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The Natural

찰나21 2015. 5. 3. 20:14

 

 

 
 
 
  내츄럴 (1984/미국)


  장르 드라마, 스포츠
  감독 배리 레빈슨
  출연 로버트 레드퍼드, 로버트 두발, 글렌 클로즈,
          킴 베이싱어, 윌퍼드 브림리,
바바라 허쉬,
          로버트 프로스키, 리처드 판스워스

 

줄거리

야구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로이 합스는 시카고 컵스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자 애인 아이리스에게 잠시 동안(?)의 이별을 통보하고 고향을 떠난다. 그러나 기차에서 만난 해리엇이라는 미모의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호텔방으로 갔던 로이는 그녀가 쏜 총에 맞아 야구를 할 수 없게 된다. 16년 후, 30대 중반의 늦깎이 나이로 최하위 구단 뉴욕 나이츠에 입단한 로이는 그를 신통치 않게 여기는 감독에게 보란 듯이 그의 배트 '원더 보이'를 휘두르며 팀을 연전연승으로 이끌어 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로이의 맹활약. 야구계는 로이의 등장으로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 아이리스와의 재회로 다시 탄력을 받아 컨디션 회복에 성공하며 물오른 타격감을 과시한다. 그러나 뉴욕 나이츠 구단을 인수하려던 판사의 계략에 빠져 그는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는다. 설상가상으로 과거 총격 사건의 여파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돋아난 상처가 재발하여 로이의 발목을 잡는데..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의를 지킬 것인가 이기적인 생존을 택할 것인가.. 로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경기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바야흐로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오늘 소개할 영화 <내츄럴>은 바로 그 야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무려 30년 전(정확히는 31년 전) 영화다. 확실히 80년대 오래된 영화의 느낌이 있다. 한마디로 촌스럽다. 이것은 단지 영상에서 느껴지는 촌스러움이라기보다 영화의 형식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 이 영화는 별다른 기교도 없이 오직 드라마의 힘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내러티브를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양념이나 조미료는 첨가하지 않고 무공해 영화임을 내세우는 듯하다. 특히나 21세기를 지나 요즘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땐 더욱더 그러하다. 문제는 드라마가 약하다는 것이고 덕분에 영화는 느슨하고 늘어지는 단조로운 패턴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된 요인에는 쓸데없이 긴 런타임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런타임을 조금 줄였다 하더라도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내러티브의 힘이 부족해서니까. 그래서일까. 엔딩에서 나는 피상적 감동만 받았다. 별 감동을 못 받았다고. 다만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단조로움과 느슨함이 가져다주는 잔잔한 정서이다. 물론 그것이 과도한 나머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뭔가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 부족했던 듯.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그렇게 호되게 비판할 마음은 없다. 비록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스포츠 감동 영화의 진부한 내러티브를 따르고 있다 해도 그리 나쁜 영화는 아니라는 것. 다만 여자들이 착한 남자를 재미없어하고 나쁜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끌리는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라는 것. 선한 주인공의 창창한 앞길에 훼방을 놓으며 장애물이 되는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착한 영화다.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너무 순수해서 답답하다고나 할까. 심심하다. 유기농(organic) 영화이니까. 동시에 그게 장점이기도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극 초반에 등장하는(로이가 총격 사고를 당하기 이전) 로버트 레드퍼드와 글렌 클로즈는 결코 20대의 외모라고는 할 수조차 없는 족히 40대는 되어 보이는 늙은(?) 외모를 자랑하신다. 원래 양놈들이 외모에 관해선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둔감한 편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노인네가 배트를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은 실소(?)를 자아낼 법도 하다. 극중에서 주인공의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 정도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때 로버트 레드퍼드의 실제 나이가 사십 대 후반이었으니. 로버트 레드퍼드는 내가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이다. 또한 멋진 배우이자 훌륭한 감독이기도하다. 개인적으로 그의 정치적 신념을 지지하는 쪽이다. 평소 자연주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 '베가번스의 전설', '호스 위스퍼러')를 곧잘 연출하던 그의 취향과 이력을 고려해볼 때 이 영화 <내츄럴>의 출연은 참 어울리는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자연주의 하니까 생각나는데 오프닝 크레디트에 촬영 감독으로 반가운 이름이 등장한다.. 케일럽 데셔넬.. 그 유명한 '아름다운 비행'의 촬영 감독. 이 영화 <내츄럴>에서는 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미국의 일상적 전원 풍경이 등장하는데 '아름다운 비행'과 비교해 보더라도 잔잔한 정서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서로 조금씩 닮아 있다. 이 또한 그의 작품 성향이 꽤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싶네. 글렌 클로즈는 얼굴과 이름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익숙한 배우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내츄럴>이 내가 유일하게 본 그녀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녀가 훌륭한 배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이클 매드슨의 등장이 이채롭다. 왠지 낯익은 얼굴 같더니 역시나 아는 배우였다. 후에 '저수지의 개들', '킬 빌: Volume. 1'에 출연하며 타란티노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지는 배우가 된다. 킴 베이싱어는 팜므파탈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멍청하고 어설픈 팜므파탈을 연기하는데 이때만 해도 신인급이여서 그런지 상당히(?) 어색한 일종의 발연기를 선보인다. 난 개인적으로 팝 감독을 연기한 윌퍼드 브림리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참 맛깔나게 연기를 잘하더군. 역시 노익장은 무시 못해. "농부나 될 걸 그랬어."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거나 뭔가 일이 자기 맘대로 안 될 때 그가 이따금씩 푸념하듯 내뱉는 말인데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다. 이 대사가 등장할 때 너무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이거는 인구에 회자될만한 대사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명대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대사 그 자체만으론 성립이 불가하다. 대사, 상황, 배우의 연기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한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판스워스를 빼먹으면 안 된다. 한참이나 후에 '스트레이트 스토리'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기나긴 무명 생활 끝에 너무나 뒤늦게 빛을 본 그였지만 얼마 안 가 그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를 보면서 그의 등장이 반가운 한편으로 못내 씁쓸하게 느껴졌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어쨌든 영화 속 그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여유 넘치고 유유자적한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절제된 연기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때도 그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 코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이 넘은 시점이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두 노배우의 관록 있고 내공 있는 연기에 찬사를 보낸다.

 

영화의 주요한 시간적 배경은 1939년도이다. 그러니까 극 초반에 주인공 로이가 불의의 총격 사고를 당하고 나서 16년이 흐른 후의 시점을 말한다.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보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님 말고.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각인되는 장면은 역시나 장래가 촉망되는 전도유망한 야구 천재 로이가 묘령의 여인 해리엇으로부터 총격을 당하는 대목이다. 그 자체로도 어안이 벙벙할 만큼의 충격적인 장면인데다 영화 시작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터진 사건이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황당함과 놀라움, 어이없음에 좀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빨리 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초반에 그것도 강력한 반전을 터뜨리다니..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지?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심지어는 여기서 영화 끝나는 건가라는 순간적 착시가 들만큼 충격의 여운은 거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영화의 시간은 단번에 16년 후로 고공 점프하여 다시금 주인공의 시점으로 관객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관객의 이해를 돕고 그러한 반전에 대해 납득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적 마술이란 게 따로 있는가. 이런 게 영화적 마술이지. 아마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은 주인공이 끝내기 홈런으로 조명을 깨부수며 마치 폭죽 터뜨리듯 불꽃놀이처럼 환하게 불꽃을 튀기며 팀의 우승을 자축하는 엔딩 장면을 영화적 마술로 꼽을 것이다. 그러나 난 거꾸로 오프닝에 이은 도입부에서 영화적 마술을 느꼈던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어느 자그마한 시골 기차역에 서있다. 남루한 정장에 왠지 모를 피로감이 배어있는 듯한 진중한 얼굴의 이 사내는 낡아빠진(?) 가방과 함께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내 기차에 올라타 뭔가 사연 있는 듯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오프닝이 아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로이의 어린 시절 장면이 실질적인 오프닝이라 할 수 있다. 기차역에서의 오프닝은 시간적(여기서부터 말하는 시간적이라 함은 영화적 시간이 아닌 실제적 시간을 의미)으로 볼 때 순서상으로 주인공 로이가 어린 시절을 지나 총격을 당하고 16년이 흐른 후의 딱 그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 16년 후라는 자막의 등장과 동시에 맞물리는 장면인 것이다. 열여섯 해가 지나고 뉴욕 나이츠 구장에 로이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오프닝은 뉴욕 나이츠 팀에 일종의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던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었다. 영화적 마술이라 함은 이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작은 디테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것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이 시간적으로 바로 그 뒤에 위치하는 로이의 재등장이다. 로이가 뉴욕 나이츠 구단 벤치로 향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선수가 걸어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말썽꾸러기 선수 범프 베일리다. 이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범프 베일리는 분명히 라커룸으로 향하고 있었고 반대로 주인공 로이는 필드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차 두 인물의 명암이 엇갈린다는 일종의 시그널을 관객에게 보내는 것이다. 로이는 빛으로 걸어 들어가고 범프는 어둠 속으로 침잠해 기어들어 온다. 로이는 남루한 정장에서 야구 유니폼으로.. 범프는 야구복에서 기깔나는 사복으로 체인지하며 그라운드 밖으로.. 그렇게.. 둘의 운명도 서로 체인지.. 결국 우리의 주인공 로이는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올리고 범프는 안타깝게도 그라운드에서의 어이없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로이의 총격 사고만큼이나 범프의 죽음도 극단적인 설정이라고 느껴질 만큼 뜬금없고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마찬가지. 굳이 그렇게까지.. 범프가 영구적으로 제거되어야만 로이가 우익수로서 맹활약을 펼칠 수 있는 거였나.

 

로이가 친 공이 실밥이 풀어지고 가죽이 벗겨진다던가 전광판 시계를 깨뜨린다던가 조명을 때려 마치 축제를 열듯 불꽃놀이처럼 불꽃이 타오른다던가 홈런을 칠 때 번개가 친다던가하는 장면은 영화적 과장으로서 관객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닭살스런 할리우드식 설정이다. 가령 로이의 배트가 번개 맞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번개문양과 '원더 보이'라는 글씨가 거기에 새겨져 있기에 홈런을 칠 때 번개가 친다는 빈약하고 비약한 개연성은 차라리 이 영화를 판타지로 보이게끔 만든다. 엔딩의 조명 폭죽 장면이 바로 판타지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번개가 치는 순간 뉴욕 나이츠 로고가 등장하며 향후에 로이의 운명을 예견하는 도입부에서의 한 장면은 또 어떠한가. 너무나 속이 훤히 보이는 단세포적인 연출로서 이 또한 헐거운 인과율의 비논리성 판타지에 가깝다. 그렇게 보자면, 그의 진로가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시카고 컵스에서 뉴욕 나이츠로 변경된 연유는 논리적 팩트에 입각하면 예기치 않은 총격사건이 그 원인이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샤머니즘적 계시도 한몫 단단히 한 것이다.

 

로이가 겪은 그 날의 그 사건은 그에게는 분명 평생을 다해도 잊지 못할 트라우마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으로 인해 달라진 건 없다. 모든 걸 바꿔놓은 듯 싶었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시작이 늦어졌을 뿐.. 그는 여전히 야구를 하고.. 야구를 사랑하고.. 더 깊어졌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로이는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와 야구를 한다. 그리고 승리의 쾌감을 맛본다. 단지 16년이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삶을 대하는.. 야구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시선이 아닐까.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대구를 이룬다.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던 로이는 엔딩에 이르러선 어느덧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아들과 캐치볼을 한다. 가까이서 부자(아버지와 로이)의 캐치볼을 지켜보던 꼬마 숙녀 아이리스는 이제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먼발치에서 또 다른 부자(로이와 아들)의 다정한 캐치볼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훈훈한 감동(?) 엔딩. 할리우드적 서사를 지닌 이 영화는 당시의 미국 프로 스포츠의 살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승부조작이라든지 운동선수 암살 사건이라든지. 이 영화에서 초반에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하는 바바라 허쉬가 연기하는 해리엇이라는 인물은 일종의 팜므파탈 캐릭터인데 그녀는 최고로 잘 나가는 운동선수만을 전문적으로 표적의 대상으로 삼는 또라이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만약 로이가 왜머를 상대로 삼진을 잡으며 압도적인 플레이(비공식 경기이긴 하지만)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는 일찍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며 시카고 컵스 유니폼을 입고 오랜 선수 생활로 기록의 사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총격 사건이 가져온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은 그에게 16년이 지나서야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컵스가 아닌 나이츠의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 무대를 밟게 한다. 결론적으로 그날 너무 잘했던 게 독이 된 셈이다. 근데 과연 그럴까? 인생은 모르는 거다. 누가 아는가. 이른 나이의 가파른 성공으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졸지에 나락으로 빠져 단명한 선수가 됐을지도 아님 심각한 부상 후유증으로 별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마이너리그로 추락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이 모든 건 가정에 불과하다. 정작 그를 괴롭히는 건 그날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이다. 과거를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한 현재를 쌓는 것이다. 몰입. 그에게 그것은 야구이다. 상처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것이고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전한다. 어쩌면 그에게 그날의 상처는 독이 아니라 약이 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해야지. 혹자는 그의 때늦은 대활약에 전화위복이라고 말하겠지.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단지 그는 엎어진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데 16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이고. 어쩌면 인생은 전화위복보다는 새옹지마에 더 가까운 거 아닐까.

 

 

★★

16년이란 시간.. 야구.. 그리고 사랑.. 야구를 통한 인생 이야기. 새옹지마의 역설. 그는 그날을 저주하지 않았다. 다만 자책했다. 기억의 저주에 걸려 그날로 시간이 정지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흐르는 강물이 되기로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비로소 삶은 사방으로 만개하는 불꽃으로 그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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