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2010/미국) 장르 드라마, 스포츠 감독 데이비드 O. 러슬 출연 마크 월버그,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아덤스, 멀리사 리오, 잭 맥기 |
줄거리
미키는 상대선수 전력만 높여주는 일명 디딤돌 복서라는 불명예 타이틀을 달고 있다. 미키의 형 디키는 한때 슈거 레이를 때려눕힌 경력으로 여전히 그가 살고 있는 마을 로월의 자랑이지만 지금은 약물중독으로 인해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상태이다. 미키의 엄마 앨리스는 아들의 복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시합을 직접 주선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복싱이 삶의 전부인 복싱 가족. 미키에게 가족은 든든한 지원군이자 버팀목이고 복싱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고마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그늘로서 자신을 덮어버리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하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회의를 느낄 무렵, 샬린과의 만남은 미키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샬린이 미키의 일에 개입하면서 미키에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고 그것이 결국 미키가 엄마와 형을 버리고 샬린을 택하는 행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제 샬린파와 앨리스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까. 미키의 챔피언 방어전을 앞두고 이대로 영원히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증오의 씨앗을 뿌리며 공멸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극적인 화해로 상생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 <파이터>는 미국영화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 독립영화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마치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미키'가 링에서 상대에게 날리는 핵주먹과 같은... 꼼수 부리지 않고 내러티브의 힘만으로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정공법은 미국영화의 전통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는 듯 보이며 결과적으로 할리우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어떤 머저리 관객들은 이 영화의 다소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화면을 거론하며 촌스러운 영상이라고 비난하면서 감독의 연출역량을 의심하고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사실은 끝내 인지하지 못한 채...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에겐 좋은 영화의 기준이 화면 때깔인가보다. 그런 논리라면, '트랜스포머'가 걸작? 설마 할리우드(Hollywood)가 갑자기 돈줄이 말라 기술력 저하로 날리우드(Nollywood) 수준으로 강등이라도 됐나? 결과물로서 보여지는 영화 <파이터>의 화면은 미국 독립영화 특유의 러프(rough)한 질감을 최대한 살린 날 것 그대로의 영상과 자유롭고 과감한 앵글의 촬영을 토대로 하여 비주얼이 설계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더 레슬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 작품은 꽤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닮아있다. 제목이 비슷한데다, 격투종목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도 유사하다. <파이터>는 복싱을.. '더 레슬러'는 프로레슬링을.. 거기다 링 위에서 싸운다는 공통점까지 더해지면.. (제작년도로 봤을 때) <파이터>의 표절(?)을 의심할 만큼, 너무나 흡사하다. 물론 표절은 아니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더 레슬러'를 떠올린 핵심적 이유는 전체적인 영화의 결이나 무엇보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영상 그리고 어두운 뒷골목의 눅눅하고 그늘진 삶이 링에서는 그 누구보다 환한 조명을 받으며 투혼을 불사르는 화려하고 멋진 삶으로 도약하는 이러한 부분들에서 두 작품이 서로 공명을 일으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파이터>가 '더 레슬러'보다는 좀 더 밝고 낙천적이다. 결말 또한 더 긍정적이고. 대신 '더 레슬러'는 좀 더 진한 페이소스를 머금고 있으며 엔딩이 안겨주는 씁쓸한 여운이 상당하다. 니힐(nihil) 성향의 다크(dark)한 정서를 가진 나로서는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해서 평가한다면, '더 레슬러'에 쬐끔 더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더 레슬러'가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영화라면, <파이터>는 아무래도 실화를 바탕으로하다보니 서사 중심의 드라마틱한 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파이터>가 전자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영화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야기가 분명한 영화를 절대적으로 선호하니까. 어쨌거나 내가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두 작품 다 수작이다. <파이터>의 제작자 중 한 사람이 대런 애러노프스키였다는 사실을 안 건 영화를 다 본 뒤였다. 역시나 하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그가 바로 '더 레슬러'의 감독이니까.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사실 이 프로젝트가 그가 직접 연출을 하려고 했던 작품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여차하다보니, 자신은 제작자로 한발 물러나 지금의 감독에게 메가폰을 넘기고 대신 지원사격을 해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아봐야겠지만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까. 정말 중요한 건, <파이터>라는 작품에 제작자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손길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더 레슬러'를 연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입김이 분명 <파이터>의 제작과정 속에서 상당부분 작용했을 거란 분석은 가정과 추측이 아닌 논리적이고 타당한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럼 이번엔 제작사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파이터>를 만든 제작사는 -이 영화의 여타 군소 제작사는 논외로 한다면- '와인스타인 컴퍼니'이다. 와인스타인 형제(할리우드는 형제 영화인이 유독 많은 독특한 집단이다)가 세운 회사라서 이름이 그렇다. 잠시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이들의 과거를 탐색해보자. 흥미로운 이력이 발견된다. 이들이 과거에 몸담았던 영화사는 그 유명한 '미라맥스'이다. 그러나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한 영화사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따름이다. 원래 미라맥스는 독립영화 배급사(제작사)로 알려져 있었고 이들의 운명이 바뀌게 된 시점은 '펄프 픽션'의 등장과 맞물려있다고 보면 된다. '펄프 픽션'은 칸 영화제 수상으로 온갖 상찬과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타란티노라는 영화천재의 탄생을 알렸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터진 예기치 않은 영화의 흥행은 미라맥스라는 이름을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와인스타인 형제가 미라맥스에서 나와 지금의 영화사를 차린 후에도 타란티노와의 인연은 여전히 계속 이어가고 있다. 형제는 타란티노라는 흙속의 진주를 발굴해 그가 거장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디딤돌이 되어줬고 타란티노는 형제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으니 지킬만한 의리 아니겠나. 그 후로도 이들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 '잉글리쉬 페이션트'.. '굿 윌 헌팅'..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등을 내놓으며 미라맥스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겸비한 양질의 영화들을 쏟아내는 영화사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끝에 준 메이저급 영화사로 올라선다. 미라맥스의 주가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이들을 향한 시기어린 비난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이른바 아카데미용 영화를 의도적으로 제작한다는 것과 커진 덩치만큼이나 예전의 독립영화 정신을 잃어버려 독창성은 사라지고 이젠 고만고만한 작품들만 양산한다는 내용이 비판의 주된 골자이다. 후자의 주장에 대해 약간의 변론을 하자면, 그렇다고 독창성이 완전히 거세된 건 아니었고 여전히 주류 할리우드에 조금씩이나마 비껴가는 작품들을 만들곤 했으니 그들의 비주류적 취향과 그에 따른 영화에 대한 남다른 고집은 불변의 모토였던 것이다. 사이즈가 커졌다고 알맹이마저 전면적으로 교체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부분적으로는 저 견해에 동의한다. 대신 전자의 경우는 다분히 그러한 경향과 흐름을 띠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타 영화사에 비해 유독 미라맥스의 작품들이 매년 아카데미 작품상 단골후보로 오르곤 했었으니까. 가장 심한 예로, 2003년도 오스카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른 다섯 편 중 무려 세 작품이 미라맥스의 영화들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작품 '갱스 오브 뉴욕'은 그들로서는 다소 버거운 규모의 굵직한 프로젝트였으나 그만큼 야심찬 기획이었기에 개봉을 연거푸 연기하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킨 대작이었다. 여기에는 메이저를 꿈꾸던 그들의 야망과 포부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메이저를 향해 과감히 던지는 도전장의 의미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고. 결국 와인스타인 형제는 미라맥스를 성공적인 영화사로 키워놓고 나온 셈이다. 공(功)은 그들 형제의 몫이고 과(過)는 남겨진 자들의 몫이 되는 결과가 되었다. 형제가 떠나자, 미라맥스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버렸고(스티브 잡스가 떠난 후 '애플'이 휘청대듯이) 얼마안가 파산소식이 전해졌다. 형제는 아예 자신들의 이름을 전면으로 내건 영화사를 새로 차리는데, 그것이 바로 '와인스타인 컴퍼니'. 해가 더해질수록 점점 탄력을 받아 지금은 마치 과거의 화려했던 미라맥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 큰 성공을 누리고 있다. 고인 물이 되어 썩어가는 길을 피하고 가파르게 흐르는 물에 과감히 몸을 맡긴 그들의 현명한 선택이 낳은 결과로 봐야할 것이다. 결과론적인 말로 들릴지 몰라도, <파이터>를 보면서 과거 미라맥스 표 작품들의 색깔이 은근히 묻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라맥스라는 이름은 와인스타인 형제의 부모님 이름(Mira + Max)을 각각 따와서 이어 붙인 것이 유래가 되었다. 아무래도 인명으로 영화사 이름을 정하는 게 이들의 주특기인가보다.
이제 본론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최상급이다. 이런 환상적인 조합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경탄할 지경이고 적재적소에 완벽히 배치된 맞춤 캐스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명연기의 향연이 스크린 위에 제대로 펼쳐진다. 할리우드의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파이터>에서 주인공 역을 연기한 마크 월버그는 이 영화의 제작까지 담당하며 작품에 대한 욕심과 남다른 애정을 한껏 드러낸다. 그와 데이비드 O. 러슬 감독은 '쓰리 킹즈'를 시작으로 이 작품까지 연달아 세 편의 영화를 함께했을 만큼 두터운 신뢰를 자랑하며 찰떡콤비임을 과시한다. <파이터>에서 마크 월버그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 속에서 형제로 같이 나온 크리스천 베일의 오스카(Oscar) 연기에 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파이터>에서 미키라는 역할은 그가 아니었다면 스크린에서 살아 숨 쉬는 생동감으로 구현되기 어려웠을 거라 생각된다. 그는 미키라는 인물을 빛나게 했고 크리스천 베일이라는 엄청난 내공의 배우에게 압도당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본인의 몫을 충분히 다했을 뿐이다. 제작자로도 나선 만큼 그가 이 작품에 흘렸을 땀의 결실이 완성된 결과물을 통해 드러난다. 좀 엉뚱한 얘기지만, <파이터>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맷 데이먼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었다. 특히 본 시리즈의 맷 데이먼. 남성적이고 터프하면서 강인한 싸움꾼(?) 이미지가 왠지 비슷하다고 느꼈다. 테스토스테론의 과다분비형 인물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디파티드'에 같이 출연했던 전력이 있다. 더 재밌는 건, 둘 다 보스턴 출신이라는 점. 거기다 <파이터>에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매서추시츠 주에 있는 로월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슬럼가 느낌이 나는 이곳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플롯이라고 봐도 될 만큼 영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핵심적인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공통분모가 참 다양하네. 굳이 차이를 드러내 마키 마크와 맷 데이먼을 이간질(?) 시킨다면, 수컷의 와일드한 느낌은 서로 비슷해도 맷 데이먼은 마키 마크에겐 결핍된 지성미를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갈린다. 그러니까 맷 데이먼이 좀 더 다듬어진 스마트형 파이터라면, 마키 마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에 가깝다고나 할까.
<파이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크리스천 베일은(그의 작품들을 다 보진 못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생애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고 생각될 만큼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역시 괜히 오스카상이 아니다. 영화와 시상식의 수준이 아직까지도 극명하게 반비례하는 어느 희한한 나라의 큰 종 영화제(?)와 푸른 용 영화상에서 늘상 노출되는 개막장 시상 쇼가 적어도 그들에겐 전무한 일이니까. 부러운 게 아니라 씁쓸하고 안타깝다. '상'이라는 것도 권위 있고 명망 있는 곳에서 수여해야 진정 값진 상을 받은 기쁨이 있는 거다. 아무튼 <파이터>에서 베일의 연기를 보며, 그가 다시 예전의 팔팔했던 시절로 초심을 갖고 제대로 돌아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는 대부분 말끔한 모습으로 건전하게(?) 나와 연기 면에서는 별다른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연극도 그렇지만 본래 영화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에 비해 현실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착한 영웅보다 악당이 더 매력있는 법. 여기 팁 하나, 연기로 트로피 하나 건지고 싶으면 무조건 작품과 캐릭터를 잘 만나야한다.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캐릭터. 가장 중요하다. 어차피 캐릭터가 좋으면 대개 작품의 결과물도 좋게 나오기 마련. 단 연기가 확실히 받쳐줘야겠지. 오스카의 법칙 중 하나, 정신질환자.. 약물중독자.. 신체장애인..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창녀.. 성적소수자.. 등과 같은 주로 어느 특정 부분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 자리한 루저 혹은 패배자.. 소외된 인물을 연기하라. 왜? 이런 인물들은 그 자체로 이미 서사의 큰 물줄기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잠재되어있는 드라마는 무궁무진하니까. 비록 현실에선 이들이 사회적으로 시선의 폭력을 당하고 버림받을지라도 영화라는 예술은 이들에게 한없이 관대하다. 이것이 할리우드가 그리고 아카데미가 비주류의 아웃사이더를 사랑하는 방식이자 이유이다. 관객의 마음을 잡아채고 감동시킬 거의 모든 요소들을 그러한 캐릭터들이 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베일이 감옥에 있는 자신을 한탄하며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죄수들 앞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의 연기는 그 옛날의 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게 했다. 싱크로율로 따지면, 99.99..%의 완벽한 일치. 표정, 말투, 연기 스타일.. 거의 모든 면에서 흡사하다. 단 방금 예로 든 그 한 장면에 한해서 그렇단 얘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드 니로의 연기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역시나 '택시 드라이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일이 트래비스를 연기한 드 니로를 오마주했다면, 데이비드 O. 러슬은 미키와 샬린의 극장 데이트 장면을 통해 '택시 드라이버'라는 작품과 감독 마튼 스코시즈에게 경의를 표한다. 후자에 대한 재미난 첨언을 하자면,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는 벳시와의 극장 데이트에서 야한 영화를 선택한 것 때문에 그녀에게 된서리를 맞지만 반대로 <파이터>에서 미키는 야한 영화를 선택하지 않아서(정확히 말하면, 자막 있는 영화를 지가 선택해놓고 졸았다는 이유로) 샬린에게 욕을 거하게 얻어먹는다. 둘 다 상대 여자와 극장에서의 첫 데이트라는 점과 황당하고 어리석은 영화 선택으로 상대에게서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는 결과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트래비스의 행위는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어리숙함과 자폐성에 기인한 것이고 그와 달리 미키는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타산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이기심의 발로라는 점이다. 욕을 먹는 이유와 그 후의 결과의 내용이 서로 정반대라는 것도 차이점이다. 트래비스가 그 일로 인해 벳시에게 영원히 퇴짜를 맞았다면, 미키에게 그 사건은 샬린과의 관계의 전화위복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데이비드 O. 러슬은 '택시 드라이버'에 대한 자기만의 재해석을 거쳐 변주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뒤틀린 오마주를 시도했다.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럽다. 독창적이고 신선하며 개성 넘치고 유머러스한데다 로맨틱한 감성이 화룡점정을 장식하는 비틀기의 신공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파이터>에서 보여준 호연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멀리사 리오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연기를 영화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딱 보자마자 관록이 느껴지는 매우 노련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 돈에 있어서는 다소 비정한 엄마 역할인데, 초반에 그녀가 자식에게 갖는 다소 일방적인 면모의 끔찍한 애정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나름 속 깊은 애정으로 서서히 본질이 드러나는데 이때 그녀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 또한 호감으로 변한다.
솔직히 오로지 내 개인적인 초이스로 고른다면, 샬린을 연기한 에이미 아덤스를 최고로 꼽고 싶다. 할리우드에는 수많은 여배우들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여우들 중 한명이다. 사심 조금 포함해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당시 오스카 트로피는 에이미 아덤스의 몫이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멀리사 리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에이미 아덤스의 눈부신 연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역할의 비중은 서로 대동소이하지만 확실히 에이미 아덤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이 배우를 처음 봤을 땐, 왜 저런 애를 캐스팅했을까 의아했었다. 연기는커녕 외모도 별로고 매력도 전무하다고 느꼈으니까. 전형적인 남부 컨트리 스타일의 심하게 평범한 갓 젖살 빠진 미국인 소녀의 이미지가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녀가 맡았던 브렌다는 무색무취의 백지녀 캐릭터였다. 그런 나의 (그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놓은 영화가 있었으니.. '다우트'. 여기서 난 이 배우의 형용할 수 없는 매력에 포획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선샤인 클리닝'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당시 리오 디카프리오와 스필버그의 눈이 정확했음을 뒤늦게 깨닫고야만 것이다. 브렌다 역할을 뽑는 오디션 과정에서 그녀가 캐스팅되는 데는 특히 리오의 입김이 꽤 작용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역시 명배우는 사람 보는 눈썰미 하나도 탁월하군. 새삼 돌이켜보니, 그 때 그녀는 채 다듬어지지 않은 신인이었고 무엇보다 역할 자체가 워낙 금발의 주근깨 가득한 백치미 어린 캐릭터였던 데다 치열 교정기를 끼고 나오는 설정이라 더없이 촌스럽고 비호감으로 보였을 게다. 여배우들 중에서는 에이미 아덤스가 장차 할리우드를 이끌어나갈 재목임을 <파이터>를 보고 나서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파이터>에서 유독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여타의 장면들보다 좀 더 몰입하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솔직히 에이미 아덤스에게 이런 앙칼지고 '와일드'한 모습이 있었나할 정도로, 이 영화에서 그녀가 발산한 폭발력 있는 에너지는 약간의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의외의 매력을 안겨주었고 절제된 내면 연기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매력의 정체는? 샬린이 외강내유형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결국 캐릭터에서 매력이 나오는 것이다. 그녀의 터프한 모습을 보면서 통쾌감(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여린 모습 속에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게 이중적인 매력이지. 그러나 활자로 머물러있는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캐릭터나 마찬가지이다. 배우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인데, 이 말을 달리하면 배우의 매력이 캐릭터의 매력을 좌우하고 결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내 개인적인 시각으로는, 캐릭터의 매력과 배우의 매력은 서로 비례한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파이터>의 경우가 배우의 매력이 캐릭터의 매력을 상당부분 증폭시키며 시너지 효과를 낳은 결과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연기에 대해선 비록 쥐뿔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 진정 훌륭한 배우는 악질의 비호감 캐릭터를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자연스럽게 전도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의 성공여부는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달려있다. 설득되느냐 아니냐로 귀결되는 것이다.
오프닝부터 인상적이다. 기계로 바닥을 긁는 듯한 다분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고 화면이 밝아지면 미키가 도로를 닦는 장면으로 상황의 전모가 밝혀진다. 이게 뭐가 인상적이냐고?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음향과 음향편집 그리고 음악을 통해 연출의 효과를 부분적으로 획득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시 함정에 빠져선 곤란하겠다. 방금 열거했던 요소들은 단순히 청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아니다. 영화라는 기본적으로 영상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움직이기에, 시청각이 같이 맞물리는 오묘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음향도 그렇지만 특히나 이 영화에선 음향편집이 훌륭했던 것 같다. 영화 맨 초반부에, 디키가 자신이 여전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과거 슈거 레이와의 경기 장면을 한가롭게 약쟁이 집에서 친구와 능청스럽게 재연하며 놀다가 미키와의 훈련약속을 뒤늦게 알고 로드웍(roadwork) 삼아 도로 위를 허겁지겁 달리는 장면에서 나오는 다급하고 긴박감 넘치는 느낌의 사운드는 인물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적확한 효과를 낸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체육관에서 열심히 펀치 볼을 두들기는 미키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기가 막힌 건, 전자의 사운드가 바로 미키가 펀치 볼을 때리는 소리였단 사실이다. 다른 특별한 음향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장면에 필히 등장할 수밖에 없는 펀치 볼 사운드를 편집을 통해 바로 전 장면부터 미리 끌어땡겨 사용한 것뿐이다. 그리곤 뒤에 이어지는 장면과 연결시킨 게 전부다. 이런 게 바로 발상의 전환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가 아니고 뭐겠나. 하나 더 있다. 후반부에, 미키가 챔피언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디키와 땀방울 흘리며 훈련하는 장면이 뒤이어 호텔에서 워밍업 하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시퀀스에서 흐르는 음악이 사실은 불가시 음향이 아닌 가시 음향이었음이 샬린의 액션으로 진실 규명되는 장면은 음악을 이용한 센스 있는 연출에 해당된다. 중반부에, 미키의 배신이 전부 샬린의 탓이라고 여긴 앨리스와 그녀의 패거리들이 샬린을 족치러 몰려가는 장면에서 미키와 샬린의 러브씬(love scene)과 교차 편집되며 보여지는 몽타주 씬은 거기에 깔리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사운드와 어우러지며 극적 몰입을 배가시키는 명장면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샬린이 현관문을 기운차게 열어젖히는 동시에 사운드는 꺼지고 이윽고 상황은 벌어진다. 이것은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며 일시에 모든 긴장이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는 짜릿함 동반의 드문 경험이다. 근데 신기하게도, 암캐들끼리 머리채 쥐어뜯고 주먹다짐해도 긴장감은 도리어 전 몽타주 씬에 비하면 다소 떨어진다. 설득력 있는 비유를 하자면, 매를 맞는 순간보다 매를 맞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더 두려운 법. 내겐 몽타주 씬이 마지막 챔피언 방어전보다 비교도 안 되게 살 떨리는 긴장감을 경험케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복싱 장면들은 거의 예술에 가깝다.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고 실제 복싱중계를 보는듯한 생생함과 현장감이 압권이다. 새삼스레 할리우드 기술력에 또 다시 감탄하게 된다. <파이터>야말로 진정한 스포츠 영화이자 진짜 복싱 영화다. 다소 거친 질감의 투박한 화면은 복싱 영화라는 장르적 소재와 뒷골목의 너저분한 삶이라는 플롯과 캐릭터적 특성에 정확히 부합되며 안성맞춤의 조화를 이끌어낸다.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O. 러슬의 영화는 <파이터>가 처음이다. 그래서 이 감독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유보해야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분명 상당한 연출력을 지닌 뛰어난 감독임은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진다. 이미 평단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연출자이기도 하고. 그가 범상치 않은 감독이라고 특별히 느낀 장면 하나를 소개하겠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난 미키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선 아침훈련을 위해 짐을 챙기고 샬린의 집을 나서는데 뒤이어 일어난 샬린이 미키의 뒷모습을 내려다본다. 이제 카메라는 미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채 그를 따라 움직이고, 이때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키의 훈련장면을 감방에서 혼자 운동하는 디키의 장면과 교차로 엮어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려는 부분은, 성당의 종소리가 강렬한 비트의 음악으로 바뀌며 고요를 깨고 난잡스러움(?)으로 전환되는 찰나의 순간이며 성스러운 아침이 건네는 잠깐의 평화가 주는 여운의 파장이다. 시종일관 동적인 에너지로 끓어오르던 영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맞이하는 짧은 휴식에 이은 순간의 정적에 난 그저 젖어들 뿐이다. 그것이 빚어내는 묘한 아우라는 실로 대단해서 (과장 조금 보태서) 그 장면만 백번이 넘도록 돌려보고 싶게 만든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는 부피가 커서 그런지 이야기 거리도 참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단 생각이 든다. 실화임에도 심지어 실화를 극적으로 각색했음에도 이야기 자체는 다소 밋밋하고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라고 생각할 법도하다. 한때 꽤 잘나갔던 전직 복서출신의 사고뭉치 마약쟁이 형과 그런 형을 뒤치다꺼리하면서도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자존심 센 동생 그리고 이들을 에워싸는 가족과 주변인들의 이야기.. 우선 이렇게 이 영화의 개괄적인 설명만 들어봐도, 전형성과 진부함의 틀을 가진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딱 생겨버린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 영화는 관객에게 기분 좋은 배신(?)을 때린다. 편견에 따귀를 얻어맞고 도리어 신선한 감동을 먹은 채 극장 문을 나서는 이 느낌. 진정으로 훌륭한 영화는 진부해 보이는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로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설득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파이터>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힘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이야기에 있지 않고 창조적인 연출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야기보단 설정에서 흥미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미키의 엄마가 아들의 시합을 직접 주선하고 형은 미키의 트레이너 겸 코치를 맡으며 동네 경관이 디키와 트레이너 경쟁을 벌이는 관계가 되는 이곳만의 문화적 특이성이다. 이들 가족은 단순히 아들을 응원하는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내외부적으로 적극적인 가담을 통해 미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미키와 샬린을 포함한 이들 가족의 문제는 승리에 대한 집착과 도가 지나친 애정으로 인해 승리를 위해서라면 범죄도.. 분열도.. 배신도.. 악담도.. 복싱계와의 이권 다툼도 서슴지 않는 본질에서 벗어난 일그러진 복싱 패밀리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갖고 있는 다른 나라와는 차별되는 그들만의 문화가 분명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약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할리우드 작품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심지어 영화 속에 마약이 등장하는 장면은 흔하게 관찰되는 그들만의 풍경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그것은 낯선 광경이고 어쩔 수 없이 정서적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에겐 그것이 일상화된 현실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아니니까. 그와 관련해 <파이터>에는 재미난 장면이 등장하는데, 심심하면 약쟁이 집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하며 잠수타기 일쑤인 디키를 그의 가족들이 찾으러 올 때마다 창문을 통해 담장 앞 후미진 곳에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위로 뛰어내리는 디키의 상습적 행동이 보여지는 장면들이다. 일종의 이 영화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난 이런 게 참 좋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기발한 상황설정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 장면이 창작이 아니라는 견해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제작진이 실존인물 디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제작진에게 털어놓은 에피소드를 영화에 그대로 반영한 장면일 가능성이 사실 크다고 보여지니까.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영화가 활자가 아닌 이상 영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연출을 생각한다면 그리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단순히 기발한 상황설정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연기와 촬영, 미장센, 장소, 분위기 거기에 더해서 프레임 안을 감싸고 도는 공기와 같은 총체적인 의미의 연출이 효과적으로 뒷받침되어야 좋은 결과물로 최종적으로 탄생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터>는 성공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설명 혹은 언급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모르고 지나칠법한 나만이 알고 있는 유용한 정보 하나를 공개하겠다. 미키의 가족은 아이리쉬 이민자 가정이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매서추시츠라는 점과 성당의 종소리.. 미키의 집에 걸려있는 십자가.. 인물들의 이름.. 이런 것들이 앞의 주장에 대한 논거가 된다. 그러고 보니, 샬린이 등장하는 술집 장면에서도 아이리쉬 문화가 풍겼었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통적인 아이리쉬 카톨릭계 집안이 되겠다. 뭐 정작 그들은 신앙심이라곤 전혀 없어 뵈지만 뿌리가 그렇단 얘기다. 이런 부분에서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보게 된다면, 디키와 미키가 경찰의 과잉진압에 고통어린 수모를 당하는 장면에서는 경찰국가 미국을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공권력이 너무나 세서 경찰이 시민을 제압하는데 어떤 물리적인 행사도 용납 가능한 희한한 국가이다. 소지품 압수하고 두들겨 패는 건 기본이고 총기난사까지. 공권력이 너무 물러 터져 경찰을 우습게 보는 것도 문제지만 저런 식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무고한 시민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심각한 사회위협이 되는 것이다. 민중의 지팡이가 민중의 창이 되어선 곤란하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영화의 미덕은 유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영화의 전제조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유머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유머라 함은, 단순히 몸 개그나 스탠드업 코미디 같은 자극적이면서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웃음의 방식을 넘어서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발생되는 삶의 지독한 패러독스와 같은 블랙 코미디가 핵심적 요소가 된다. <파이터>에도 장면 구석구석에서 이따금씩 발견되는 유머가 있다. 디키라는 인물은 외양에서부터 이미 웃음을 유발한다. 뒤통수에서 보여지는 땜빵 비슷한 자국만 봐도 '크크크'가 되니.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아들 디키를 보고 차 안에서 낙담하고 있는 앨리스에게 옆에서 디키가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은 슬픔과 동시에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움이 동반되는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고백하자면, 이 장면에서 약간 울컥했다. 디키가 부르던 노래 가사를 아는 이라면,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나의 행동과 정반대로 반응하는 타인들.. 그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절망감..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을 조소하고 조롱하고 있었다는 끔찍한 진실.. 그것을 타인을 통해 비로소 인식하게 된 수치스러움.. 결국 이 모든 것이 삶의 아이러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허탈한 웃음 뿐... 사실 영화 전체로 봤을 땐, 그저 짧은 분량의 스쳐 지나갈법한 사소한 장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고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디키가 약쟁이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샬린의 집에 찾아가 그녀로부터 온갖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미키를 위해서 샬린을 애달프게 설득하는데, 이때 디키의 진심을 처음으로 느낀 샬린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장면이 진정 감동적인 이유는, 두 편으로 갈라져 상대에게 삿대질하기만 바빴던 그들 모두가 미키라는 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겐 미키가 애정의 대상이자 유일한 희망이니까. 미키가 챔피언이 되는 결말에 이르면 감동은 배가 된다. 결국 디키의 희생이 변화와 성공의 초석이 된 것이다. 실제로 그날 거기서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의외의 행동은 '위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디키는 갱생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모두를 살리는 상생의 효과를 이뤄내며 구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디키의 용기 있고 과단성 있었던 순간의 그 행동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첫 모험이자 도전이었을 게 분명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승리의 주인공은 미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홀로 빛나는 별은 없다. 서로 빛을 반사하면서 상대를 빛나게 해주는 그들 모두가 별이다.
★★★☆
할리우드 영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진정한 파이터를 주인공으로 한 진정한 복싱 영화. 이런 게 진짜 영화다. 삶 이라는 또 다른 링에서는 그들 모두가 진정한 파이터이다. 어쩌면 링 밖의 세상이 링 안의 사회보다 더 치열하고 가혹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선 누구나 예외가 없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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