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Fargo

찰나21 2015. 8. 9. 21:49

 

 

 
  파고 (1996/미국,영국)


  장르 범죄, 드라마, 스릴러
  감독 조얼 코엔
  출연 프랜시스 맥도먼드, 윌리엄 H. 메이시,
          스티브 부셰미, 하브 프레스널,
피터 스토마리

 

줄거리

빚에 쪼들린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 런더가드는 자신의 아내를 납치하여 돈 많은 장인으로부터 몸값을 받아내는 계획을 세운다. 제리는 자동차 수리공 쉡을 통해 잡범 칼과 게어를 소개받는다. 폭설이 내리는 어느 겨울밤, 노스 더코타주 파고의 후미진 바에서 만난 제리와 칼과 게어. 제리는 범인들과 8만 달러의 몸값을 나눠 갖기로 하고 아내의 납치를 의뢰한다. 범인들에겐 회사에서 새로 출고한 밤색 씨에라 자동차까지 몰래 빌려준다. 납치범들은 제리의 아내 진을 납치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건이 엉뚱한 곳에서 뒤엉키기 시작한다. 진을 태우고 은신처로 향해 가던 범인들이 뜻하지 않게 고속도로에서 검문을 받게 된 것이다. 당황한 칼과 게어. 어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범행이 노출될까 두려워 한 게어의 총구가 경찰관을 향해 불을 뿜는다. 설상가상으로, 살인 현장을 목격한 지나가던 무고한 사람 둘을 쫓아가 그마저도 죽이고 만다. 한편, 경찰 마지가 미니애폴리스 근교에서 발생한 이 살인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마지는 만삭의 몸에 아침마다 자동차 시동을 거느라 남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여자 경찰관이나, 타고난 수사관이다. 마지는 눈 위에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과 살해당한 검문 경찰이 남긴 메모를 토대로 점차 사건의 실마리에 근접하고, 마침내 제리의 사무실에까지 찾아온다. 당황한 제리는 몸값만 빨리 챙겨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장인의 고집도 만만치 않다. 평소에도 사위 제리를 못 미더워했던 장인은 제리와 범인 사이에 얘기됐던 약속을 중간에 어기고 제리 대신 직접 협상하러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마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새하얀 눈밭의 도로 위를 안개를 뚫고 스크린으로 달려오는 차 한 대가 나타난다. 아니다. 두 대다. 뒤에 차 한 대를 더 싣고 달려온다. 곧이어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영화 타이틀이 검정색 글씨로 스크린 위에 새겨진다. 그리고 한 사내가 바에 도착한다. 그는 오프닝에서 차를 몰고 눈밭을 달렸던 장본인이다. 두꺼운 외투와 모자에는 눈서리가 조금 내려앉아있고 실내로 들어서자 모자를 벗는 사내. 그의 시야에 먼발치의 두 사내가 포착된다. 이내 두 사내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꺼내는 그. 뭔가 중요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긴밀하게 나누는 듯하다. 한 사내는 뭔지 모를 깊은(?) 사연을 지닌 듯하고 소심하고 나약해 보인다. 맞은편의 두 사내는 딱 봐도 태도가 거만하고 불량스러운 악당으로 보인다. 이들의 만남과 대화가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오프닝부터 예사롭지 않은 음악(메인 테마곡으로서 참고로 영화 내내 지겹게 반복된다)을 깔고 예사롭지 않은 타이틀을 달면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 <파고>라는 제목은 사전적인 의미는 크게 없지만 영화적인 의미로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노스 더코타에 있는 하나의 지명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첫 시작이자 사건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나눈 대화는 뭘까. '제리'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돈이 필요하다. 그는 '쉡'이라는 인디언 청년(?)의 소개로 두 사내(한 명은 예기치 않게 중간에 동업자로 끼어듦)를 알게 됐고 이들에게 자신의 아내를 납치해달라고 부탁한다. 납치해주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돈은 자신의 장인에게서 지급될 거라는 것. 제리가 받을 돈 역시 마찬가지.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스릴러다. 사건을 추적하고 추리해나가는 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퍼즐처럼 짜 맞추는 그런 짜릿한 재미는 영화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반전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황 또는 시추에이션에 따른 반전이지 '식스 센스'나 '메멘토'유의 역대급 반전과는 의미 자체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파고>는 서사와 캐릭터를 따라가는 영화이고 거기에 관객으로서 사회학적 또는 인문학적 시선을 곁들여서 결말까지 도달한다면 한층 더 영화적 재미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코엔 형제가 만들면 막장 드라마도 예술이 된다? 이 영화 <파고>는 막장 드라마 코드가 있다. 그러나 코엔은 일종의 막장 드라마 스토리를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로 승화시키는 재주를 발휘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대개 런타임이 짧다. 이 영화도 런타임이 100분이 채 안 된다. 유일하게 2시간이 넘는 런타임을 보유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이들의 모든 작품들은 대개 120분에 한참 못 미치거나 몇몇은 그것에 약간 모자란 런타임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사이즈를 부풀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일종의 미니멀리즘 방식으로 간결하게 핵심만 딱 전달하겠다는 거장의 소신을 피력하는 듯하다.

 

로케이션 선정에서도 감독의 뚝심이 묻어난다. 영화 오프닝에 자막으로 이 작품이 실화임을 공표하는 대목이 등장하긴 하지만, 내가 알기로 <파고>는 실화를 가장한 픽션이라고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미네소타에 있는 미니애폴리스로 설정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코엔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미국 북부 중서부에 위치한 그곳 미네소타 지역의 사투리가 빈번히 등장한다.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이라도 뭔가 기존의 미국 표준 영어와는 뭔가 억양이 다르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대답할 때 yeah가 아니라 yah를 사용하더라는 것. 황량하고 드넓은 중서부 거기에서도 북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 영화에서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서 각인되는 온 사방이 새하얀 눈으로 덮인 장엄한 풍경이 가능했다. 제리의 장인 웨이드가 TV로 아이스하키 경기를 시청하는 것도 그러한 지리적 특성의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코엔 형제는 멀쩡한 배우를 의도적으로 망가뜨려 우스꽝스럽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인 듯하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니컬러스 케이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의 조지 클루니 그리고 '번 애프터 리딩'의 브래드 피트가 바로 그 희생양(?)들이다. 기존에 그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희화화된 캐릭터로 배우의 재탄생을 이룩하는 작업을 스스로 즐기는 듯한 변태적(?) 감독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파고>에서는 어떤가? 여기서는 희생양(?)이 따로 발견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극중 이야기상으로는 인물의 희생양이 발견되지만). 라이언 거슬링의 덜떨어진 버전(여기서 보니 둘이 좀 닮았더라)이라 할 수 있는 피터 스토마리는 영화에서 잔악무도한 살인마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가 연기한 게어라는 인물은 악질 중의 악질이다. 영화 말미에 그가 동업자 칼을 분쇄기에 집어넣어 죽이는 장면은 사악함과 잔인함의 극치를 달린다. 분쇄기 주변의 하얀 눈밭이 붉은 피로 물드는 광경은 눈뜨고 보기가 굉장히 거북하다. 내가 볼 때, 그의 사악함과 잔혹함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쉽게 말해, 단순 무식함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게어는 언뜻 보기에 순진하고(특유의 멍 때리는 듯한 표정이라든지) 악의가 없어 보이는 얼굴을 지녔다. 바로 그것이 최적의 악당 요건이다. 일종의 악의 평범함이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악당은 험상궂은 얼굴에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하고 이마에 악당이라고 써 붙여져 있으며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를 거라는 식의 생각. 그게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짝패로 나오는 스티브 부셰미는 외모 상으로는 게어보다 악당에 더 가깝지만 상대적으로 그보다 덜(?) 잔인한 캐릭터로 나온다. 스티브 부셰미가 연기한 칼은 이빨이 세서 그렇지 사실은 겁 많고 소심한 찌질이 악당에 속한다. 한마디로 경박스럽다. 둘의 조합이 재밌다. 계집애처럼 수다스러운 말 많은 사내와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침묵과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답답한 사내.. 작은 키의 삐쩍 마른 놈과 덩치 큰 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쭈글탱이의 작고 추한 얼굴과 쾌남형의 큼지막한 귀염상의 얼굴.. 이처럼 아무리 봐도 공통점이라곤 찾기 힘든 상극의 조합이다. 다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서로의 목표가 같다는 것. 그것은 바로 돈이다. 이것이 이들이 짝패를 형성하는 유일한 요건이다. 이 영화에서 피터 스토마리의 캐릭터는 흡사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빌리 밥 돈튼을 연상시킨다. 전자는 영화에서 조연 캐릭터이고 후자는 주인공 캐릭터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무표정한 포커페이스와 침묵의 사도와 같은 일종의 자폐적(?) 캐릭터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게어와 칼이 그랬던 것처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도 말 없는 캐릭터와 말 많은 캐릭터의 대비를 보여준다. 코엔 형제의 페르소나이기도 하지만 이런 수다스럽고 찌질하고 루저틱한 악당 역에 스티브 부셰미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또 누가 있겠나. 아무래도 특출 나게(?) 남다른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특이한 목소리가 한몫 단단히 한다고 봐야지. 개성파 배우로서 그는 이 영화에서 누구보다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가령 광활한 땅을 가진 미국의 지리적 특성 탓에 장거리 운전에 지친 칼이 조수석에 그저 편안히 앉아 창문도 안 열어놓고 줄담배만 계속 피워대며 가끔 응석받이 애처럼 배고프다고 투정이나 해대고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어를 향해 답답함과 지루함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기도 말을 안 하겠다고 일종의 보이콧 선언을 하더니 어쩔 수 없이 계속 또 수다스럽게 말을 하고야 마는 장면은 무거운 주제의 이 영화에서 드물게 유머러스한 대목이다. 참고로 코엔 형제는 기존에 작업했던 배우들과 다시 작업하는 것을 즐기는데(아무래도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신뢰감 때문이겠지) 특히나 스티브 부셰미는 현재까지 코엔 형제의 영화에 가장 많은 출연을 한 배우로 기록되고 있다. 그를 제외하고도 코엔의 페르소나는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파트너는 뭐니 뭐니 해도 형 조얼 코엔의 부인이자 이 영화의 헤로인 프랜시스 맥도먼드. 페르소나보다는 뮤즈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은데, 그녀 역시 남편의 영화에 다수 출연을 했다. 인상적인 건, <파고>에서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영화 시작한지 약 30분이 지나서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분량은 중반부부터 엔딩까지이다.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로 그녀는 그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가 오스카 수상감이라고 보기엔 임팩트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형편없는 연기는 아니었고 꽤 괜찮은 연기였으며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못생겼지만 나름 매력적으로 나온다. 경찰이라는 역할을 창의적으로 해석한 시도도 엿보인다. 무엇보다 영화의 묵직함과 진지함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 밝은 생기를 불어넣으며 무게감을 조금은 덜어주는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재밌게도 그녀가 맡은 역할이 경찰인데 하필(?) 임산부여서 걸음걸이도 뒤뚱뒤뚱하고 제리를 심문하는 장면에서도 몸이 무거워서 앉아서 얘기해도 되냐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모습은 그녀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 하나. 코엔은 왜 마지라는 캐릭터를 임산부로 설정했을까.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생각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그렇게 설정한 거다. 작가가 영화에서 어떤 부분을 설정하거나 연출할 때 늘 의미를 심어두는 것은 아니니까. 의도를 가지고 했다 하더라도 의미는 없을 수 있으며 의도가 없었는데 의미가 발생할 수도 있다. 거기서 의미라고 할 때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수용자의 몫이 되겠지. 더구나 코엔 형제는 쿨한 스타일이라 생각되기에 우리가 그의 영화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심오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파고드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또는 그들이 워낙에 천재들이라서 우리들로 하여금 무의미를 의미로 착각하게 만드는 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주인공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촬영 당시 임신 중이어서 그것을 빙자하여 영화적 설정으로 그냥 밀어 붙인 건지도 모르지. 결국 영화는 엔딩에서 남편이 그녀의 볼록한 배를 만지며 "두 달 남았네"라고 말하고 그녀가 미소 지으며 똑같이 "두 달 남았네"라고 화답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 또한 의미는 없다. 다만 영화 중간에도 게어의 도로변 살인 장면 바로 뒤에 테마곡이 흐르면서 그녀의 가정으로 카메라가 옮겨갔듯 소란스럽고 추잡했던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편안하게 침대에 이들 부부가 나란히 누워 또 하나의 생명과 함께 하게 될 앞으로의 더 단란한 미래를 꿈꾸는 평화롭고 안락한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상반된 대비 효과와 함께 가족으로의 회귀를 역설하는 것이다.

 

스티브 부셰미만큼이나 우스꽝스런 외모의 소유자 윌리엄 H. 메이시는 이 영화에서 모든 사건의 시작이고 원흉이다. 생긴 것만큼이나 비겁하고 비굴하며 한심하고 찌질한 루저로 등장한다. 그가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철없고 한마디로 병신 같다. 진짜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인간으로 나온다. 고객을 상대로 돈 더 받아내려고 꼼수 쓰다 걸려 욕 뒤지게 얻어먹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바로 고개 숙이고, 돈 때문에 차를 담보로 내놨다가 차량번호 대라며 독촉 당하고 대지 않으면 법적 소송 걸겠다는 협박 전화나 받고 악당의 터무니없는 무리한 요구에도 시종일관 질질 끌려 다니는.. 이래저래 여기저기 치이는 불쌍한 인생. 동시에 누구보다도 사악한 인물이다. 그깟 돈 때문에 악당에게 마누라를 납치해달라고 부탁하고 장인이 부자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로부터 돈을 뜯어내려하고.. 결국 평상시 사위를 신임하지 못했던 장인은 직접 돈 가방을 들고 납치범과 협상하러 갔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제리에겐 마누라이자 장인에겐 딸인 진 역시 돈과 상관없이 죽임을 당한다. 결국 제리로 인해 여섯 명의 목숨이 떨어져나갔다. 제리가 직접적으로 그들을 살해한 건 아니지만 간접살인을 한건 맞다. 거기(희생자 명단)에는 사건과 직접적 연관도 없는 어느 경찰과 지나가는 차량의 커플로 보이는 남녀도 있고 심지어 사건을 모의한 납치범 칼(엄밀히 말하면 희생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도 포함된다. 왜? 뭣 땜에? 그 놈의 빌어먹을 돈 때문에. 돈에 눈이 먼 우둔하고 어리석은 한 놈의 인간 때문에. 모두를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게 자본주의의 비극이고 그늘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철학자 강신주가 그랬지. 자본주의가 존립하는 상황에서 유괴 문제를 없애 봐라. 없앨 수 있겠나? 자본주의가 없었으면 유괴 문제가 생겼겠느냐고. 물론 유괴라는 행위 자체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고 패악질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을 무조건적으로 한 개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 부분도 간과할 수 없기에 사회가 스스로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괴나 납치의 본질은 처음엔 돈이지만 결국 살인으로 끝맺는다. 돈을 갖든 못 갖든 잃든 말든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영화에서는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특히나 주인공 마지는 틈만 나면 목구녕으로 뭔가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남편과 다정하게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나눠 먹고 뷔페에선 큰 접시에 음식을 수북이 담아 맛있게 쩝쩝대며 동료 경찰에게 권하기까지 한다. 그녀에겐 경찰이라는 자신의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게 먹는 거다. 사건 현장에서도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그녀는 사건을 위해 묵은 호텔에 가서도 동료 경찰에게 전화로 근처 맛집을 소개받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일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먹으며 절대 끼니를 거르는 법이 없다. 심지어 영화 속 그녀의 첫 등장은 남편과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이다(참고로 이 장면 압권이다. 남편은 마지가 남긴 것마저 먹어 치우며 식사를 계속 하고 있고 마지는 차 시동을 걸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이 장면을 별도의 후반 작업 없이 오로지 카메라와 공간의 힘만으로 분할 화면의 구도로 절묘하게 한 프레임에 담으면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장면 연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비범한 장면이라 하겠다). 비단 주인공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 제리가 악당들에게 마누라 납치를 부탁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그가 장인과 저녁 식사를 하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리고 악당 게어는 차를 타고 가면서 파트너 칼에게 팬케이크 먹고 싶다며 배고프다고 투덜댄다. 왜 그럴까? 이것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코엔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제리의 직업을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설정한 것도 단지 우연은 아니리라 짐작한다. 먹는 장면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제리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장인이 아이스하키 경기 시청 삼매경에 빠진 장면이었다. 그리고 게어와 칼은 모텔에서 매춘부들과 섹스를 한 후 텔레비전을 보며 휴식(?)을 취하고 제리의 마누라를 납치해서 모셔다(?) 놓은 어느 폐가에서 칼은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면서 짜증을 낸다. 영화 말미에 게어가 칼을 분쇄기에 넣어 죽이기 전에 한 일도 텔레비전 시청이었다. 심지어 영화는 마지와 남편이 다정히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으로 엔딩을 맺는다.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한 단면으로서 등장한 부분들이다. 즉 소비의 문화. 결국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코엔의 초기작에서부터 크든 작든 진지하든 웃기든 간에 줄기차게 계속되어왔던 문제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리조나 유괴사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다 그 범주에 놓여있는 작품들이 아닐까.

 

<파고>에서 가장 특이할만한 인물은 마이크 야나기타가 아닐까. 갑자기 플롯에 끼어들었지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쑥 들어와 이내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인물. 뭔가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다. 일종의 맥거핀이다. '바톤 핑크'에서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까지도 끝내 열어보지 않던 의문의 상자처럼 말이다. 야나기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설정된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 역할을 맡은 배우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말이 나와서 얘긴데 영화를 보면 동양인과 인디언에 대한 무지와 편견, 비하가 눈에 띈다. 왜 납치범을 주선해주는 인물이 인디언으로 설정된 걸까.. 그리고 인디언은 원래 그렇게 난폭한가? 아시안에 대해선 더 끔찍하다. 이 영화에서 야나기타라는 인물은 소심하고 경박스러운 정서불안의 사이코패스 스토커쯤으로 묘사된다. 또 '시리어스 맨'에서는 한국인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 이쯤 되면 코엔 형제의 레이시즘을 의심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결말 부분에서 마지가 빙판 위로 달아나는 게어를 향해 총으로 쏴서 넘어뜨리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인상적인 촬영 구도와 배경음악과 함께 장중하면서 어떤 거대함을 느끼게 하는 소름 돋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은 정말 예술이다. 영화의 분위기와 정서, 내용과 잘 어우러진다.

 

(IMDB 평점 기준으로) 코엔 형제의 대표작 세 편을 꼽으라면 '위대한 레보스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이 영화 <파고>를 들 수 있겠다. 내 생각에 코엔의 영화는 썩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엄지를 치켜올릴 만큼의 확신은 이상하게 들지 않는다. 분명 독창적이고 남다른 연출로 작품의 완성도가 있고 나름의 곱씹는 재미와 매력도 있다고 여겨지지만 뭔가 몇 프로 부족한 느낌을 매번 지울 수가 없다. 이들의 영화가 비교적 볼만은 하지만 뭔가 탁 치고 올라오는 게 없다는 느낌이랄까. 뭔가 그냥 가슴 속에 잔잔하게 일렁이는 정도? 그럼에도 천재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연출에 있어서는 타고난 재질이 있는 듯.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영화는 결코 대중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극도로 절제된 연출이 대중성을 갉아먹는 원흉인지도.

 

전에 씨네 21의 김혜리가 코엔 형제의 영화에 대해 했던 코멘트가 있다.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서사는, 코엔의 데뷔작 '분노의 저격자'부터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심지어 코엔의 영화 세계를 한 줄로 요약하면 "되는 일이 없다"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인물들이 고비마다 잘못된 패를 뽑는 이야기도 있고 모두가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더하면 엉뚱한 합이 나오기도 한다. 개별 영화의 골조는 이 영점 회귀가 얼마의 간격으로 어떻게 배치돼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그의 영화를 다 보진 않았지만 본거에 한해서 말할 때 동의가 되는 부분인 것 같다. 이 영화만 하더라도 "되는 게 없다"는 코엔의 영화 세계에 정확히 부합한다. 일이 꼬이고 꼬여 그것이 연쇄사슬처럼 이어져서 종국엔 걷잡을 수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그렇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그렇다. '바톤 핑크'는 모호한 엔딩에다 주인공이 죽거나 하진 않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리조나 유괴사건'은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파국으로 갈뻔한 설상가상의 플롯이었다. 잘해보려고 하면 일이 꼬이고.. 의도와는 전혀 반대의 양상으로 결과가 나타나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상황이 끼어들고 뭐 그런 식. 그의 영화는 그래서 블랙 코미디적 성격이 짙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돈에 눈이 멀어 추악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던 제리, 칼, 게어 모두 비극을 맞이한다. 이들 중 누구도 돈을 손에 넣지 못했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제리와 게어는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됐고 칼은 동료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어차피 자업자득이다. 특히 칼은 파트너 게어를 속이고 혼자서 돈 가방과 제리가 선물한(?) 씨에라를 전부 차지하려 했으니. 욕심과 탐욕, 이기심이 부른 비극이다. 이 사건으로 모두 여섯 명의 목숨이 달아났다. 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세 사람과 관련자 세 사람. 사실 자업자득이란 말은 제리의 마누라와 장인에게도 적용된다. 한마디로 제리의 마누라는 무지했고 장인은 오만했다. 그것이 제리로 하여금 그러한 범행을 부추기고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 됐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집착하고 기생하며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고 발버둥치는 인물들은 모두 공멸한다. 그 바깥에서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본주의의 추악한 내부를 들여다보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는 주인공 마지다. 그럼에도 결말에서 마지가 경찰차 뒷좌석에 정신줄 놓은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는 게어에게 "이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어.. 그걸 몰라? 그깟 돈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가"라고 훈계(?)하는 장면은 그저 허공의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지금 이 사회의 현실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 말이므로. 모두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애썼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모든 걸 허공에 날린 채 비극으로 수렴되는 결론. 혹 코엔 형제는 니힐리스트가 아닐까. 그렇게 하필 날씨 좋은 날 그들은 경찰차에 끌려가고 비극은 마무리된다. 칼이 눈 속에 파묻은 돈 가방은 영원히 그 드넓은 눈밭 한복판에 파묻혀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엉뚱한 누군가의 몫이 될 테고. 그럼 그는 외치겠지. 유레카!

 

새하얀 설원에서 붉은 피는 강렬한 색깔로서 더욱 도드라지고 사건은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며 드넓은 눈밭으로도 진실을 덮거나 감추지는 못하리라. 순결은 피로 적시고 죗값은 대속하지 못한다. 보혈의 십자가를 지고 떠나는 이 누가 있겠나. 결국 죗값을 치르고야마는 그들. 거기에 무엇이 묻혀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원히..

 

 

★★★

포스터가 영화를 다 말해준다. 제목처럼 그들은 Far go.. 너무 멀리 갔다. 코엔의 영화를 단 한 단어로 축약하면 '아이러니'가 되겠다. 이들에게 도착점은 이미 정해져있고 거기로 향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아이러니의 톱니바퀴가 있을 뿐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제삼자든 영화 속 그들 모두가 자본주의의 희생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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