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가튼 (2004/미국)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SF, 스릴러 감독 조셉 루번 출연 줄리앤 무어, 도미닉 웨스트, 게리 시니즈, 알프레 우더드, 라이너스 로치, 로버트 위즈덤, 제시카 헥트, 앤서니 에드워즈 |
줄거리
남편 짐과 단둘이 살고 있는 텔리. 그녀는 14개월 전에 비행기 사고로 잃은 아들 샘에 대한 아픈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샘을 추억하기 위해 텔리는 아들의 옷장을 열어보는데 사진에도 앨범에도 그리고 비디오테입에도 샘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이웃, 정신과 의사, 심지어 남편마저 하나같이 샘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텔리는 망상증 환자로 몰린다. 그녀에게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다가오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텔리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고 있는 '애쉬'라는 남자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두 사람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한편 정체불명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고 그것과 맞서 싸워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일에도 힘을 합치게 된다. 어느덧 차츰차츰 다가오는 진실의 그림자는 마침내 이들 앞에 짙게 드리우며 충격의 전말을 드러내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이 영화를 두고 혹자는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평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에 이 영화를 이미 봤던 사람으로서, 비록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관계로 내게는 '용두사미'까진 아니었고, '용미사미' 혹은 '사두사미'가 (이 영화에 대한) 적절한 표현으로 떠올랐다. 근데 여기서 질문 하나. 단지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용미사미 혹은 사두사미가 됐을까? 반대로 이 영화를 난생 처음 봤다 치자.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용두사미'가(라도) 됐을까? 아마도 확신하건대, 답은 Negative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영화의 시작(발단 및 서두)부터 그리 창대하지 않았으며 결말이 보여준 허무함만큼이나 미미하고 시시했다.
영화 <포가튼>은 종래의 스릴러 장르 영화의 관습화된 패턴을 다소간 깨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의외로 일찍 터지는 반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가 푸른 색 옷감을 훑고 지나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뉴욕의 어느 거대한 강을 비추고 있었고 미세하게나마 춤을 추듯 알아서 움직이는 듯했던 옷감은 일렁이는 물결이었다. 이른바 카메라를 이용한 착시현상. 이렇듯 카메라(촬영)는 사실이나 진실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메라는 정직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반전(reversal) 영화 아니랄까봐 오프닝부터 관객을 테스트하네. 이름 모를 거대한 강을 거쳐 미국의 심장 나아가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뉴욕의 마천루 빌딩들을 부감으로 훑으며 지나가던 카메라는 최종적으로 어느 공원 한 모퉁이에서 그네에 몸을 실은 채 상념에 잠긴 한 여인네에게 다다른다. 그녀의 이름은 텔리. 히스테리컬한 인물 텔리는 하나밖에 없던 아들 샘을 잃은 후 날마다 샘의 방에 들어가 아들을 추억하며 슬픔에 빠진다. 사진.. 앨범.. 테입 영상에는 샘의 모습이 담겨있지만 텔리의 상실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왜? 그런다고 아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실체로서.. 그녀의 곁으로... 뮈소가 말했듯, 흔히 사람들은 사진 속에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담아두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진은 그리움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사람들은 영원을 기대하며 셔터를 누른다. 그러나 찰칵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은 영영 사라진다. 동영상도 마찬가지. 아들의 부재는 어느새 텔리의 삶을 갉아먹어 그녀는 정기적으로 상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부부 사이는 경직되어 냉랭하기만 하다. 상담 치료를 받기 위한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던 그녀의 외출이 사건의 시작이다. 평소완 다르게 갑자기 실종된(아들로 모자라 이젠 애마까지) 자신의 빨간색 볼보 차량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낯설지만(strange) 친절한 남자(a friendly man)의 등장에서 관객은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전달받는다. 뒤에 이어지는 먼스 박사와의 상담에서는 사라진 커피 잔을 찾느라 애쓴다. 이때까지도 관객들에게 의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텔리'이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텔리에게 기어코 일이 연이어 터지고 만다. 사진.. 앨범.. 비디오테입.. 그 어디에도 아들 샘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텅 비어있다. 오직 그녀의 뇌리에만 저장되어있을 뿐. 텔리의 남편 짐과 먼스 박사는 그녀에게(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충격적인 진실을 말해준다. 이게 현실이라며.. 샘이란 아이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텔리에 대한 관객들의 의심(의 내용)이 진실로 규정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영화는 반전을 통해 초장부터 관객의 기선제압에 들어간다.
그러나 텔리는 한사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며 물러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혹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자신의 진실이 외부에 의해 위협받는 것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 아닐까. 여기서 영화는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크게 두 갈래의 길로 나뉜다고 본다면, 하나는 인물이 망상증 환자로 밝혀지고 나서 치료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나아가는 심리 드라마가 있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진실과 사투하는 인물의 투쟁기적 전기(biography) 드라마로 방향타를 설정할 수 있다. 전자는 '뷰티풀 마인드'가 떠오르고 후자는 '데이비드 게일'과 '체인질링'이 연상된다. 물론 정확한 대입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갈림길이 생긴다. 후자의 경우, 인물이 진실과 사투하되 음모를 파헤치고 진실을 입증하는데 열을 올리는 심리 스릴러로 방향을 틀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영화 <포가튼>이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이분법적인 시각은 위험하다. 후자로 예를 든 '체인질링'이 미스터리 스릴러 측면에서 <포가튼>과 교집합을 이룬다면, '데이비드 게일'은 전기 드라마 성향이 강한 스릴러로서의 냄새를 더 짙게 풍긴다는 점이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방금 언급한 세 작품 모두 장르적으로 드라마 스릴러를 기본 토양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선 공통분모를 이룬다. 이 지점에서 다시 <포가튼>은 그들('데이비드 게일'과 '체인질링')과는 차별화를 꾀하며 다른 노선을 걷는데, SF 장르를 껴안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흔히 초자연적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불리는 장르가 영화 <포가튼>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stance)이다. 바로 이 지점이 <포가튼>이 여타 두 작품과 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동시에 <포가튼>이 걸어간 그 길은 결과적으로 비극의 길이 되었다. 괜한 쓸데없는 호기심에 무리수를 두다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길 잃고 헤매다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이 어떠한 장치도 없이 어느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갑작스레 구원받는 꼴이다. 초반에 극 전개가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평범(normal)하게 나가던 영화가 순간 느닷없이 어떤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존재를 끌어들일 때, 이미 플롯은 작살이 나고 관객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러더니 영화는 기어코 외계인이란 존재를 인위적으로 결말을 봉합하는 도구로서 활용하는 비열한(?) 작태를 보인다. 이 얼마나 뜬금없고 볼썽사나운 연출인가. 한마디로 자충수를 둔 것이다. 이 영화가 악평을 받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치열한 고민 없이 그저 안일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플롯을 전개해나간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황당함에 치를 떨며 극장 문을 나선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비논리적인 비개연성 전개로 일관하다 성급하게 결론짓는 작위적인 해피엔딩이 후유증으로 남기는 허무함과 배신감은 관객들을 언해피(unhappy)하게 만드니, 가짜 해피엔딩이라 욕먹어도 할 말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에는 장르영화의 문법이라는 게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규칙 내지는 관습이라 표현해도 되겠다. <포가튼>이 장르영화로서 취하는 형태는 버디무비(buddy movie)이다. 영화는 주인공 텔리가 진실과 싸우는 플롯의 긴박감 넘치는 전개를 위해 '애쉬'라는 남자인물을 그녀에게 붙여준다. 보통 할리우드에서는 액션 스릴러나 코믹 액션 또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 전통적으로 즐겨 사용되는 방식이다. 특히 형사(경찰) 영화들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아무래도 혼자서(더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냘픈(?) 여성이다) 문제를 해결하긴 버거우니 짝을 이뤄 함께 장애물을 극복하고 헤쳐 나가는 양태를 구축하게 된 것 아닐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버디무비가 지닌 특장점에 있는 듯싶다. 버디무비의 특성상 두 캐릭터가 주고받는 대화(dialogue), 거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이 무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다 이야기적 요소를 다량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에서 버디무비의 장치는 필연적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참고로 이 때 짝은 서로 비슷한 성격의 커플보다 판이하게 다른 즉 극과 극의 반대되는 성향의 두 인물이 짝패를 이루는 게, 극의 흥미를 더하고 시너지 효과를 크게 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 말할 수 있다. <포가튼>에선 이성(異性) 커플이다. 그것도 유부녀와 유부남 커플. 재밌는 건, 유부녀가 유부남과 피치 못할 현실적인(?) 이유로 동거를 하는 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 비스무리한 로맨스에 빠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지극히 할리우드적인(미국적인) 설정인데, 내 개인적으로는 정서적으로 다소 거부감 내지는 괴리감이 들었다. 왜냐? 난 뼛속까지 한국인이라서. 근데 이 두 사람, 성별도 다르고 자식에 대한 기억 여부도 상반된 차이를 보인다. 혹 버디무비의 공식에 충실하기 위해? 답은 땡! 중요한 건, 결정적으로 다른 모든 차이를 무력화시킬 힘을 가진 이들만의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말도 안 되게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를 되찾아야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이들 앞에 똑같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또 하나의 반전을 보여준다. 사실은 텔리의 주장이 진실이라는 결론. 그러니까 이제껏 텔리의 주변인들(남편 짐, 엘리엇, 먼스 박사)이 진실을 은폐하고 그녀를 미친년으로 몰고 갔던 셈이다. 일명 뻐꾸기 둥지 사회. 여기 질문 하나가 있다. 과연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뭘까?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잣대로 놓고 보면, 다수는 정상이고 소수가 비정상이 된다. 근데 이게 비단 영화에서만 벌어지는 일인가? 여타의 작품들에서도 이런 상황은 심심찮게 보여진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냉혹하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의 차이를 아는가? 아주 심플하게 한번 가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회에서 마주하는 보통의 일반인 그러니까 소위 말해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인이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결론은.. 절대적인 건 없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그럼 다시 반론, 정신병원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정상과 비정상의 여부를 규정지을 수 있나? 반대로 그들이 바깥세상에 놓였다면..? 무조건 정상? 어떻게 보면, 본질은 그대로다. 다만 물리적인 공간이 바뀌었을 뿐. 결국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또는 사회가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에 호응하고 부합하며 무리 없이 적응해나가는 사람들이 정상인가? 사회가 규정한 보편성에서 단 손톱만큼이라도 벗어나면 그건 비정상이고? 사회적 도그마를 깨고 피상적인 잣대를 거두고 본질만 놓고 본다면, 다수가 비정상이고 소수가 정상이지 않을까? 가끔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불특정다수나 특정 세력 혹은 한 개인을 지칭하면서 싸이코.. 똘아이.. 정신병자.. 이런 단어들을 마구 써대는 인간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내가 살면서 얻은 깨달음 중에 이런 게 있다. 내가 타인에게 하는 욕이 실은 나를 향하고 있음을. 내가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건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화살을 겨누는 증오의 대상을 경멸하면 할수록 그를 닮아가게 되어있다. 이것이 삶의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가 아니고 뭐겠나. 원래 지가 똘아이면 애꿎은 남에게 똘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거든. 일종의 거울 효과라 보면 되겠다. 자신의 열등의식(피해의식)과 치부를 타인에게 투영시키고 전가하는 찌질이들의 거울 깨뜨리기 발광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에 만약 똘아이(비정상)가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똘아이다. 감히 누가 함부로 정상과 비정상을 지멋대로 나누고 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정신질환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제 진실의 동반자가 한명 더 늘었다. 애쉬의 (딸 로렌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 그러므로 이들에게 기억의 공유가 가능해졌다. 애쉬의 기억이 작동되자, 이들은 불구적 관계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완전에 근접한 관계로 거듭난다. 말 그대로 진정 하나가 된다. 하나의 공통된 목표가 생겼으니 이제 남은 건 행동개시 뿐. 텔리와 애쉬의 애정전선의 형성을 도덕적 윤리의 잣대를 들어내고 보면, 논리적인 개연성은 충분한 듯싶다. 유사한 상실감을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을 크게 하는 요인이 되어 관계의 진전을 가능케 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영화가 로맨스 장르는 전혀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길. 텔리가 애쉬에게 딸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데 도움을 준다면, 애쉬는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열쇠를 텔리에게 제공한다. 경제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애쉬는 남자로서 텔리에게 보탬이 되는 헌신적인 존재로 자리한다. 굳이 규정하자면,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해서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통상적인 버디무비의 공식을 깬 이례적인 케이스랄까? 반면에 텔리와 남편 짐은 (그녀의 대사에서도 언급되듯) 상극에 가까운 커플인 듯싶다.
끝난 줄만 알았던 반전이 또 등장한다. 마지막 반전.. 모두를 아연실색케 만들었던 논란유발의 그 반전.. 결국 이 모두가 외계인의 장난기 다분한 실험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말. 사실 그래서 짐과 엘리엇도 그들의 희생자에 불과했다. 의도적으로 텔리를 광년으로 몰아붙인 게 아니라 이들(짐과 엘리엇) 역시 외계인의 계략에 의해 기억을 저당 잡힌 것이었다. 깜짝 놀랄만한 반전은 사실 따로 있었다. 먼스 박사는 이 모든 진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 물론 그가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방관자는 또 다른 가해자라는 주옥(?)같은 명제를 떠올린다면 그 역시 가해자가 맞다. 불의에 대한 침묵은 악의 편이다. 가해자의 악행에 암묵적으로 협조를 한 셈이니 비난의 화살을 피하긴 어려울 터.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대입시켜보면, 아주 잘 들어맞을 거다. 어쩌면 방관자가 가해자보다 더 악랄하고 비겁한 존재일 수 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 제대로 뒤통수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케이-펙스'와 이 영화를 비교해봤다. 두 작품 다 SF 드라마 장르를 끌어안고 있고 망상증이라는 반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다만 <포가튼>이 '케이-펙스'보단 미스터리 스릴러적 요소가 더 가미되어있다. 이들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포가튼>이 초반에 망상증 환자라는 반전을 터뜨리고 그것을 다시 뒤집어 원점으로 돌린 다음 외계인이란 존재를 결말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했다면, '케이-펙스'는 주인공 프롯이 외계에서 온 존재인 것처럼 플롯을 진행시키다가 막판에 망상증 환자라는 반전(?)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데에 있다.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케이-펙스'에서의 그 반전은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반전이라기 보단 주인공의 숨겨졌던 아픈 사연을 그저 끄집어내 플롯에 얹어주는 효과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건 두 영화가 (플롯 전개의 구조 혹은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는 셈이다.
짧은 컷과 길지 않은 시퀀스, 거기다 빠른 템포와 리듬의 편집으로 완성된 전형적인 현대의 할리우드 스릴러 <포가튼>. 제목의 의미는 다들 알다시피, 잊혀진.. 잊혀진 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잊혀진' 대상은 텔리와 애쉬의 아이들(샘과 로렌)을 포함한 캠프행 비행기에서 납치-실종된 6명의 아이들을 가리킨다. 물론 의미를 좁히면, 영화에서는 샘과 로렌을 지칭하는 단어(제목)가 된다. 이쯤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한 철학적 담론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한번 각자 자문해 봐라. 과연 극중의 텔리처럼 기억하려 애쓰는 행동이 혹은 기억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좋은 것일까? 영화는 긍정의 답안지를 내놓는다. 물론 당연하다. 영화에서는 기억을 잃는 순간 진실이 위협받게 되니까. 고로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 단지 잃는 것이 그게 전부는 아닐지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이 남아있다. 텔리가 아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관객들이 영화 한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템의 상실이 영화 제작의 좌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설령 영화가 만들어 진다해도 문제는 남는다. 애초의 목적과 의도는 상실된 채로 전혀 다른 영화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 하긴 막상 영화를 보니, 영화 제작의 좌초가 나을 뻔 했다. 결과물이 영화의 좌초로 이뤄졌으니까. 그러나 내가 당긴 질문의 화살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표적으로 향한다. 내가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기억은 고통이고 망각은 축복이다. 조금 순화시켜서 재표현하면, 기억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며 때론 망각이 정신건강에 유익하다. 기억의 역사 못지않게 망각의 역사도 필요하다. 그것이 역사와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이뤄 가는데 윤활유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걸 기억할 필요는 없다. 잊을 건 잊어야...
내가 이 영화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가 바로 외계인의 등장이다. 이쯤에서 외계인을 소재로 한 수많은 할리우드 작품들을 새삼 상기시키게 된다. 굳이 열거하진 않겠다. 이것은 결국 미국인들의 의식을 대변하는데, 외계(인)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끊임없이 미지의 행성을 넘보며 탐험하려는 그들의 우주적인(cosmicly) 세계관 그리고 진취적인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우주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인류 최초로 달 탐사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을 탄생시켰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UFO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기심은 극에 달해 진위여부와 함께 여러 낭설들이 파다했다. <포가튼>에서 NSA 요원이 외계인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터무니없는 설정은 아닌 게 실제로 NSA나 CIA와 같은 미국 내 정보기관과 외계인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가설이 제기됐던 것으로 일전에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텔리가 자신을 추격해오는 연방요원을 따돌리고 좁다란 길을 따라 세차게 달려오다 간신히 일신을 피하곤 올려다본 하늘에서 나타나는 UFO 실루엣을 띄는 구름의 이미지는 일종의 복선으로 외계인의 존재를 넌지시 드러내는 징후이자 음모론의 징조를 알리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영화 내내(회상 장면만 빼고) 단벌숙녀로 나오는 줄리앤 무어는 전체분량의 거의 90% 수준을 상회하는 등장빈도수를 자랑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역시 단벌신사로 등장하는 도미닉 웨스트는 기대이상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녀 곁을 지키는 보디가드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다. 텔리의 과하고 지나친 행동으로 볼 때, 그녀가 자식에 대해 갖는 감정은 사랑을 넘어서 집착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텔리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삭제당하지 않는 인물이다. 비결이 뭘까. 다름 아닌 아들에 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각별한 애정과 비록 그것이 집착에 가깝다 해도 끝내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려한 집념이겠지. 사랑이란 말을 유일하게 대체할 수 있는 단어는 그리움이다. 샘에 대한 그녀의 각별한 애정도 그리움의 산물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농도 짙은 그리움이 그녀를 살리고 모두를 살렸다. 외계인만 빼고. 다른 비결은 없을까. 샤머니즘에 입각해서 이유를 캐자면, 그녀는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선민사상이 아직 유효하다면, 그녀가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 아닐까싶다. 이건 어떤가. 기가 세 보이는 그녀의 기질상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 타입이라 예외적으로 (기억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면 다소 엉뚱한 분석이 되려나?
영화에서 재밌는 부분 중의 하나는 텔리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먼스 박사의 리액션이다. 영화 초반, 텔리와의 상담에서 먼스 박사가 불안증상을 보이는 그녀에게 해주는 조언은 대개 이렇다. 당신이 기억을 만들어낸 거예요... 텔리의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는 앞뒤생각 않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지금 공황발작이 온 거에요... 이렇듯 그녀의 어떤 말에도 그는 클리셰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는 한결같은 태도를 보일 뿐이다. 바로 그 전화 장면에서, 텔리가 자신(환자)의 말은 정작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다짜고짜 위치부터 묻는 먼스 박사에게 한 말.. 저를 먼저 믿는 게 우선이에요. 순간 통쾌감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지닌 현실풍자의 매력이자 힘이다. 허구의 세계가 현실세계와 접합될 때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와 재미가 있다.
이 영화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그네(swing)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텔리와 애쉬가 처음 만난 곳에서도, 둘이 접선을 시도한 장소도(휴대폰을 이용하면 될 걸 굳이 텔레파시라는 아날로그적 장치를 동원한 이유는?), 마지막에 이들이 재회하는 공간에도.. 이처럼 플롯 상으로 변곡점이 되는 중요한 순간에 그네가 어김없이 늘 거기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그대로 대입시켜보면, 발단->전개->결말이라는 각각의 단계에서 그네의 등장은 저마다 (내용상으로 & 느낌상으로) 의미하는 바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일종의 터닝 포인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은 공통된 부분으로 풀이된다. 특히 텔리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어김없이 그네에 몸을 싣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그네 장면으로 열고 닫는 셈이다. 처음과 두 번째에서는 어둡고 음산한 느낌에 극 전개의 동력으로 삼는 긴장감 유발의 역할을 한다면 그와 달리 엔딩에서는 밝은 느낌을 선사하며 말 그대로 극적 갈등의 해소와 문제 해결이라는 의미의 매개체로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그네가 가지는 (철학적-심리학적) 메타포는 뭘까? 일정한 주기로 계속 반복되는 그네의 진자운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과 묘하게 겹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네의 역동성(?)은 굴곡 많은 우리네 삶과 공명을 이루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 샘을 되찾은 텔리는 역시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온 로렌을 발견하더니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즐겨 찾는 장소인 그네 쪽으로 가니 기다렸다는 듯 그곳엔 애쉬가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텔리와 달리 기억의 공백으로 과거의 일들(로렌을 비행기에서 잃은 지점부터 시작해 텔리와의 일들까지)은 망각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점으로의 회귀를 행복하게 누리는 애쉬. 그러나 텔리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애쉬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의외의 센스(?)를 발휘한다. 놀랍게도 기억과 망각의 충돌은 의도적 망각과 순수적 망각의 조화로운 만남으로 무화된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두 사람 모두 행복한 이유는 주어진 결과가 이들이 그토록 바랬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린다. 늘 혼자 그네를 타던 텔리에게 영화의 엔딩은 그녀에게 친구(현실의 세계에서 이들은 각자의 가정이 있는 이웃의 관계이므로)를 선물로 안겨준다. 그건 애쉬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삶의 변화가 필요할 때, 조용히 그네에 몸을 맡겨보자. 이미 내 옆에 누군가 그네를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그네에 몸을 맡겨버린 내게 살며시 다가오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옆에 드리우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말없이 뒤에서 살며시 그네를 밀어주는 따스한 손길이 내 등에 살포시 닿을 거야. 언제든 그네에서 떨어질 때까지.
사족인데, 영화에서 내 눈을 번뜩이게 한 장면이 있었다. 텔리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중 하나인 앤 포프 형사가 텔리 사건에 대한 진실의 내막을 알게 되자마자 점이 되어 하늘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언급한 이유는, 요전에 본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이것과 너무나 흡사한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점이 되어 사라지신 영군의 외할머니와 오버랩 된 순간이었다. 제작년도로 봤을 때, 혹 박찬욱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잠깐 하긴 했다. 그런데 하늘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이 점점 피부로 깊이 와 닿는 이 형국에서, 그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인용과 패러디, 오마주는 얼마든지 영화라는 예술영역 안에선 자유로운 표현이 허용 가능하고 존중되며 그렇기에 작품마다 서로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창작을 공유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이젠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한다.
★★
반전이 일찍 터진다했더니 이러저리 비비꼬다가 뜬금없이 외계인을 끌어들이는 황당함으로 급하게 결론지으며 끝나는 허무한 해피엔딩. 정말 욕 나온다. 배우가 아깝다. 하여간 미국인들의 외계인에 대한 욕망이란..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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