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Bagdad Cafe

찰나21 2015. 9. 27. 22:49

 

 

 
 
 
  바그다드 까페 (1987/서독,미국)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퍼시 애들론
  출연 마리아나 제거브레히트, CCH 파운더, 잭 팰런스

 

줄거리

관광 여행 도중 부부 싸움으로 남편과 헤어져 사막 한가운데에 내려버린 야스민은 정처 없이 걷다가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바그다드 까페'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 모텔의 주인 브렌다도 남편을 방금 내쫓는 참이었다. 야스민은 브렌다가 운영하는 이 모텔에 투숙하게 되고 브렌다는 야스민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던 중 브렌다는 야스민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가고 거기서 우연히 남성용 옷들과 이상한(?) 물건들을 보고서는 야스민을 수상하게 여기며 전화로 보안관을 부른다. 그러나 야스민은 손님으로써 문제될 만한 게 없었고 브렌다는 야스민에게 뭐 하나라도 트집 잡으려고 안달이 나있다. 브렌다에게 야스민은 눈엣가시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다 일이 터진다. 브렌다가 시내에 장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야스민이 사무실을 대청소한 것이다. 미친 듯 성내는 브렌다를 피해 방안에 들어온 야스민의 위안은 선물 받은 마술세트다. 야스민에 대한 브렌다의 적대감은 자신의 아이들마저 야스민에게 뺏겨 버렸다는 심리적 박탈감까지 더해져 극에 달하고 급기야는 야스민에게 모텔에서 나가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런 악랄한 대우에도 화는커녕 순진하게 눈물을 내보이는 야스민을 보고 브렌다는 야스민에게 처음으로 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진솔한 속내를 드러낸다. 이제 야스민은 브렌다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카페 손님에게 우연히 마술을 보여준 것을 계기로 용기를 내서 계속 마술을 하기 시작한다. 카페는 마술을 구경하러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고 그렇게 이들의 관계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쯤 야스민의 비자 만기 날짜는 훌쩍 넘어가고 야스민과 브렌다의 작별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야 마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의 두 남녀가 등장한다. 근데 둘 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인다. 분명한 건 젊은 커플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보아하니 라스베이거스에서 막 결혼식을 올리고 여행을 하는 도중 캘리포니아 사막에 도착한 듯하다.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관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말(심지어 자막도 안 나온다)로 서로 다툰다. 한눈에 봐도 남자는 멍청하고 찌질해 보인다. 남루한 행색의 작고 깡마르며 머리가 반쯤은 벗겨진 쫌생이처럼 생긴 이 남자는 여자에게 마치 시비라도 걸듯 짓궂게 행동하는데 그 모양새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 여자는 엄청난 거구에다 시원시원한 얼굴에 순진하고 둔해 보인다. 어쨌거나 둘 다 멍청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건 마찬가지. 상극이고 대조를 이루면서 서로 닮아있기도 한 두 사람. 결국 남자의 짓궂은 장난(?)에 참다못한 여자는 남자를 떠난다. 여자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로 바닥 위에 짐 가방을 끌며 덥고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바그다드 까페>라는 타이틀이 뜨고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 'Calling You'가 흘러나온다. 참고로 영화 내내 지겹게 들을 수 있다. 여자는 묵묵히 사막의 도로 위를 힘겹게(?) 걷고 있고 나치 추종자(차 안에서 트는 음악이 그런 풍인데다 하는 행동거지 역시 극우 꼴통스러운 데가 있다)로 보이는 남자는 혼자 차를 몰고 가다 모래 먼지가 풀풀 날리는 어느 황량한 곳에 위치한 주유소 앞에 차를 세우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영화 제목이기도 한 바그다드 까페다. 정확히는 바그다드 주유소 까페(Bagdad Gas Oil Cafe). 영화 제목으로는 좀 기니까 간명하게 줄여서 <바그다드 까페>로 정한 듯.

 

제목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돌이켜보면 오래전 내 기억으로는 다분히 이국적인 냄새가 나는 이 영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감히(?)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짐작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한 흑인 여자(CCH 파운더)가 황량한 사막 같은 색감의 배경을 뒤로 하고 쓸쓸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포스터에서 받았던 느낌 역시 그랬다. 당연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떠올렸었지.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어 영화라는 사실을. 재밌게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가 그랬다.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텍사스를 차례로 가리키는 제목이라고 확신(?)했으나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텍사스 주에 있는 Paris(패리스)를 아울러 지칭하는 지명이었다는 걸. 어느 병신 같은 수입업자가 영화도 안 보고 제멋대로 제목을 정했나 보다. Paris를 불어식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어처구니없는 처참한(?) 결과가 벌어지고 만 것. 사실 불어식이라면 정확히는 빠리가 돼야겠지만 보통 파리라고 많이 하니까. 놀랍게도 이 영화 역시 <바그다드 까페>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이 아닌 독일 감독이 미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어 영화이다. 결국 또 귀결되는 건 미국. 참고로 미국은 다른 나라에 있는 지명들을 그대로 갖다 쓰거나 약간 변형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간단하게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면, 뉴올리언즈(New Orleans)는 과거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서 프랑스의 도시 오를레앙(Orleans)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에서의 '바그다드'는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에 위치한 어느 주유소 카페 이름이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으로 보이는 흑인 여자가 등장한다. 이름은 브렌다. 그녀의 남편은 부인의 잔소리와 등쌀에 기가 질려버려 그녀를 떠난다. 정확히 말하면, 떠나는 척한다. 솔직히 내가 남편 입장이었어도 떠났겠다.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누군들 그 옆에 남아있겠나. 물론 나라면 그딴 년은 아예 만나지도 않는다. 뭐 사실 남편이 속 터질 정도로 찌질하고 못나 보이긴 했다. 떠남은 동시에 새로운 만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남편이 떠나자 다른 누군가가 찾아온다. 오프닝에서 그 거구의 독일 여자. 이름은 (독일식으로) 야스민. 방금 남편을 떠나보내고 사무실 앞 허름한 소파에 혼자 기대어 앉아 눈물범벅이 된 채로 슬픔에 잠겨있는 브렌다 앞에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곰 같은 야스민이 떡하니 나타난다. 야스민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 사이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이에 응수하듯 브렌다 역시 손수건을 꺼내 눈물 자국을 닦아낸다. 손수건과 손수건의 만남. 눈물범벅과 땀범벅의 액체끼리의 만남. 각각의 다른 성분의 물줄기가 이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마치 끈적끈적한 땀과 눈물처럼 이들의 관계도 그리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듯.. 말하자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한 유대 관계의 형성이 이들 사이에 이뤄질 것임을 미리 말해주는 것이다. 동시에 둘 다 방금 막 남편과의 이별을 고하고 홀로 된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이들의 관계가 동병상련의 내러티브를 띨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차이점이 있다면 브렌다(CCH 파운더)는 남편이 떠난 경우이고 야스민(마리아나[영어식으론 매리앤] 제거브레히트)은 본인이 떠난 경우라는 것 정도. 어쨌거나 출신 배경과 인종(여기서 갑자기 '비밀과 거짓말'에서 브렌다 블레신과 매리앤 진-뱁티스트의 조합이 연상된다), 성격 모두 다 다르지만 오로지(?) 공통점이라면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 남겨졌다는 비슷한 사연을 지닌 두 여성의 만남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설정에서 우리는 영화 <바그다드 까페>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영화는 퀴어 무비이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남자 캐릭터를 그리는지를 보면 된다. 가령 주인공 야스민과 브렌다의 남편들은 거의 저능아 수준의 찌질함과 무능력함을 몸소 발산한다. 차이점이라면 야스민은 남편이 아내를 못 살게 구는 형태이고 브렌다의 경우는 그 반대라는 것. 야스민을 스토킹(?)하는 콕스는 또 어떤가. 인디언과 카우보이, 히피를 각각 조금씩 섞어 놓은 듯한 아우라의 이 인물은 어딘지 이상하고 엉뚱하며 별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일단 외양과 차림새부터가 그렇다. 심하게 얘기하면, 약간 맛이 간(?) 노인네랄까. 카페의 유일한 남자 직원은 뭔가 미스터리어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종의 자폐적 캐릭터에 가까우며 브렌다의 아들이자 어린 나이에 벌써 아이를 낳아버린 살로모는 아이는 돌보지도 않고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 죽치고 앉아 엄마 브렌다의 눈칫밥을 먹으며 주구장창 피아노 건반만 두드린다. 카페에 오는 남자 손님들 역시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 이들은 여자나 밝히고 문신이나 새기며 크래커 좀 달라고 애처럼 보채는 멍청한 마초들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남성이란 존재는 한심한 루저로 그려질 뿐이다. 남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는 돋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여성은 선하고 순수하며 강인하다. 활동적이면서 독립적이고 매력적이며 깨어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마치 진보의 실현은 여성 공동체에서 이뤄진다는 명제일까. 너무 거창한가. 야스민과 브렌다 이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브렌다와 야스민이 동맹을 이루는 건 아니다. 브렌다는 야스민에 대한 무시와 혐오,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지나치게 과하다 할 정도의 폭언과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마구 족친다. 비단 브렌다만이 아니다. 심지어 나이가 한참 어린 브렌다의 아들 살로모와 딸 필리스도 야스민을 무시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모욕하기는 마찬가지. 그런 그들에게 야스민은 어마어마한 포용력을 발휘한다.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모욕을 안긴 그들을 다 끌어안는 것이다. 그것은 기적을 부른다. 야스민은 브렌다의 가족이 된다. 사실 여기가 튀는 부분에 해당되는데, 감정 해소가 너무나 쉽고 급작스럽게 이뤄진다. 그렇게 깊이 쌓여있던 앙금이 그리도 쉽게 눈 녹듯 사라진단 말인가. 브렌다가 야스민에게 갑작스럽게 마음을 여는 부분이 못내 당혹스럽게 느껴졌던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3분의 2도 더 지난 시점에서 어느새 브렌다라는 인물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었다. 천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캐릭터와 플롯의 급작스런 변화는 왠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이다. 뭔가 갑자기 점프한 느낌 혹은 건너뛴 느낌이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태연하게 은근슬쩍 캐릭터를 변화시키니 어리둥절할 뿐. 중간에 브릿지 씬이라도 넣었어야 했다. 야스민에게 갖는 브렌다의 심경의 변화에 따른 태도 변화를 점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느끼는 충격을 최소화했어야 했다.

 

 

사실 편집도 썩 매끄럽지 못하다. 소위 말해서 튄다. 전반적으로 옛날 영화의 느낌이 확실히 난다. 그건 배경이나 주인공의 의상이나 패션 그런 부분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영화의 만듦새가 그렇다. 중간 중간에 알 수 없는 상징적인 컷들을 뜬금없이 삽입해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낡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 전개나 장면 전개도 진부한 편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너무 평이하다. 다분히 소박한 주제의 이야기인데 문제는 그것이 밋밋하단 거. 그게 연출력의 한계다. 안일하게 밀고 나간 게 아닌가 싶다. 상당수가 이 영화의 감동을 운운하며 최고의 영화로 칭송하길 주저하지 않는데 난 그것이 명백한 과대평가라고 확신한다. 내가 보기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동은 지극히 얕은 감동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진짜 오리지널 천사는 야스민이지. 뭐 이런 캐릭터가 다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아무리 그녀의 타고난 천성이라고 해도 이건 리얼리티가 너무 떨어진다. 손님이 자기 방을 직접 청소를 하질 않나.. 심지어 모텔 주인 브렌다의 사무실을 손님인 그녀가 말끔히 정리정돈하며 깨끗이 청소를 한다. 거의 봉사 활동 수준이다. 그런 배려와 희생에도 야스민은 브렌다로부터 언감생심 고맙단 인사는커녕 갖은 막말과 폭언, 협박과 같은 모욕을 듣는다. 이 바보 같이 순진해 빠진 인물은 그러한 하대에 서러움이 복받치면서도 단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대들거나 저항하거나 분노를 표출하기는커녕 짜증조차 내지 않는다. 브렌다의 말마따나 주인의 눈치를 보고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손님이라니.. 그것도 고객으로서 기본적인 대접조차 못 받는 상황에서. 주객전도.. 적반하장.. 안하무인. 야스민은 브렌다가 쓸데없는 의심으로 다분히 악의적으로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며 경찰에 신고했을 때에도 억울해하기는커녕 예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소와 다름없는 친절로 브렌다를 대한다. 그럼에도 브렌다는 계속해서 야스민을 힐난하고 들들 볶는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야스민의 정성과 노력은 통했는지 최종적으로 주인 브렌다마저 감동시키며 주변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이쯤 되면 거의 테레사 수녀급이다. 이건 사실 비아냥거림에 가깝고 야스민에 대해서는 영화 사상 거의 유례가 드문(?) 속 터질 정도로 답답한 캐릭터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모래바람이 잔뜩 휘날리는 사막 외진 곳에 위치하여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을씨년스런 분위기에다 한눈에 딱 봐도 당장이라도 바람에 날려 쓰러지거나 무너질 것만 같은 싸구려 허접한 모텔이다. 게다가 위생은 불청결하고 서비스도 개떡이다. 불친절하고 싸가지 없는 주인은 미친 사냥개마냥 닥치는 대로 아무나 물어뜯는 습성으로 주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근데 뭘 망설이나? 나 같으면 공짜로 있으라고 해도 주인에게 개욕을 하고 당장 나온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마술의 등장이다. 야스민은 영화 후반부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다름 아닌 그녀는 마술사였던 것이다. 여기서 야스민에 대한 카페 식구들의 어이없는 의심과 오해(남성용 옷과 이상한 물건들만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가 풀린다. 그럼 왜 감독은 극중에서 마술을 등장시킨 것일까? 팍팍한 현실에서 일종의 탈출구 또는 해방구의 역할을 하는 도구로서 그것을 등장시킨 게 아닐까. 그것은 현실 속의 작은 판타지를 영화에 심어놓는 계기가 된다. 잠시나마 우리를 판타지(꿈)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야스민은 마술사로서의 본색을 드러내며 카페에서 손님들을 끌어 모으는 일종의 광대 역할을 자임하며 매출(?)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야스민의 비자가 만기 날짜를 넘어서며 그녀는 고향 독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야스민과 브렌다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렇게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던 카페에는 어느새 침울함과 정적만이 감돈다. 그제야 카페 식구들은 야스민의 공백을 크게 절감하기에 이른다. 그게 끝? 만약 그랬다면 영화는 완전히 망했겠지. 아직 이 영화의 감동 포인트가 남아 있다. 야스민이 떠난 후로부터의 시간의 경과는 알 수 없으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영영 못 볼 것만 같았던 야스민이 오프닝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그다드 카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야스민에게도 자신을 반겨주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 또 하나는 오프닝에서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던 그녀가 엔딩에서 귀환할 때에는 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변화를 말해줌과 동시에 플롯상의 분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관객에게도 극중 카페 식구들에게도) 미지의 존재이자 미스터리한 존재이고 침울하고 의기소침한 면이 두드러졌던 야스민이 마지막에는 그러한 어둡고 부정적인 내면을 극복하고 활기차고 밝은 기운으로 바뀌어지며 신비주의의 틀을 깨고 모두에게 알려진 존재가 된다. 주변 모두를 환하게 비춰주는 치유의 전도사로 기능하게 된 것. 마녀(철저하게 브렌다의 시선)에서 천사(브렌다와 관객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로의 변화.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 확실히 영화도 전반부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다가 후반부로 가면 밝고 화사한 분위기(중간에 야스민이 카페를 떠날 때 잠깐 우중충해지기도 하지만)로 바뀐다. 어쩌면 야스민의 변화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오프닝에서 남편을 차버리고 홀로 먼(?) 길을 떠나왔을 때부터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수동성을 거부하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보수성을 극복하고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의 한 블록을 허문다. 그것은 분명 한 여성으로서 과단성 있고 용기 있는 선택이며 그녀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여성상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말해준다. 그녀는 콕스가 그림으로 그려준 환영을 문신으로 새기는 파격적인 변신을 통해서도 여성(인간)으로서의 적극성을 드러내며 자유로운 영혼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마침내 엔딩에 이르러서는 브렌다와의 협업으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엄청난 발전과 성장, 진보를 이룩한 것이다. 야스민은 브렌다와 감격적인 재회를 나누고 두 사람은 카페에 모인 관객들 앞에서 화려한 마술쇼 공연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서로 입맞춤까지 한다. 이것은 이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두 사람이 사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종의 레즈비어니즘. 동시에 공적으로도 이들은 찰떡궁합의 환상적인 파트너이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브렌다에게 야스민은 복덩어리인 것이다. 황량한 사막 외진 곳에 있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카페에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아까 본론에서 난 이 영화를 퀴어 무비 그리고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한다고 했다. 그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를 대자면, 엔딩 바로 직전에 브렌다는 남편 살을 다시 만나지만 두 사람은 포옹만 할 뿐이다. 감독은 이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구태여 보여주지 않고 건너뛰어 버린다. 물론 키스를 안 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감독이 이 두 사람이 키스를 하려던 찰나 야스민이 나오는 다음 장면으로 재빨리 이야기를 넘겨 버렸다는 것이다. 엔딩에서의 야스민도 마찬가지. 자신과 결혼하면 영구적으로 미국에 거주할 수 있다는 콕스의 달콤한 제안(다분히 야스민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뻔하디 뻔한 야심 가득한(?) 명분으로 삼은 것이지만)에 야스민은 솔깃하면서도 그녀의 대답은 브렌다와 상의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정확히 그 지점에서 영화는 끝난다. 왜 야스민은 자신의 결혼을(그러니까 본인과 관련하여 자신의 인생행로가 달려있는 중차대한 문제인 결혼에 대해) 브렌다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한 걸까. 이러한 부분들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야스민과 브렌다의 퀴어 코드를 확실히 못 박는 대목이라 하겠다. 결국 둘만의 여성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의미로서의 페미니즘. 물론 브렌다와 남편 살이 재결합하고 야스민과 콕스가 결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한들 야스민과 브렌다의 퀴어 코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야스민과 브렌다는 한 몸이다. 크게 보면 브렌다의 혈연적 가족과 카페 식구들로 대변되는 비혈연적 가족 더 넓게는 카페 손님들까지 이들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범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양판 '가족의 탄생'이랄까. 일종의 대안적 가족.

 

이 영화가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공간적으로 거의 한 공간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바그다드 카페라는 하나의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 공간적으로는 미니멀리즘이라고 해도 좋을 이러한 방식은 저예산 영화가 가진 경제적인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저예산 독립 영화의 느낌은 촬영 구도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오프닝과 몇몇 장면에서 등장한 사선으로 삐딱하게 잡은 카메라 구도를 들 수 있다. 나름 신선하고 맘에 들었다. 보통의 메이저 영화에서 주로 구사되는 올곧은 정직한 촬영 구도의 틀을 깨는 그러한 방식의 카메라 구도. 이런 게 일종의 인디 스피릿 아니겠나.

 

CCH 파운더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흑인 특유의 소울이 가득한 감성적이고 펄떡거리는 본능에 충실한 연기.. 동물적인 연기. 그녀의 얼굴에서 문득 권해효가 비쳐졌다. 좀 닮은 듯했다. 사실 영화 거의 끝부분 좁아터진 카페를 가득 메운 관객들을 앞에 두고서 브렌다가 야스민과 같이 쇼타임을 선보이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면에서는 그녀가 얼굴도 예쁜 배우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화장을 하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옷을 차려입으니 완전히 달라 보이더군.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했다. 왜 이 배우가 뜨지 못했는지 의아했을 정도로. 반면에 주인공을 맡은 마리아나 제거브레히트는 연기가 어색하고 어설픈 느낌이었다. 이 둘은 완전히 상반된 두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다. 브렌다는 뜨겁고 격정적이며 불꽃 같이 타오르며 자신을 연소시키는 인물에 가까운데 반해 야스민은 차분하고 온화하게 그 열기를 식혀주고 가라앉혀 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에 상통하는 것이다.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되니까. 브렌다는 야스민을 만나면서 불같은 성격이 차분해지고 선한 영혼으로 바뀌며 야스민은 브렌다를 통해서 밝고 능동적인 캐릭터로 변화되며 뭔가 알을 깨고 나온 자유로운 영혼이 된 듯하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야스민이 처음에 바그다드 모텔 방에 투숙하기 위해 브렌다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브렌다는 그녀를 야스민이 아니라 미국식으로 자즈민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변방의 불화. 그러다가 어느새 그녀는 모두에게서 야스민으로 인식된다. 미국과 변방의 공존. 이것은 대단한 변화이다. 비로소 그녀가 브렌다(미국)의 가족의 일원이 됐음을 상징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야스민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대했다. 여기에는 미국식 우월주의도 내포되어 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너도 여기 와서는 우리 문화에 흡수되어야만 해"라고 이 순진무구한 영혼을 가진 거구의 유럽 여성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즈민으로 불릴 때 그녀는 미국에 동화되지 못했으나 야스민으로 불리면서 미국에 동화되더라는 것. 더 고무적인 것은, 모두가 편리성을 이유로 야스민이라고 이름(first name)으로만 부를 때 유일하게 콕스만이 야스민과 재회하는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발음하기 너무도 길고 까다로운 성(last name)으로 그녀를 불러 주더란 말이다. 그 역시 처음엔 같은 이유로 다른 이들처럼 그녀를 야스민이라고 불렀었다. 이런 게 바로 연인 관계의 특수성이지. 할배의 그 노력 참으로 가상하도다. 콕스의 야스민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야스민 역시 콕스의 정성과 노력에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두 사람의 관계의 획기적인 진전을 말해주는 징표다. 급기야 엔딩에 이르면 두 사람은 결혼을 이야기하는 단계까지 진입한다. 어쨌거나 마리아나 제거브레히트의 연기는 비록 CCH 파운더의 압도적인 연기에 파운딩(!) 당하듯 완전히(?) 눌린 기세인 듯 하지만 특유의 외양만큼은 이 영화에서 상징성을 가지며 깊이 각인된다. 외모와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순진무구한 감성적인 매력이 어설픈 연기력을 커버해 주는 효과를 낳은 게 아닐까 생각됐다. 잭 팰런스는 좀 어리둥절한 캐릭터로 나온다. 처음엔 주인공들의 주변을 맴돌고 배회하면서 가시권 밖에 놓여 있는 인물인 듯했으나 차츰 비중 있는 중요 인물로 부각되더니 어느새 주인공 바로 옆에 자리하며 극의 중심에 들어와 안착한다.

 

사족, 극중에서 살로모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은 바흐의 음악이다. 그의 시선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사진 속 주인공도 바흐이다. 재밌는 사실은 살로모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흐의 고향이 독일이라는 사실. 야스민의 고향과 같다. 공간적으로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과 독일의 바흐 음악은 왠지 모르게 불일치와 부조화의 느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재밌는 팁 하나, <바그다드 까페>의 독일에서의 개봉 제목은 Out of Rosenheim. 로젠하임은 야스민이 떠나온 고향을 말하며 제목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화 초반 소품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보온통에 새겨진 이름이기도 하다. 참고로 영화 속 콕스의 트레일러는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아마 카페도 그럴 것이다. 할리우드의 위대함. 보존 능력이 거세된 우리 같으면 개발 논리에 입각해서 문화고 예술이고 나발이고 벌써 뜯어 버리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을 텐데 말이지. 영화에서처럼 카페 너머 멀리 건너편에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철길 위로 기차가 지나다닌다.

 

 

★★

브렌다가 야스민처럼 마술을 터득하게 된 순간은 드디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고 한몸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바그다드 카페 안은 하나의 판타지의 세계로 가득찬다. 판타지 세계에 갇혀있을 때는 모른다.. 그 바깥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판타지가 곧 절망임을.. 그건 마치 신기루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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