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치 아담스 (1998/미국)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톰 섀디악 출연 로빈 윌리엄스, 모니카 포터, 대니얼 런던, 필립 시모어 호프먼, 밥 건튼, 어마 P. 홀, 조셉 서머, 피터 카요티, 마이클 지터, 하브 프레스널, 리처드 카일리 |
줄거리
헌터 아덤스는 외로운 성장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쳐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던 그가 그곳의 동료 환자들로부터 치유와 영감을 얻고 희망을 꿈꾸기 시작한다. 다름 아닌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까지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패치 아덤스로 새롭게 거듭난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 괴짜 의대생 패치는 3학년이 되어서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몰래 환자들을 만난다. 그 자신이 광대가 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환자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하며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다. 월컷 학장의 몇 번의 경고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일 뿐인 패치. 3학년이 되고 그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산 위의 허름한 집을 개조하여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그런데 어느 날, 의대생 친구들 중 한 명인 패치의 연인 캐린이 정신 이상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패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벼랑 끝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그에게 날아온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가 그를 벼랑 끝에서 구한다. 그는 다시 활기와 의욕을 되찾아 학교와 병원으로 돌아가 본래대로 의사의 꿈을 불태우기로 한다. 하지만 의사 면허증 없이 진료 행위를 한 것이 학교 측에 발각되고 자칫 그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최악의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사방이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길로 보이는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도로를 따라 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창밖 너머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채 나지막한 목소리와 담담한 어조로 읊조리는 주인공의 독백이 이어진다. 지난날의 과거를 회상하듯.. 그렇게.. 그는 지금 기원의 장소로 가고 있다. 모든 이가 그렇듯.. 목표이자 목적지를 향해.. 거기에 도착한 그는 방금 자신이 떠나온 또 다른 기원의 장소를 추억한다. 이제껏 자신한테는 가장 화려하게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해주었던 그곳의 기억을 소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정신병동이다. 그는 비로소 정신병동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생애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품게 된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바깥세상에서도 발견 못한 삶의 희망을 폐쇄되고 격리된 비좁은(!) 세상에서 찾게 됐으니.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에게 그것을 제공한 대상이 의사가 아니라 동료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서 그곳의 경험을 잊지 못하게 하는 건, '패치'라는 이름을 선물 받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헌터 아덤스가 패치 아덤스로 변모되는 순간이다. '패치'라는 이름대로 그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돕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사람의 바다로 뛰어드는 것..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patch'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상처에 대는 헝겊.. 반창고.. 붙이는 흡수약.. 조각.. 파편.. 부스러기.. (다른 것과 달라 보이는) 부분.. 수리하다.. 해결하다.. 조정하다.. 가라앉히다.. 조속히 매듭짓다.. 고치다.. 원상태로 되돌리다.. 수습하다 등으로 되어있고 또 다르게는 광대.. 바보.. 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주인공 패치는 이 모든 개별적 의미 하나하나에 정확히 다 부합된다. 그는 환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감싸주는 헝겊이자 반창고이고 흡수약이며 다른 것과 달라 보이는 부분을 불온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기득권을 대표하는 월컷 학장 같은 사람에게는 깨진 유리 조각(영화에서처럼 '가시'라고 표현해도 무방함)과 같은 파편일 것이다. 어렵거나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본인이 나서서 고치고 수리하고 사태를 원상태로 되돌리고 수습한다. 분쟁을 해결하고 가라앉히며 갈등을 조정하고 일을 조속히 매듭짓는다. 그는 환자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부스러기가 되도 좋다는 듯 스스로 광대를 자처한다. 그는 환자 바보다. 동시에 과하게(?) 순진하고 어리석다 할 정도로 꼼수를 쓰지 않는 우직함으로 주류 기득권의 아성에 정면으로 맞서는 바보이기도 하다.
사실 정신병동에서 그를 구한 건 주변 타인들이 아니었다. 상상력과 유머가 그를 살린 것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달수는 인간은 상상력에 있어서 비겁해진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상상력과 유머 덕분에 패치는 자신의 룸메이트 루디를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었고 손가락이 네 개가 아니라 여덟 개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으며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비니를 집단 상담에서 주인공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의사는 아웃시키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다. 이때부터 상상력과 유머는 그에게 있어 삶의 태도이자 방식이 되어버린다. 한마디로 정체성, 신념 그 자체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그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자산이 된다. 상상력과 유머의 엄청난 효과를 알게 된 그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기도 하고 모든 것을 얻기도 한다. 상상력과 유머 이것을 바꿔 말하면 긍정과 낙관의 힘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는 의과대학에 들어가서도 변함이 없다. 룸메이트 미치를 보자마자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럼없이 썰렁한(?) 농담을 건네 상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가장 막역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트루먼과의 첫 만남에서는 '안녕 실험'을 보여줌으로서 본인의 괴짜 기질을 몸소 드러내 보이고 만다. 어차피 트루먼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너드과라서 서로 죽이 잘 맞는 편이다. '안녕 실험'은 계속되어.. 그의 장차 비운의 연인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마저리'라는 이름의 여성 당뇨병 환자로부터는 환한 미소와 함께 "안녕하세요!"라는 화답을 듣는다.
바로 이 부분을 언급하고 싶은데, 패치를 제외한 나머지 의사와 의대생들은 그녀를 당뇨병 환자라고 칭하지 인명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게 아니라 병명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어떻게 부르든 그게 뭐 대수냐고 말이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둘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놓여 있다. 여기에 녹아 있는 함의는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결정지어진다. 거꾸로도 가능하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상대에 대한 호칭을 결정한다. 가령 주인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가깝게 여기는 이들은 그를 가리켜 친근하게 '패치'라는 애칭으로 부르지만 반대로 그에 대해 싫어하고 거부감을 갖고 멀게 느끼는 이들은 '헌터'라는 본래의 딱딱한(?) 이름을 부른다. 전자는 친구 트루먼과 연인 캐린, 환자들, 간호사 졸레타와 주디, 의사 이튼, 정신병원 동료 루디와 아서 멘덜슨과 같은 사람들이고 후자에는 월컷 학장과 미치(나중에는 주인공과 친한 친구가 되지만 극중에서 단 한 번도 그가 주인공을 패치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가 있다. 단지 호칭을 통해서도 타자에 대한 심리적 거리와 관계적 친밀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패치는 진심으로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정성스럽게 헌신적으로 대하고 나머지는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은 거세한 채 환자를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대한다. 마치 자신들의 의사로서의 능력을 검증하고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 위한 일종의 수단, 도구로서 환자를 이용한다. 사실 이러한 작태는 영화 초반 월컷 학장의 연설로 이미 암시, 예견되었던 부분이다. 앞길 창창한 장래가 구만리 같은 미래의 의사들을 인간성(humanity)을 다 빼고 기계적으로 잘 훈련된 의술용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그릇된 신념. 그러니까 리더를 잘 만나야 한다. 이런 쓰레기 학장 밑에서 교육을 받으니 쓰레기 인재들만 배출이 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반면교사 하는 수밖에. 학장이 일개 의대생 1학년만도 못하니.
이제부터 패치와 월컷 학장의 본격적인 대립과 싸움이 시작된다. 얼핏 보기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패치 특유의 친화력과 선한 마음씨,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은 처음엔 그를 싫어하고 무시했던 이들마저 이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실로 놀라운 기적(?)을 발휘한다. 단 한 사람 월컷 학장을 제외하고는. 패치가 싸우는 상대는 단지 월컷 학장 한 사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거대한 권력, 시스템,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벌인다. 편견과 금기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낡은 관습과 대결을 펼친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몰상식과의 싸움이고 주류 기득권에 대한 반항이며 본질로 돌아가자는 인간성 회복의 주창이다. 가령 극중에서 상태가 심각하고 아픈 당뇨병 환자를 침대에 눕혀 놓고는 그 앞에서 소위 하얀 맨(박찬욱식 싸이보그적 표현)들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추태에 다름 아니다. 이름도 묻지도 부르지도 않아 그저 당뇨병으로 명명되는 환자는 이미 겁에 질려있는데 그 앞에서 하얀 맨들은 지들끼리만 너무도 진지하게 침을 튀기면서 온갖 의학 용어를 늘어놓으며 어느 부위를 절단해야 되고 항생제를 투여해야 되고 그런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하고 있다. 이건 기본적으로 환자 이전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환자의 이름을 물어봐주고 미소 지으면서 불러주는 패치는 그로선 너무나 상식적인 당연한 일을 했지만 그가 속한 그 세계에서는 낯설고 튀는 행동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로부터 또라이로 여겨지는 것이 몹시도 답답하고 억울하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정신병원에 있을 때조차도 받지 않았던 또라이 대우를 도리어 바깥세상에서 받게 됐다는 것. 정신병원에서 환자로 있을 때 그는 정상인처럼 보였고 병원에서 의사 지망생으로 있을 때는 비정상으로 비춰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단지 의술용 로봇이 되는 걸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가 스스로 광대이길 자처하는 것은 단지 환자의 병을 고쳐주는 것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서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죽음을 지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가 보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역할과 목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현재의 즐거움과 평안을 찾는 것. 카르페 디엠의 정신은 여기서도 발현된다. 현실은 그렇다. 상식이 현실에서도 인정을 받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없는 소수의 상식은 몰상식이 되고 힘 있는 다수의 몰상식은 상식이 되는 현실. 마치 정의가 곧 힘이 아니라 힘이 곧 정의가 되는 것처럼. 힘없는 정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하여 패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제 패치는 더 이상 다윗이 아니다. 해 볼 만한 싸움이다.
패치와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단짝 친구 트루먼, 처음엔 앙숙이었지만 친구가 되는 미치, 연인 캐린 그리고 캐린의 룸메이트 애덜레인. 사실은 미치가 너드에 가깝고 패치는 천재이자 괴짜에 속한다. 미치가 너드라는 논리의 설득력은 도서관 장면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고 두 번째는 패치를 향해 자신의 열등감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기숙사 방 장면과 패치가 떠나기 전 병원에서의 대화 장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방금 소개한 패치의 친구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그의 연인 캐린이다. 극중에서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건 그녀가 죽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충격적인 반전이자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슬프고 여운이 남는 동시에 느닷없는 죽음으로 인한 당혹감과 허탈감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죽는 모습을 영화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녀의 죽음이 비보로 알려지고 장례식 장면이 대신 삽입될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울컥했다. 특히나 패치가 생전에 캐린에게 미처 다 읽어 주지 못했던 사랑의 시를 마저 읽어 주는 대목에서 그랬다. 혹자는 캐린을 죽인 정신병자 래리를 무조건적으로 가해자라며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역시 똑같은 피해자다. 그가 그녀를 죽였고 분명 그것은 잘못된 행동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지만 그는 말 그대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고 평상시에도 자해를 일삼을 정도로 상처 많고 정서가 불안한 트라우마 가득한 여리고 아픈 영혼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 참 비극적인 현실. 그렇다면 캐린의 죽음은 패치가 평상시에 신념으로 가졌던 선함의 경박한 이론들 때문이었을까. 인간은 선하면서 악한 존재지. 선인과 악인이 따로 구별되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선인이 될 수 있고 악인이 될 수 있다. 한 개인은 선과 악이 공존하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달려 있겠지. 때로 이런 상황에서는 선이 나오고 저런 상황에서는 악이 나오고 또는 둘이 섞여서 나오기도 한다. 다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있다. 패치가 이상주의자라면 캐린은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어느 장면에서 캐린은 패치에게 경고한다. 이상주의의 위험성을.. 한계가 없는 삶이나 규칙을 깨는 것 따위는 너무나 낭만적인 이야기이며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음을.. 그런 캐린이 패치에게 점점 동화되어가고 캐린의 죽음은 패치를 선과 악의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인간의 선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드는 것. 이건 이상주의의 패배도 아니고 현실주의의 패배도 아니다. 단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고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거. 선과 이상을 추구했으나 악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가여운 피조물들의 가혹한 운명이라는 거.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고 죽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 인간에 대한 배신과 절망에 분노로 신에게 따져 묻고 체념으로 신을 등지려고 할 때 놀랍게도 그의 곁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 캐린이 송충이에서 나비로 부활하여 그에게로 온 것이다. 그토록 나비가 되고자 꿈꾸었으나 소심하고 나약한 상처 많은 영혼인 탓에 감히 꿈꾸지 못하고 송충이로 머물며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녀가 당당하게 허물을 벗고 화려한 나비로 환생한 것이다. 그것을 몸소 패치에게 증명해 보인다. 내가 지금 당신 곁에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날 놓아 달라고.. 그리고는 그의 곁을 떠나 자유롭게 하늘 위로 날아간다. 이내 환희의 미소를 머금고 웃음과 활기, 살아갈 의지를 되찾은 그는 다시금 사람에 대한 열정을 불 지핀다. 이것을 신학적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가. 난 휴머니즘으로 받아들였다. 덧붙여서 이러한 주인공의 심적 변화가 갑작스럽다거나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전환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면 마지막 법정 장면이라고 말하겠다. 패치의 연설이 장중하게 펼쳐지는데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이다. 울컥했다. 길이길이 남을 명연설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주옥같은 명대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그가 치료했던 병원의 아동 환자들이 휴회 시간에 갑자기 문을 열고 법정 안으로 들어와 다 같이 빨간 코를 부착한 채로 맨 뒤에 서서 주인공에게 말 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장면은 비록 할리우드식 장면 클리셰지만 감동적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면서 미국(할리우드)식 승리를 보여주는 쾌감과 전율의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더 감동적인 건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굳이 실화가 아니어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엔딩에서의 졸업식 장면은 일종의 확인 사살이다. 그야말로 쐐기를 박는다. 정말 말 그대로 유쾌 상쾌 통쾌. 마지막까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패치.
영화에서 인상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대사가 하나 등장한다. 정신병동에 있을 때 아서 멘덜슨이 패치의 네 손가락을 펴면서 그에게 몇 개가 보이냐고 물으며 했던 말.. "문제에 초점을 맞춰선 안 된다.. 그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다.. 나를 봐.." 이건 거의 선문답에 가까울 정도의 고난이도 철학을 내포한다. 즉 남들이 안 보는 것을 본다.. 타인들이 게으름과 권위에 대한 순종 때문에 보려하지 않는 것을 본다.. 다르게 본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상대를 보라는 것은 손가락이라는 문제에 얽매여 장님이 되지 말고 장애물을 뛰어넘어 그 너머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이는 대로.. 손가락이라는 그 문제가 너의 시야를 가리게 하지 말라는 것.. 사실 일반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통념으로만 봤을 땐 아서 멘덜슨의 논리와 주장은 그저 어느 미친 노인네의 헛소리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다분하다. 그는 정신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있고 패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그를 또라이로 치부했으니까. 패치 역시 아서의 방을 직접 방문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처럼 아서를 또라이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패치는 의문을 품었고 다른 이들과 달리 아서를 또라이로 단정 짓지 않았다. 거기서 그가 발견한 것은 다름(difference)이었다. 틀림(wrong)이 아니라. 사회가 일방적으로 주입한 의식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손가락이 네 개라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확신 어린 말투로 주장한다. 그와 반대편에서는 사회가 일방적으로 주입한 의식에서 탈출하여 자신만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로 손가락이 네 개가 아니라 여덟 개일 수도 있다는 소수자의 논리를 조그맣게 전달한다. 둘 중 누가 정신병자인가?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정신병자라는 게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정신병자들이다. 감히 누가 누구를 정신병자라고 함부로 규정한단 말인가. 앞서 언급했던 그들은 모두 또 다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환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물론 의사도 있고 간호사, 보호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패치와 그 노인네만 정상인이다. 육체는 정신병원에 묶여 있지만 영혼은 자유로왔던 두 사람. 이들만이 새로운 세계를 보았고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날 그곳에서 들려준 아서의 가르침은 훗날 패치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주며 그의 삶의 태도가 된다. 덕분에 그는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며 노골적인 경계와 혐오를 드러내는 월컷 학장의 협박에도 결코 기죽지 않고 가소롭다는 듯 마음껏 비웃을 수 있었고 거준트하이트 gesundheit(독일어로 '건강을 위하여'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무료 병원을 건립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남과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다른 언행을 하고 다른 길을 걸었다. 환자에게 병명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게 된 것도 아서의 영향이 컸다. 피상적인 외양만 보지 않고 사람의 본질과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세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영화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던 장면 하나를 소개하면, 의사 이튼이 습관적으로 어떤 환자를 가리켜 6번 침대라고 부르다가 패치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다시 정정하여 환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대목이 나온다. 이튼은 패치에게 전염되는 인간 군상 중 한 사람으로서 그는 패치를 통해 자신이 의대생이었을 때의 초심을 돌이키며 선한 자극을 받는 인물이고 패치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패치의 사람과 의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노력과 열정, 헌신은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가 뿌린 씨앗은 몇 배로 귀한 열매가 되어 돌아왔다. 패치라는 이름 자체가 기적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 의문점을 가져야할 것은(극중 월컷 학장의 어법을 그대로 인용) 패치라는 한 사람의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도전과 패기,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이 대체(?) 무엇을 변화시켰냐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가령 환자(사람)보다 병원의 절차를 절대적으로 우선시 생각하는 주객전도의 병원 시스템은 아직 그대로이지 않은가. 여기서 우린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영화가 실화라고는 하지만 허구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단순히 할리우드식 드라마투르기나 감동적 드라마 연출 탓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패치 아덤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애석하게도 그가 들었던 선의와 정의의 불꽃은 대한민국에까지는 번지지 못한 것 같다. 사실 현실적으로 패치 아덤스 같은 의사는 제도권 시스템 안에서는 길러지기 어렵다. 그는 시스템의 사생아다. 시스템은 언제나 낡고 고루하며 매뉴얼화되어 융통성이 떨어지고 획일화되어 공장의 제품처럼 의사들을 찍어낼 뿐이다. 현 시스템은 패치 아덤스 같은 의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은 그런 사람을 이단자로 낙인찍을 뿐이다. 한 개인이 독자적인 힘으로 패치 아덤스가 되려면 모험을 해야 하고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며 강한 용기를 내야 하고 가시밭길을 걷는 고통을 견뎌야만 한다. 이건 비단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회, 조직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는 시스템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노예들에 불과하다.
영화 곳곳에 유머가 녹아 있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언어유희에 관련한 농담 두 마디를 짧게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아서 멘덜슨이 패치에게 하는 조크다. 아서가 패치에게 무료 진료소 건물(허름한 집)을 빌려주자 어떤 놈이 아서를 쫓아다니며 계속 감 놔라 배 놔라하며 귀찮게 구는 것이다. 그러자 아서가 패치를 향해 "자네 항문학(proctology)에 대해 배운 거 있나?"라고 물으며 이 개자식(asshole) 좀 처리해 달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asshole은 항문이라는 일차적 의미가 있거든. 또 하나는 패치가 무료 진료소에서 막스(Marx) 형제의 영화를 보고 있는 어느 환자에게 "마르크스주의자(Marxist)라면 결코 잘못될 리가 없지"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코미디를 정치적으로 승화시키는 멋들어진 대사. 더 재밌는 사실은 그 대사를 로빈 윌리엄스가 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막스 형제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알아주던 유명 코미디 배우였거든.
모니카 포터는 솔직히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나 역시 이 영화에서 처음 봤다. 보자마자 인상에 남았던 건 그녀의 인상과 얼굴이었는데 다름 아닌 줄리아 로버츠와 너무도 흡사한 외모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거기다 목소리까지 비슷하다.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 아닐까 생각도 드는데, 적어도 이 영화만 놓고 보자면 연기력이 꽤 상당한 배우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라서 효용성 없는 말이겠지만 당시 그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를 만한 연기였다고 생각된다. 비록 연기에 대해선 과문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감정 연기가 절제되어 있으면서 풍부하고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금발임에도 이지적인 여성으로 느껴졌다. 처음엔 굉장히 차가운 인상을 받았는데 물론 영화 마지막까지도 차가운 인상은 지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그녀에게 감정 이입이 되고 어떤 연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패치 아담스>에는 비록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낯익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패치를 괴롭히는 역할로 등장하는 월컷 학장 역의 밥 건튼은 '쇼생크 탈출'에서는 주인공 팀 라빈즈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는 악덕 교도소장으로 열연했었다. 패치의 정신병동 룸메이트 루디를 연기한 마이클 지터는 '그린 마일'에서 감옥의 죄수로 등장했었고, 역시 동료 환자로 나오는 앨런 튜딕은 '28일 동안'에서는 재활원 환자로 출연했었다. 한 사람은 악역 전문이고 활동 반경도 병원과 교도소라는 비슷한 정서와 느낌의 공간이라는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그리고 학장과 소장이라는 직업(직책)도 유사하다. 또 한 사람은 갇혀 있는 거 전문. 역시 병원과 감옥(교도소)이라는 유사점이 있고 환자와 죄수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또 다른 한 사람 역시 갇혀 있는 거 전문이고 환자 전문이다. 재활원에서 정신병원으로 살짝 간판만 바뀌었을 뿐.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고정된 이미지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내가 봤을 때, 톰 섀디악은 훌륭한 감독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패치 아담스> 영화 하나만 놓고 봤을 때 그렇다. '브루스 올마이티'도 괜찮은 영화였고. 그의 작품들은 대개 코미디 영화가 주를 이루는데 특히나 원톱으로 극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재능 있는 코미디 배우와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짐 캐리, 로빈 윌리엄스, 에디 머피, 스티브 카렐이 그를 거쳐 간 배우들. 특히 짐 캐리와 작업을 가장 많이 했다. 누군가는 <패치 아담스>를 그저 흔하디흔한 할리우드의 뻔한 휴먼 코미디 영화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식상한 감동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난 그러한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과 정서적 파장이라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피상적인 감동이 아닌 것이다. 의외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다. 보편적인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그것이 진부하지가 않다. 더구나 나에게 이 영화는 좀 더 다른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패치 아담스>에는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배우가 출연한다. 로빈 윌리엄스와 필립 시모어 호프먼. 공교롭게도 둘 다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이 같은 영화에 출연을 했다는 것도 놀랍다. 그것도 서로 동료 의대생 역할로 말이다. 같이 등장하는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적어도 필립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로빈이 같이 등장을 한다. 둘이 동반으로 출연한 유일한 영화일 것이다. 필립 호프먼은 이 영화에서 생각보다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래도 중요한 역할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 로빈 윌리엄스를 돕는 역할이기도 하니까. 등장하는 장면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내공의 연기력은 거기서도 굵은 인장을 남긴다. 씬 스틸러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로부터 시작된 말일 것이다. 적은 비중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극의 전체 흐름과 무게 중심을 해치지 않고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상적인 흔적들을 남긴다. 특유의 웃음소리라든가 특유의 열변을 토해내는 장면이라든가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 특유의 제스처.. 표정.. 이 모든 게 너무 쉽게 이뤄지며 뚝딱뚝딱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낸다. 특히 이 영화에서 유독 남다르게 인상적으로 남는 부분은 필립의 연기가 다 끝나고 나면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고 항상 몇 초 정도 시간을 끈 다음에 넘어가더라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의도적인 연출일 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엔 그의 연기가 남긴 여진을 조금이라도 관객이 음미하게끔 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이건 마치 무성 영화처럼 대사 없이 무언의 어떤 표정과 제스처, 느낌, 아우라로 여백을 채우는 것과 같은 황홀경(?)에 가깝다.
단언컨대 패치 아덤스라는 역할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직 로빈 윌리엄스만이 제대로 완벽하게 소화 가능한 역할로서 이 캐릭터에 최적화된 배우는 역시 그밖에 없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나의 이런 주장에 수긍이 갈 것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역시 이런 (치료자) 역할에 제격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분명해 보인다. 2000년대 초반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잠시 외도했던 '인썸니아', '스토커'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체적으로 그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하고 훈훈하며 타인을 위무하고 치료하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영화를 통해 젊은이들의 멘토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그는 코미디와 드라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진귀한 배우다. 그의 입담은 천하의(?) 짐 캐리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언젠가 그가 토크 쇼에 출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번은 청중에게 스카프(?)를 달라고 하더니 그 소품 하나를 가지고는 다양하게 웃음의 소재를 변주하면서 사회자와 청중 모두를 완전히 포복절도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예전에 그래미 시상식에서 단골 사회자 배모씨가 그를 가리켜 정서가 불안한 양반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는 스크린 밖의 공식 석상에서는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통제 불능의 난리법석이랄까. 그 자신도 도저히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런 듯보였다. 그게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 우울증도 그러한 천재성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스크린에서는 아무래도 공동 작업이다 보니 작품과 역할의 성격에 맞게 제약되는 부분이 있어 그나마 절제된 모습이었고 그 바깥에서 그는 쉴 새 없는 엄청난 입담과 기이한 행동으로 시상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우리를 웃게 만들고 가슴 한켠을 훈훈하게 달구며 행복하게 했던 그가 사실은 외로움에 파묻혀 있었을 줄이야. 우리 앞에서는 웃기느라 웃고 있었지만 실은 남몰래 뒤에서 홀로 울음을 삼켜야 했던 나약하고 상처 깊은 여리고 아픈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떠나갔다. 사실 그가 작품 속에서 우리를 울렸던 건 뼛속까지 코미디언인 그가 드라마 연기를 선보일 때였다. 웃음 뒤에 감춰져 있던 진지함.. 상처.. 아픔.. 고통.. 우울.. 고독.. 외로움.. 그런 것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남을 위로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치료하는 역할을 도맡아왔지만 사실 그가 남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웃기도 하고 울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패치 아덤스는 로빈 윌리엄스 그 자신이다. 그는 우리에게 의사이고 선생님이며 상담사이고 아버지이며 친구였다. 패치 아덤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광대이길 자처했다. 여장을 하고(미세스 다웃파이어) 게이가 되고(버드케이지) 아이로 돌아가고(잭) 자폐아가 되고(하우스 오브 디) 로봇이 되었다(바이센테니얼 맨). 자기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웃음의 도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망가지는 연기를 우리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늘 품격과 격조를 잃지 않으면서 우리를 웃고 울렸다. 이참에 가감 없이 말한다. 난 그를 희대의 희극인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에 견주는 배우라고 확신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그들은 오래전에 고전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세계 영화사적으로 동시대 유일무이한 걸출한 코미디 배우로 우뚝 솟아나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기억될 것이다. 20세기 말과 2000년대를 넘어오며 현대적 의미에서 최고의 코미디언. 비범한 천재. 어린 시절에 물질적으론 부유했으나 늘 그 커다란 궁전 같은 집에서 외롭게 장난감(토이즈)하고만 놀던 아이와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우울증을 감추기 위한 '마스크'로 웃음을 택했던 아이. 어느덧 이 두 아이는 외로움과 상처, 아픔을 무기로 하여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배우가 되어있었다. 이들이 바로 로빈 윌리엄스와 짐 캐리다. 하지만 위대한 코미디언 짐 캐리도 더 위대한 코미디언 로빈 윌리엄스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로빈 윌리엄스는 다른 차원의 배우이니까. 아직까지 그를 뛰어넘을 코미디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잭 블랙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언감생심이다. 로빈 윌리엄스.. 흔히 애드립(ad lib)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 즉흥 연기의 원조 격이자 진정한 대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코미디 배우. 그는 분명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영원한 광대 그가 남긴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처음을 여는 그의 독백에서처럼 그 역시 삶의 귀가 길을 찾아 먼 길을 돌아 목표이자 목적지 집으로 돌아왔다. 영원으로 돌아갔다. 탄생과 죽음을 모두 껴안고.. 그를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립다. 굿바이 캡틴..
★★★★
세상은 문제다. 사람은 조금의 광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밧줄을 끊고 자유케 될 용기가 없다. - 니코스 카잔짜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