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죽이기 (2003/미국) 장르 코미디 감독 피터 시걸 출연 잭 니콜슨, 아덤 샌들러, 머리사 토마이, 루이스 거즈먼, 앨런 코버트, 린 시그픈, 커트 풀러, 조너선 라우랜, 크리스타 앨런, 재뉴에리 존즈, 우디 해럴슨, 존 터투로 |
줄거리
평소 순딩이로 소문난 데이브. 어느 날 비행기 안에서 성질꾼이라는 오해를 사는 바람에 졸지에 버디 박사의 '성질 죽이기'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 아니면 감옥행이라는 법원 판결 때문에 할 수 없이 받게 되지만, 어딘가 수상하다. 버디 박사는 24시간 밀착 치료를 하며 그의 집에 눌러앉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치료로 데이브를 열 받게 한다. 화를 낼수록 지옥 같은 치료 기간은 늘어만 가고, 급기야 이제 버디 박사에게 애인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진지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영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장점이기도 한 영화일 터.. 그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미국 개봉 당시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10위권 안에 장장 7주간 머무르는 파란을 일으키며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했던.. 비록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을지언정 흥행에는 성공한 영화. 하긴 아덤 샌들러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인데.. 거기다 잭 니콜슨까지.. 흥행이 안 되면 이상한거지.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흥행 보증수표 아덤 샌들러와 이 영화에서 다소 엉뚱하고도 기이한(?) 캐릭터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는 잭 니콜슨의 만남이 신선한 조합을 이룬다. 니콜슨의 필모그래피를 보건대 분명(?) 이 영화는 그에게 있어 다소 튀는(?) 선택일 수 있다. 잭 니콜슨의 코미디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에 충실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반면 이 영화 <성질 죽이기>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일관하는 너저분한(?) 코미디 영화이다. 희대의 카리스마 잭에게 대체 무슨 일이.. 그에게 있어서 나름 연기 변신이라 부를 만한데.. 거기에는 사실 사연이 좀 있다.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아덤 샌들러가 잭 니콜슨을 작품에 캐스팅하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는 후문. 당시 들리는 말로는 정확하진 않지만, 농구광이자 LA 레이커스의 열혈 팬인 잭 니콜슨을 위해 영화 촬영 중에도 레이커스의 홈경기가 있는 날에는 그가 경기장에서 게임을 직접 관람할 수 있도록 그의 촬영 분량 스케줄은 비워 두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거기에다 덤으로 공짜 티켓(?)까지 선물로 안기며 꼬드겼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믿거나 말거나 카더라 통신. 우째 보면 할리우드에서는 흔한(?) 일 아닐까. 니콜슨과 '디파티드'에 같이 나왔던 맷 데이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그는 애당초 생각이 없었으나 감독 패럴리 형제의 끈질긴 애원과 애정 공세에 못 이겨 그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한 또 하나의 너저분한(?) 코미디 영화 '붙어야 산다'에 출연하고 말았다. 내가 볼 때, 니콜슨은 다작을 하는 배우도 아닐뿐더러 작품 선택에 있어 꽤 까다롭고 신중한 배우다. 2000년대 들어서 그가 출연한 작품 수는 채 열 편이 되지 않는다. 말년에 이것저것 아무 작품이나 건드리며 오만 영화에 출연하느라 배우로서 쓸데없는 데에 에너지를 과다 소모하고 커리어를 망치고 있는 드 니로와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그렇기에 더더욱 거의 막장(?) 코미디라 불러도 좋을 이런 단세포(?) 코미디 영화에 그가 출연했다는 게 이례적이라 느껴질 만큼 의아했었던 것이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잭 니콜슨의 연기..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색함은 찾아볼 수도 없고 의외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놀랄 일은 아닌 게 사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물론이고 '버킷 리스트 -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서도 그의 코미디적 재능은 발견된다. 심지어 극한의 공포 스릴러 '샤이닝'에서조차 그의 심각하고 진지한 연기를 보면서도 문득문득 웃음이 났었다. 왜일까. 니콜슨 특유의 표정 연기랄까 그런 게 있는데 그의 표정과 말투, 제스처에서 분명 상황은 심각하지만 또한 그 역시 진지하고 심각하게 연기를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코미디가 새어나옴을 종종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희비극의 연기일까. 코미디적 페이소스라고 칭한다면 과한 표현이 되려나. 암튼 그에게는 분명 특유의 코미디 감각-본능 같은 게 있다. 이 영화 <성질 죽이기>에서도 그렇지만 니콜슨은 코미디 연기도 출중하다. 한마디로 모든 연기가 다 가능한.. 그저 표정만으로.. 서있는 그 자체로.. 이미 연기가 되는 괴물 같은 능력의 소유자. 아덤 샌들러의 연기는 '펀치 드렁크 러브', '레인 오버 미'와 같은 진지한 드라마와 '미스터 디즈', '롱기스트 야드'와 같은 경박스런(?) 코미디로 나뉜다. 당연히 이 영화 <성질 죽이기>는 후자에 해당된다. 후자의 경우 아덤 샌들러의 연기는 뭐 거의 비슷한 패턴이다. 미국식 코미디 영화하면 아덤 샌들러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코미디가 주종목이긴 하지만 사실은 정극 연기가 의외로 출중하고 탁월한 배우. 특유의 웅얼거리듯 안으로 삼키는 느릿느릿한 말투가 트레이드마크이며 시치미 뚝 떼고 우격다짐 식으로 돌진하는 코미디에 능한 배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홍일점치고는 외모와 매력이 다소 떨어지긴 하나 머리사 토마이의 캐스팅도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이런 로맨틱 코미디에 적합한 배우라는 생각에. 연기도 곧잘 하는 배우다. 외모는 떨어지지만 나름의 매력은 있다. 지금 한창 상영 중인 '지골로 인 뉴욕'에서 너무나 말이 없는 진중하고 사려 깊은 정적인 인간으로 등장하는 존 터투로는 이 영화 <성질 죽이기>에서는 말 많고 경박스럽고 사려 깊지 못한 천방지축의 동적인 인물로 나온다. 1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차만큼이나 캐릭터의 성향 차이가 상당하다.
확실히 미국에서 여름 시장에 성공하려면 사이즈를 한없이 불려서 블록버스터로 만들던지 아예 코미디로 내달리던지 둘 중에 하나다. 물론 사이즈만 불린다고 모든 블록버스터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 <성질 죽이기>처럼 아예 진지함을 거세해 버리고 작정한 듯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오직 코미디로 한 우물을 파는 전략이 성공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괜히 드라마 넣고 통속극 집어넣고 이것저것 집어넣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성질 죽이기>가 취한 스탠스가 적절했다고 생각하는 건 이 때문이다. 역시 할리우드 전법은 탁월해.
비록 십 년 전에 나온 영화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볼 때 시의성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단세포 코미디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름의 미덕을 찾는다면 사회학적 맥락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키워드는 분노 조절 장애이다. 분노가 들끓는 사회.. 곳곳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다. 사회적 불안은 점점 고조되고 사회가 개인을 처절하게 소외시키고 억울함을 제공하고 분노를 부추긴다. 이 문제를 사회가 한 개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알아서 해소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안 그러면 법으로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양아치 언행을 보인다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일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비겁함과 졸렬함, 무지와 사악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 대상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구역질나는 사회는 약자를 돕는 것은 고사하고 보호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괴롭히고 강자의 편을 들어 그들에게 심리적 박탈감을 안기며 심지어는 가해자로까지 만들어 손발을 묶어버린다. 개인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한 개인에게 내재된 불안은 그 개인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불안으로 확장되고 한 사회가 조장하는 불안은 개개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분노의 뿌리는 불안이다. 불안이 바깥으로 향하면 분노가 되고 내면으로 향하면 우울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노와 우울이 양립한다. 불안의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경제적 불안도 있겠으나 사회적 불안 즉 심리적 불안이 더 크다. 대한민국도 프로작 네이션(Prozac Nation)으로 이미 진입된 사회이다.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심리적) 불안을 따로 떼어놓고 볼 필요는 없다. 역시나 서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고도로 정보화된 디지털 사회, 미디어의 범람, 거대 언론과 권력의 횡포,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 관행,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타적 태도, 다양성과 개성을 죽이는 획일화, 극단을 달리는 천민자본주의.. 이런 것들이 심화되어 가면서 인심은 흉흉해지고 서로 간의 정은 각박해지며 어느새 불신의 사회가 되었다. 특히나 우리의 경우 이분법이 가장 강렬하게 도드라지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통과 뿌리 깊은 적대시의 배타적 문화로 하나의 굳건한 도그마를 형성하고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다. 이러한 이념과 신념의 양극화는 불안과 분노, 우울을 키우는 핵이자 경제적 양극화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개인적으로 진단한다. 전자의 해결이 후자의 해결을 도울 것이다. 앞서 얘기한 것들은 모두 우리 앞에 놓인 난제로서 결론적으로 사회와 개인 우리 모두의 몫인 셈이다.
영화의 원제 Anger Management를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화를 처리해주는 곳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우리나라로 수입되면서 성질 죽이기로 의미가 변질되고 말았다. 제목과 달리, 정작 내용을 들여다보면 성질 돋구기 또는 성질 부추기기가 의미상으로 더 적합한 제목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극중 주인공의 문제는 화를 참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는 데에 있고 내지르는 데에 있지 않고 삭히는 데에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알고 있는 일반적인 분노 조절 장애와는 다른 경우인 것이다. 오히려 화를 억누르고 그것이 잠재되어 있기에 더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데이브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와 공개적인 뽀뽀(?)를 시도하다 어느 말썽꾸러기 지진아의 하의 탈의 장난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성인이 되어서도 남 앞에서 애인과 키스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과 공포가 있다. 성기의 크기에 대한 집착과 열등감도 이때 발현됐다. 문제는 이것이 성격적인 결함(?)으로 연결되었다는 것. 화가 나는데도 표출하지 못하고 참는 게 습관화가 되어 남에게 싫은 내색 한 번 못하고 늘 소심하게 눈치 보며 기가 죽어 있는 자존감 결여의 상태.. 결국 그것이 그를 'Anger Management'로 이끄는 씨앗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를 도와줄 멘토(?)이자 친구 버디(공교롭게도 이름이 'Buddy'라는 게 재밌다)가 있다. 이 영화는 데이브와 버디가 서로 티격태격 콤비를 이루는 버디 무비이자 좌충우돌의 힐링 로드 무비이다. 데이브에게 있어서는 성장 영화이기도 하고. 데이브가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치료의 일환으로(이것만큼이나 확실한 명분도 없다) 유년 시절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굴욕을 안겨 줬던 트라우마 제공자 아니 섕크먼에게 찾아가 복수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박장대소하면서 본 대목이다. 말썽쟁이 유년 시절의 죄를 참회하는 뜻이었는지 스님이 되어 있는 섕크먼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고 그가 데이브에게 처절하게(?) 응징 당하는 장면은 귀엽고 유치하면서도 통쾌감을 선사하며 배꼽 빠지게 만든다. 성인 아니 섕크먼을 스님으로 설정한 건 탁월한 착상이었다. 화(Anger)와 불교.. 어딘가 통하지 않는가.. 틱낫한.. 수행.. 명상. 어떻게 보면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단순하고 가벼운 코미디로 많은 부분 희석시키고 희화화하면서 뼈 있는 웃음을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한 듯 보인다. 그저 킬킬거리면서 웃을 뿐이다. 더구나 노골적인 성적 유머가 잦게 등장한다. 전형적인 미국식 코드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카메오로 등장한 헤더 그람이 레드 삭스라고 문구가 새겨진 브라를 야하게(?) 드러내 보이자 애인이 있는 데이브가 그녀에게 상의는 탈의해도 된다고 말하는 장면은 매우 재치 넘치고 위트 있는 유머에 속한다. 왜냐고? 데이브는 양키즈 팬이니까. 메이저리그에서 양키즈와 레드 삭스가 서로 영원한 라이벌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야구를 매개로 한 성적 유머.
전형적인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 특히나 엔딩은 전형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이 이뤄지는 해피 엔딩. 마지막에 야구장에서 프러포즈하고 키스하고 사랑을 이루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로맨스의 클리셰 같은 거. 한 예로 드루 배리모어 주연의 '25살의 키스'에도 이와 내용적으로 유사한 장면이 엔딩으로 등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대망의 한 장면을 위해 여기서는 양키스타디움과 데릭 지터, 로저 클레멘즈, 엄청난 수의 관중들 거기다 줄리아니 뉴욕시장까지 동원된다. 당시로선 양키즈의 간판타자 데릭 지터와 간판 투수 로저 클레멘즈는 데이브의 떠들썩하고 난잡한(?) 프러포즈 이벤트로 인해 경기 시작이 지연되자 구스프라바를 연신 중얼거리며 평정심(?)을 찾는다. 그리고 뉴욕시장은 데이브와 린다를 향해 5초짜리 화끈한 프렌치 키스를 큰소리로 주문한다. 우리나라 서울시장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 역시 문화적 차이. 영화 속 데이브가 자신에게 최후의 프러포즈 기회를 제공해준 줄리아니 뉴욕시장을 향해 감사와 호감의 표시를 보인 것처럼 실제로 아덤 샌들러는 줄리아니 시장에 대한 사적-이념적 끌림(?)을 가지고 있었던 지지자였다. 극중 잭 니콜슨은 일종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인물. 처음엔 데이브를 돕는 사람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그와 린다의 사랑을 훼방 놓는 간교한 인간으로 비춰지고 그렇게 인식의 엎치락뒤치락이 이뤄지다 결론적으로 힐링과 사랑의 전도사(?)였다는 사실로 밝혀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코미디. 데이브와 버디가 다리 한가운데 차를 주차(?) 시켜 놓고 지나가는 차량들로부터 온갖 욕을 쳐들어가면서도 'I Feel Pretty'를 함께 부르는 장면은 인구에 회자(?)될 만한 인상적인 장면이다. 데이브가 노래를 부르고 중간 중간에 버디가 화음을 넣는데 너무 웃겨 뒤집어진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을 살리지 못하고 단세포로 만든 번역에다 오역투성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화가 난다. 물론 길이라는 게 화면상의 제약이 있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단순히 내용 전달-파악이라는 측면에서만 자막이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스크린 자막이라는 한계 내에서도 최대한 어휘와 문장의 풍성한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반성해라.
확실한 건 최소한의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하는 영화라는 사실. 런타임도 길지 않고 적당한데다 지루하지 않게 한시도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재밌는 에피소드들과 뻔하지만 나름의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로 몰입도는 상당한 영화이다. 이런 게 바로 단세포의 미학? 아니.. 얄팍한 즐거움.
★★★
모두가 성질을 죽이라고 할 때 반대로 성질을 부리라고 외쳐대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버디. 그의 가르침대로 성질을 내기 시작하는 데이브. 표출하는데에서 힐링이 시작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람마다 경우에 따라 처방이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억누르기보다 터뜨리라고 말한다. 구스프라바보다는 케세라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