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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 앤 데드 (1995/미국,일본) 장르 액션, 스릴러, 서부극 감독 샘 레이미 출연 섀런 스톤, 진 해크맨, 러슬 크로우, 토빈 벨, 로버츠 블라섬, 케빈 콘웨이,키스 데이비드, 랜스 헨릭슨, 팻 힝글, 올리비아 버넷, 마크 분 주니어, 페이 매스터슨, 레이너 샤인, 우디 스트로드, 제리 스윈들, 게리 시니즈, 리어나르도 디카프리오 |
줄거리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인이 말을 타고 리뎀션 마을에 나타난다. 헤러드의 통치하에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악마 같은 독재자 헤러드는 마을 사람들이 버는 돈의 반 이상을 착취하고 모든 악당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한다. 헤러드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고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 년에 한 번씩 거액의 상금을 미끼로 목숨을 건 총 쏘기 시합을 벌인다. 이 시합을 통해 훗날 자기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총잡이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옥 같은 이곳의 통치자, 아버지의 원수 헤러드의 심장을 겨누기 위해 대회에 참가한다. 한편 헤러드는 범죄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성직자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옛 심복 코트를 이 살육의 전쟁터로 끌고 와 다시 살인의 세계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면서 강제로 시합에 참가시킨다. 시합이 거듭되면서 그녀와 코트는 의기투합하게 되고 헤러드는 잔혹함의 강도를 더욱 높이며 두 사람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압박을 가하는데.. 그녀의 헤러드를 향한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되면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저 멀리서 천천히 말을 타고 점처럼 다가오는 한 사내가 보인다. 아니, 여자다. 그녀는 황금을 채취하려고 열심히 땅을 파는 한 사내(추측컨대 당시 '골드 러쉬'의 여파를 풍자한 장면으로서 시대를 녹여낸 시도가 엿보임)로부터 습격을 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곧 역습을 가하고 그를 쇠사슬로 묶어 꼼짝 못하게 하더니 모자까지 바꿔치기하며 홀연히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원, 속죄라는 뜻의 '리뎀션' 마을. 무엇을 속죄하려는 걸까.. 정작 그녀가 다다른 '리뎀션' 마을은 구원과 속죄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구원을 받는 것도 구원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곳.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무법지대. 법이라는 것이 통용되지 않고 모든 게 힘에 의해 지배되는 살벌한 전쟁터. 오직 한 사람, 절대자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움직여지고 다스려지는 작은 파쇼 국가. 그곳은 관 장수도 따로 있다. 영화에서 살벌하고 충격적이라고 느꼈던 장면 중 하나가 주인공 섀런 스톤이 처음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한 흑인 노인이 그녀에게 "177 cm 맞지?"라고 묻는 대목이었다. 풀어서 말하면, 어차피 당신 곧 죽을 텐데(더군다나 여자이고) 내가 당신이 들어갈 관을 미리 만들어 놓을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의미이다. 소름 돋나?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진정 소름 돋는 건, 파쇼든 관 장수든 이와 같은 것들이 지금 우리 주변 가까운 현실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거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체들이 나뒹굴고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도 침묵한다. 마치 영화 속 리뎀션 마을 주민들처럼. 모두가 침묵에 길들여지고 익숙한 세상. 바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자신을 창녀라고 여기는 바텐더(물론 남성이다)를 혼쭐을 내준다.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바텐더의 어린 딸 케이티가 마을의 통치자 헤러드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또라이 유진 드레드(공교롭게도 진 해크맨과 퍼스트 네임이 똑같은 것으로 보아 헤러드의 분신임을 암시하는 캐릭터인 듯)의 창녀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녀는 힘없는 부녀(케이티와 바텐더 호러스)를 대신해 총을 든다. 그리곤 드레드에게 총을 겨눠 죽음을 선사하는 복수를 감행한다. 사실 이것은 시합의 일환이기도 하다. 총 빨리 쏘기 시합. 사적 복수와 공적 시합의 맞물림으로 인한 생존적 승리.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던 그녀는 입에 시가를 문 채 능숙하게 말을 몰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총을 뽑아 사람을 죽인다. 그녀도 이 죽음의 시합의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레이디'라는 이름으로(그것도 유일한 여성 참가자로).. 하긴 그녀 말고도 애칭 혹은 닉네임의 참가자들이 수두룩하다. 미국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지. 물론 그녀에게도 이름은 있다.. 진짜 이름.. 엘렌. 그러나 그곳, 리뎀션 마을에서 그녀는 레이디('킬 빌'의 유마 서먼이 맡았던 역할 '더 브라이드'가 연상됨)로 불린다. 간혹 서부 영화나 무협 영화에서 흔히 무명.. nameless..로 통칭되는 인물들 있지 않은가. 뭔지 모르게 무게를 잡고 고독을 씹으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간직한 듯 묘한 아우라를 뿜어내면서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외로운 총잡이 혹은 자객. 일종의 신비주의적 캐릭터. 영화 속 레이디도 그러하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여성판 클린트 이스트우드랄까.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이 인물은 초반엔 베일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으나 시합이 거듭될수록 비밀의 조각들을 하나하나씩 꺼내 보이며 감추어진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미스터리(혹은 스릴러) 구조를 띄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는 사실이다. 서부극은 가장 미국적인(할리우드적인) 장르이고 가장 영화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술적인 부분은 잘은 모르지만, 시네마스코프로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장르이며 비주얼적 쾌감의 극치를 맛보기에 완벽한 장르라고 생각된다. 장르적 쾌감도 상당하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장르. 다만 일반적으로 시대적 배경이 19세기 후반과 같이 옛날인데다 공간적으로도 남부가 주요 배경이다 보니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담길 수밖에 없는 장르가 또한 웨스턴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파시즘을 근간으로 한다. 이 영화 <퀵 앤 데드>에서 주인공 여성에게 그 누구도 그녀의 실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묻지도 않으며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애당초 부를 의사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비공식적 연인(?) 코트만이 그녀의 실명을 불러준다. 그를 제외한 모두는 그녀의 이름을 익사시킨 채 '레이디'라고 통칭해서 부른다. 이것은 그녀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극우적인 폐쇄성과 무지한 남성 우월주의적 의식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극중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키드가 제시 제임스를 언급한 것으로 봐서 19세기 중반 혹은 후반쯤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것으로 유추된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앳된 꽃미남의 얄쌍하고 야리야리한 디카프리오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당시로선 남자 배우들 중에서도 한창 떠오르는 핫한 별이었고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한 주인공 섀런 스톤의 사심(?) 가득한 강력 추천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 영화 출연에 대해 후회했다는데.. 아무래도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평가와 결과가 좋지 않았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긴 '타이타닉' 출연에 대해서도 후회 발언을 했을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까탈스런 배우인지 짐작된다. 다수는 그의 이런 발언에 대해 배터지는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퀵 앤 데드>에서 리오는 생각보다 비중이 상대적으로 상당히 적었고 연기도 마지막 죽는 장면 외에는 별다른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연기는 좋았다. 임팩트가 적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에 관해선 기대가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띄엄띄엄(?)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확실히 그는 눈에 띈다. 강렬하진 않아도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마력이 있다. 특히나 평상시엔 재기 발랄하다가 아버지 앞에만 서면 이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그런 미묘한(?) 변화의 연기가 역시 탁월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지금과는 판이하게 홀쭉하고 샤프하며 확실히 젊어 보이는 러슬 크로우도 만날 수 있다. 하긴 무려 20년 전 영화니까 당연한 변화라고 봐야지. 내가 알기로 이 작품이 그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알다시피 그전까지 그는 주로 호주에서 활동을 하던 배우였다. 재밌는 건, 리오와 러슬 두 사람의 인연인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정확히 13년 만에 '바디 오브 라이즈'로 더 이상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당당하게 재회한다. <퀵 앤 데드>에서 주인공 섀런 스톤의 연기는 괜찮았고 나름의 연기 변신(그전에 출연했던 '원초적 본능'에서의 이미지를 특히나 떠올려 본다면)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 외모와 몸매가 워낙 훌륭해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꽤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퀵 앤 데드>는 진 해크맨과 러슬 크로우의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놀라운 건, 러슬 크로우인데 당시 그는 적어도 할리우드에서는 무명에 가까웠고 앞서 언급했던 다른 세 배우들과 비교하여 네임 밸류가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었음에도 엄청난 화면 장악력을 보여주며 굉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기라성 같은 관록의 대배우 진 해크맨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페이스를 잃지 않으며 당당하고 꿋꿋하게 해낸다. 놀라웠다. 타고난 배우다. 존재만으로도 연기가 되는 무시무시한 배우. '인사이더'에서는 상대 배우 알 파치노를 압도하는 연기라는 평을 얻었고 'LA 컨피덴셜'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해 미친 존재감을 뽐냈던 그였다. 제2의 말런 브랜도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이제는 그런 수식어조차 필요 없는 배우가 되었고 제2의 러슬 크로우라는 수식어가 누군가에게 대물림되는 시대가 되었다. 진 해크맨의 출연은 어떤 의미에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재미를 본 터라 이 영화 <퀵 앤 데드>에서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노렸을 게 분명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또 한 번 서부극이란 장르에서 악역으로 출연한 것. 비록 오스카 영광의 재현도 이루지 못하고 앞서 언급한 바대로 비평과 흥행 면에서도 참패를 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지금은 나이가 워낙 많아 더스틴 호프먼과 마찬가지로 끝물에 접어들어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듯하지만 당시로선 그 나이대 배우들 중에서 연기라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에 속했다. 특히나 (마스크도 그렇고) 악역을 잘 소화하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그러한 연유들로 볼 때 이 영화에서의 헤러드 역은 일찌감치 진 해크맨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전통적인 악역을 정통 연기로 선보인다.
사실 <퀵 앤 데드>는 과소평가된 영화다. 일단 너무 재밌다. 흥미진진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몰입도가 상당한 영화다. 완성도 역시 꽤 높다고 생각한다. 결코 졸작이라고 치부되고 무시될 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얘기다. 걸작이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수작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지만 샘 레이미의 연출이 돋보인다. 장면 연출이 특히나 인상적인데, 키드와 헤러드의 대결에서 보여지는 줌 인 트랙 아웃(그 유명한 'Jaws'의 한 장면) 기법.. 카메라 앵글을 사선으로 삐뚤게 잡음으로서 통상적으로 정해진 구도와 형식의 틀을 깨는 용감하고 자유로운 시도.. 필요할 때 과감히 들어가는 클로즈업 샷으로 감정의 몰입도를 확실히 키워주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결은 런타임의 효율성과 스피디한 전개를 위해 과단성 있게 하나의 창의적이고 재미난 몽타주 씬으로 묶어 한 번에 깔끔하게 처리하는 센스.. 독창적인 연출과 편집, 카메라 워크, 재기 발랄한 장면 구성이 낳은 결과물이다. 샘 레이미의 영상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서 좋다. 필름의 느낌이 묻어나서 좋다. 쉬운 예로, 비주얼적인 면만 봤을 때 그가 만든 '스파이더 맨' 시리즈가 입체적이고 필름의 따뜻한 질감이 느껴지며 아날로그의 고전적 향취라면 상대적으로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평면적이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디지털 감성이 배어 있다고 판단된다. <퀵 앤 데드>에는 알게 모르게 샘 레이미의 인장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원색의 강렬한 느낌을 발산하는데 특히 총싸움에서의 장면 연출은 카툰적이다. 거기엔 장난기마저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스파이더 맨'이 연상된다. 총을 쐈는데 머리에 구멍이 난다거나 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에선 '드래그 미 투 헬'이 떠오른다. 샘 레이미가 누군가. 지금도 컬트 영화로 추앙받고 기깔나는 데뷔작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당시로선 획기적이고 실험적이었던 혁명(?)에 가까운 영화 'The Evil Dead'를 만든 감독이다. 이것은 그의 뿌리와 정체성을 말해주는데 기본적으로 그는 B 무비의 세례를 받았고 B급 정신을 영화적 DNA로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 같은 블록버스터를 연출하고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메인스트림의 상업 영화를 만든다 해도 그의 B급 정신과 B급 감성이 어디 가겠나. 어떻게든 그의 안에서 비집고 나와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가 투영되기 마련이다. 물론 빅 버젯의 상업 영화일수록 그것이 상당 부분 희석되고 거세되는 결과를 초래하긴 하겠지만. 이 영화 <퀵 앤 데드>도 상업 영화이다. 그럼에도 때때로 장면 장면에 묻어나는 스타일을 통해 감독의 근원을 추적해볼 수 있다. 그건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샘 레이미와 같은 인디 작가 출신의 감독들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즐긴다. 속칭, 드래그 뎀 투 더 머니. 최근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제임스 건이 그러한 케이스. 괜히 그럴 리는 없고 당연히 이유가 존재한다. 인디 작가 출신이 만든 블록버스터나 메인스트림 영화는 기존의 주류 상업 영화와는 차별화된 결과물을 내놓을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좀 더 입체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데 유용하다. 원래부터 태생적 주류였던 마이클 베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단세포 영화들과는 다른 뭔가가 그들의 영화에는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디와 주류의 외줄타기를 하면서 그 둘을 절묘하게 배합시켜 희한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생각하는 블록버스터, 철학적 블록버스터라는 것은 말 그대로 형용모순의 대치되는 조합으로서 성립 자체가 안 되는 등식이었다. 놀런의 '다크 나이트'를 보라. 예술의 경지에 이른 진중하고 묵시록적인 성찰적 블록버스터를 만날 수 있다. '본' 시리즈는 또 어떤가. 첩보 영화의 수준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때론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가졌지만 인디적인 것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 잘못된 배합으로 이도 저도 아닌 기이한 블록버스터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노아'가 그런 경우 아닐까.
'용서받지 못한 자'가 수정주의 웨스턴이라면 <퀵 앤 데드>는 정통 웨스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영화 <퀵 앤 데드>는 정통 서부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비록 권선징악의 낡은 이분법적 구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마치 고전 서부극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여성 총잡이를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점이 이채롭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기존에 서부극이 가진 문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덕분에 보편적인 재미는 확실히 달성했다. 장면 장면이 강렬하고 장면 전환이 훌륭하다. 임팩트 있는 장면들이 중간 중간에 끼어있어 몰입도를 높여준다. 엘렌이 헤러드와 마을 사람들의 악랄하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모습에 환멸과 회의를 느껴 홀연히 말을 타고 마을을 떠날 때 키드가 그녀를 향해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외치는 장면은 왠지 그 유명한 'Shane'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분명 의도된 연출로서 오마주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그녀는 미련 없이(?) 말을 타고 떠나는데 갑자기 저 먼발치에서 고요한 정적을 깨고 총성 한 방이 울린다. 그것은 코트가 총 빨리 쏘기 대결에서 낸 소리였다. 그녀는 놀란 듯 잠시 뒤돌아보더니 이내 이골이 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다시 고갤 돌려 제 갈 길을 간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총을 든 원초적 본능.. 마초가 된 페미니스트.. 그게 다 복수 때문이다. <퀵 앤 데드>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영화의 골자이기도 하다. 다분히 서구적 특히나 미국적인 가치관. 남성(가해자 또는 학살자)을 쓰러뜨리고 제거하기 위해 남성이 되어야만 하는 여성..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남성이 되어야만 남성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 부드러움(여성성)으로는 이길 수 없고 오직 터프함(남성성)만이 악마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천명한 현실적 선택. 그래서 그녀는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고 총을 든다. 테스토스테론으로 완전 무장. 그 때문인지 예기치 않게 퀴어 코드가 형성되기도 한다. 엘렌과 케이티. 상호적인 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케이티가 엘렌에게 달라붙는 모양새.
제목 the quick and the dead는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뜻이다. 산 자는 누구이고 죽은 자는 누구인가. 엘렌이 산 자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죽은 자일까?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엘렌이 헤러드를 향해 말한다. 네가 내 인생을 앗아갔다고. 의사 월러스는 엘렌에게 "그날 이후로 넌 죽어있었어. 넌 삶을 더 두려워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죽었지만 그녀는 정신적으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죽음이 그녀를 살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헤러드를 향한 복수심이 지금의 그녀의 삶을 이끈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그 주위를 맴돌며 그녀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지배해 왔다. 영원히 그러겠지. 그녀가 붙들고 있는 한. 그럼 리뎀션 마을 주민들은? 산 자일까? 깨어있지 못한 자 모두 죽은 자로다. 헤러드 역시 죽은 자이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현재를 저당 잡힌 불쌍한 존재. 마지막에 가서는 물리적으로도 죽은 자가 되지만. 반면 코트는 비록 어두운 과거를 가진 죄인이고 그들로부터 짐승만도 못한 노예 대접을 받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 산 자라고 봐야할 것이다. 코트가 헤러드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인격적 모욕과 수치,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고 양손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고난을 겪는 모습은 흡사 그리스도의 수난 the passion of the christ 을 연상케 한다. 코트의 직업이 목사(주의 어른(?) 양)라는 것도 그렇고 그가 한때 죄를 저질렀으나 회개하여 소위 개과천선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러한 비유를 뒷받침한다. 반대로 코트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인물 헤러드는 사탄을 의미한다. 헤러드는 코트가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졌던 그늘진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기를 원하여 예전의 피 맛을 상기시키며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유혹한다.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본다. 대결을 해야 되는데 총이 없는 코트에게 헤러드는 지극한 배려(?)로 고작 싸구려 허접한 총을 선물한다. 이때 키드가 총을 하나씩 소개하며 약실을 돌리는데 코트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내 코트에게 총을 만져보라며 던져주는데 받자마자 그는 마치 타짜가 화투 패를 잡았을 때처럼 총수일체(銃手一體)가 되어 신들린 듯한 솜씨로 묘기에 가깝게 총을 이리저리 자유자재로 돌린다. 목사도 사람이다. 꾀임에 넘어가고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상한 신념 따위야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코트는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고 결국엔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이상보다는 생존을 택한 것. 그렇다고 이상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잠시 유예한 것뿐. 엘렌 역시 마찬가지. 이상을 위해 죽음을 택한다. 사즉생의 각오로. 잠시 동안만 삶을 유보한다. 그녀는 목사도 범죄자도 아니지만 오직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피를 묻혀야만 했다. 정의 실현의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피도 묻혀야 했다. 결국 코트는 엘렌에 의해 마을의 구원자가 되고 새로운 통치자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부활. 노예에서 지도자로 급격한 신분 상승. 결론적으로 이상과 현실 모두 쟁취.
나는 헤러드가 진 해크맨의 살벌한 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화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가장 악랄하고 무자비한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함이 이루 말할 데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잔혹함은 비열함과 졸렬함에서 나온다.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프고 울컥했던 대목은 키드의 죽음이었다. 끝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는 키드. 죽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더니 바로 앞에 서있는 아버지를 향해 위로 손을 뻗어 보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리오의 연기가 워낙 훌륭해서 더 울컥했던 인상적인 장면인데, 여기서 헤러드는 자식을 죽여 놓고도 슬퍼하기는커녕 끝까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변명과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뻔뻔함과 모르쇠로 일관하며 잔혹함의 극을 달린다. 농부의 아들이라고 비하하면서 자식의 죽음마저 외면한다. 그의 극악무도함은 엘렌의 보안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에서 최고조에 다다른다. 만약 그가 엘렌의 아버지를 직접 죽였다면 영화적으로 일반적인 악당에 속했을 것이다. 문제는 어린 여자 아이 엘렌에게 총을 쥐게 하고 그 총으로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여우같이 교묘한 술수로 자신은 일종의 간접 살인자로 한 발 물러나는 비겁한 책임 면피를 보여주면서. 딸을 아버지 죽음의 직접적 가해자·살인자로 만든 것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한순간에 패륜적인 존속 살인범이 되었다. 비열함과 잔혹함의 극치다. 그 순간 딸이 느꼈을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죄책감과 억울함, 분노였다. 비록 그것이 실수였다 할지라도. 자식으로서 느껴야 하는 최소한의 슬픔마저 빼앗아 버리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그녀에게 안겼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어찌됐든 그러나 그것은 강요되고 방조된 살인이었다는 점. 헤러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딸이 아버지를 구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설령 아버지를 구했다 하더라도 헤러드는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것은 총싸움에서 마음만 먹으면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멋대로 룰을 바꾸는 그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차피 보안관은 죽을 목숨이니 밑져야 본전으로 아버지의 생사를 딸에게 맡김으로서 딸의 인생마저 완전히 앗아갔다. 쉽게 말해서 그는 이들 부녀를 테스트한 것이다. 부녀 관계를 시험했던 것. 이 둘의 신뢰와 사랑을 가늠하려 했고 그것을 이용해 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든 것. 천하의 잔인하고 몹쓸 짓이다. 영화 초반에 엘렌이 헤러드에 의해 밧줄에 목이 매달린 코트를 총으로 쏴 구해주는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과거 자신이 아버지에게 의도치 않게 저질렀던 오류를 여기선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채를 조금이나마 덜었다고나 할까. 겁 많고 여리고 나약했던 소녀는 어느새 숙녀(레이디)가 되어있었다. 겁에 질려 울던 소녀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그녀는 껍질을 깨고 나왔으며 거칠게 없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헤러드는 동일한 방법으로 엘렌을 다시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번엔 연인(?) 관계를 시험한다. 숙녀는 어린 시절 소녀와 다시 마주한다. 이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재밌게도 만찬 장면에서 헤러드가 엘렌에게 겁주려고 써먹었던 말이기도 함). 헤러드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마침내 레이디(숙녀)는 소녀를 극복하고 독재자를 처단한다. 역시 독재자의 최후는 장렬한 죽음이다. 얼마나 통쾌하던지. 이쯤 되면 아버지에 대한 부채를 온전히(?) 갚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헤러드는 마치 자신이 조물주인 것처럼 군다. 마을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내키는 대로 흔든다. 늘 의심에 가득차서 자기에게 도발하거나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그 사람은 바로 제거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경계하면서 폭력을 통해 공포를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마을 주민들을 통제해나간다. 전형적인 독재자의 퍼스낼리티. 사실 제거 대상은 독재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철학자 강모씨가 말했었지. DJ의 패착은 전두환을 죽이지 않은 것이다. 누가 독재자를 용서하고 면죄하며 살려 놓았는가. 결론적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도 독재의 사슬을 끊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에 레이디가 쏜 총으로 헤러드의 몸 정중앙에 구멍이 나고 그 사이로 빛이 투과되는 장면은 이제 마을에 빛이 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둠을 잘라먹고 광명의 빛줄기가 쏟아진다. 비로소 이름 그대로 리뎀션 마을이 된 것. 그리고 그들의 구원자 Messiah 는 바로 코트다. 엔딩에서 레이디는 마을에 정의가 돌아왔다고 선언하며 그들의 미래를 코트에게 맡긴 채 말을 타고 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심장에 가두었던 아버지를 놓아준다. 그녀가 구원한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
성경에서 유대의 왕 헤롯(헤러드)은 그리스도(코트)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유아(리뎀션 주민들)를 모조리 죽인 폭정을 일삼은 인물. 그는 정의의 상징 보안관과 성조기를 총으로 쏴 정의를 짓밟으며 불의가 횡행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헤롯은 죽고 그리스도는 부활한다. 이게 우리의 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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