 아련한 느낌은 좀 들었던 것 같다. 특히나 더코타 패닝을 보면서 확실히 느꼈다. 세월의 무상함을. 극중 그녀가 연기한 루시가 생일 파티에서 뛰쳐나와 경찰에 쫓기는 와중에 빨간 풍선을 들고 도망치다가 풍선줄을 놓쳐 버려 빨간 풍선이 하늘 위로 날아가는 장면은 이들 부녀의 암울한 앞날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샘은 연행되어 경찰차에 오르게 되고 루시는 위탁가정에 맡겨져 이들 부녀는 생이별을 당한다. 여기서 경찰은 사회나 권력 또는 주류 기득권의 도그마를 상징하고 빨간 풍선은 아빠 샘(사랑)을 의미하며 풍선줄은 이들 부녀 관계를 잇는 핏줄을 뜻한다. 그러나 핏줄을 끊는다고 사랑마저 끊을 순 없다. 눈에 선하다. 다시 빨간 풍선을 들고 해맑게 미소 지으며 걸어가는 루시의 모습이. 이번에는 풍선줄을 꽉 움켜쥐고 있다. 옆에 샘도 나란히 빨간 풍선을 들고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이들 부녀말고 더 있다. 샘의 친구들은 샘에게는 정말로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러나 샘의 친구들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와 있다. 새 가족이 된 랜디 부부와 개 플로피 그리고 리타와 그녀의 아들 윌리. 그렇게 빨간 풍선으로 하늘을 수놓은 황홀경이 펼쳐진다. Lucy in the Sky with Red..
★★★
하마터면 지나친 감상주의로 흐를 뻔한 영화를 건져내는 것은 숀 펜의 절제된 연기 덕분이다. 대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만족스럽고 이야기가 전형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거부하기도 힘들다. 상투적인 내용은 또 보편적인 감동을 낳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 또한 흠이라고 볼 수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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