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각설탕

찰나21 2012. 12. 15. 00:45

 

 
 
 각설탕 (2006/한국)


장르 드라마, 가족, 스포츠
감독 이환경
출연 임수정, 박은수, 유오성

 

 

줄거리

제주도 푸른 목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은'은 어릴 적부터 유난히 말을 좋아하고 말과 친하게 지내는 아이다. 특히,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말 '천둥'이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각별해 둘은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따르며 함께 성장한다. 자신 또한 엄마 없이 외롭게 자랐기에 그녀에게 천둥이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것.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가 먼 나라 홍콩으로 팔려가면서 둘은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다. 2년이 흘러, 과천에서 생활하며 여자 기수의 꿈을 키워오던 시은. 우연한 장소에서 운명적으로 '천둥'이와 마주하게 되고 둘은 서로를 알아보며 감격적으로 재회한다. 시은의 각별한 지도로 '천둥'이는 조금씩 경주마로서 실력을 다지게 되고 둘은 '경마대회'에 함께 출전하게 된다. 과연 시은과 '천둥'이는 환상의 짝꿍이 되어 잘 해낼 수 있을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를 다시 봤다. 신파의 힘은 전에 봤을 때보다는 약발이 떨어져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더 이상 이런 식의 인위적으로 감동을 쥐어짜는 연출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 <각설탕>은 몸소(?) 증명해 보인다. 음악의 과용 남발은 특히나 이 영화에서 감동을 떨어뜨리는 장애요소가 되고 관객에게 짜증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지나치게 감정을 자극하려는 듯한 다분히 처량하고 신파스러운 멜로디의 음악은 시각화되어 보여지는 장면과 함께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을 선사한다. 솔직히 말해, 민망함 보다는 괴로움이 더 크다.

 

또 하나, 관객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요소는 이야기에 있다. 방금 말한 '이야기'란 이야기 자체를 의미한다. <각설탕>은 이야기 구성은 꽤 탄탄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각본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플롯은 나름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춘 듯하다. 의외로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플롯의 연결과 자국이 보이지 않는 깔끔한 이음새는 칭찬할 부분인 것 같다. 영화에 관해선, 지구상 최고라 자부하는 할리우드에서도 쓰레기 무비(garbage movie)들은 양산된다. 황당무계한 하질 스릴러에서부터 깡통소리 나는 삼류코미디까지. 그것들에 비하면, 이 영화 <각설탕>은 무척이나(?) 준수한 수준이다. 문제는 내러티브(narrative)이다. 일단 스토리 자체가 뻔한데다 그것을 꿰는 방식 혹은 행위가 즉 플롯이 전형성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진부하고 낡아빠진 내러티브가 되고만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이다. 보다 전문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내러티브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야기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 얼마만큼 신선하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썰을 풀어내느냐에 영화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성패(成敗)에서 성(成)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재미와 감동 그리고 메시지가 있어야한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성패는 영화의 상업적 성공여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자본의 논리에 입각해서 판단할 수만은 없으며,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없으니까. 만약 흥행이 유일한 잣대라면, <각설탕>은 성공한 작품에 해당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영화는 일종의 마약과도 비슷하다. 아무리 좋은 향기도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두통과 환각을 일으키는 지독한 냄새에 불과하듯이, 겉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버섯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독버섯인 법이다. 대다수의 단순한 관객들은 꼼짝 못하고 이런 최루성 멜로 감성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이성을 마비시켜 오로지 관객의 감성에만 기대는 약아빠진 태도로서 절름발이 관객들을 소구층으로 하는 섬뜩한 술수이자 흔해빠진 전략이다. 그래서 난 이런 영화에 분노한다. 화려한 포장지를 벗겼더니 알맹이 없는 빈 상자를 들고 있을 때 느낄법한 허탈감 비슷한 게 밀려온다. 그리고는 진공상태의 그 빈 공간에 내가 채울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럴 여력조차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이자 일종의 사기에 가깝다. 그러나 이 또한 나만의 생각일까. 대다수 관객들은 이 영화에 호의적인 평을 내리며 찬사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던 게 사실이다. 그들에겐 (이 영화가 보여준 수법과 태도가) 사기가 아니라 진실이며 기만이 아니고 기쁨인가보다. 한마디로 선물 같은 영화? 보통 이런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절름발이 관객들이 고정 레퍼토리로 하는 말이 있다. -머리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세요- 이게 바로 그들이 절름발이 관객으로 불리는 이유다. 머리와 마음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주장은 어폐가 있다. 좀 쉽게 정리하자면, 그들이 이 영화를 좋게 봤다면 마음으로만 봤기 때문도 아니고 순수한 심장을 지녔기에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단순한 뇌로 걸러진 노폐물들이 심장으로 흘러내려와 생긴 결과로 봐야할 것이다. 단세포의 뇌를 순수한 심장으로 오인함으로 야기된 언어도단에 다름 아니다.

 

알다시피, 영화는 기술(technology)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skill)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다른 종류의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의내리는 영화에서의 기술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들 쉽게 떠올리는 외적 기술과 다소 속에 감춰져 난해하게 드러나는 내적 기술로 나뉜다. 여기서 외적 기술은 촬영, 편집, CG, SFX와 같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내적 기술은 내러티브, 연기, 세부적인 의미의 연출과 같은 주로 인물의 내면과 심리 표현, 사회적 철학적 의미와 메시지 그리고 갖가지 메타포에 관한 일종의 무형의 기술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적 기술(technology)은 내적 기술(skill)을 이기지 못한다. 영상이 내러티브를 압도하여 내적 작품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내적 기술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잘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부함을 넘어서는 실험 정신과 독창성이다. 이게 관건이다. 그에 따라 그저 비주얼로 떡칠한 영화가 되거나 영상이 곧 내러티브로 치환되는 유니크한 작품이 되거나. 거스 밴 샌트의 '엘리펀트'.. 왕가위 영화들..이 후자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왕가위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자백한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빼놓음 섭하지. 더 찾아보면 이들 작품 외에도 꽤 많이 있을 것이다.

 

<각설탕>에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건 말 경주 장면들이다. 한국영화가 기술적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 개봉) 당시에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의 - 말 경주 장면들- 촬영은 꽤 놀라운 수준이다. 요즘 세대야 우리 영화에서 이런 장면들을 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일반적인 테크닉 수준 정도로 여기겠지만, 한국영화의 과거(그렇다고 너무 먼 과거가 아닌)를 알고 있고 일정부분 경험했던 나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매금은 아니다. 근자에 나온 한국영화라고 해서 다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반대로 과거의 충무로 영화들 중에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며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도 꽤 많았다. 이건 내 짧은 사견인데, 요즘의 충무로는 지나치게 매끄럽고 잘빠진 영화들을 주로 양산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마치 웰메이드(well-made) 영화가 상업영화의 표준처럼 제시되면서 다소 과도하게 그것을 지향한 탓에 생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인지 아날로그 시절의 한국영화가 간혹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땐 영화들이 정제되지 않은 투박함을 매력으로 지니고 있었고 다소 엉성하지만 순수했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국영화의 지형은 시대적 환경과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시스템의 교체가 가져온 결과라고 봐야겠다.

 

내 생각에 <각설탕>은 영화로 만들면 안 되는 작품이었다. 옛날로 말하면 베스트셀러 극장이나 요즘 같으면 드라마스페셜 그것도 아니면 외국의 경우처럼 TV용 영화로 제작되어야 옳았다고 본다. 장편극영화로 만들기엔, 한마디로 아깝다. 솔직히 말해, 말 경주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남는 건 뭐지? 주제(theme)는 텅 비어있고 그저 예쁜 동화 같은 최루성 신파놀음만 있을 뿐이다. 이런 말 그대로 미니 사이즈(mini size)의 이야기에 런타임 120분이 넘는 장편극영화는 필름 낭비이며 돈 지랄이고 배우들과 스탭들 개고생 시키는 못할 짓이다. 극중에서 장 마주의 대사 한 꼭지를 빌려서 내 나름대로 이 영화에 한마디 쏘아붙이자면.. 주제를 알고 덤벼야지. 영화를 보면, 감독의 밑천이 여실히 드러난다. 바닥 안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써본들 무엇하랴. 그렇게 덮는다고 덮어지는 게 아닌데. 영화에서 보여준 딱 거기까지가 감독이 가진 역량의 한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조금 전 잠시 언급했던 내용인데, 이 영화는 두 시간이 넘는 런타임을 기록한다. 보통 이런 장르(드라마, 가족)의 영화는 90분에서 120분 사이에 런타임을 찍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각설탕>을 보다보면, 영화 말미에 보여지는 장면들은 사족으로 느껴지며 영화가 늘어지는데 크나큰 공헌을 한다. 특히나 라스트 씬(last scene)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극적 감동의 고조를 끌어내기 위해 시간을 끄는 연출의 양태는 관객에게 일종의 피로감을 유발시킨다. 하다못해 스릴러 장르의 '올드보이' 같은 대작도 런타임이 두 시간을 넘지 않는데. 감독의 다음 작품 '챔프'는 <각설탕>보다도 런타임이 더 길다. 하여간 대책 없는 감독이다. 

 

그러고 보면, 이환경 감독은 말(馬)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가보다. 아님 집착인가. 연달아 두 작품이나 말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8 마일'에 나온 대사처럼, 사람이 이름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름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고.. 그래서 두 작품에서 모두 일관되게 환경(제주도를 풍경으로) 친화적인 영화를 만들었는가보다. 말을 소재로 한 영화는 충무로에서도 최근에 '챔프', '그랑프리' 이런 작품들이 나오면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는 추세에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교적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말(horse)에 관한 소재의 영화들 중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씨비스킷'이 있다. 참고로 '씨비스킷'은 당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 영화이다. 비교적 최근의 영화로는 '세크리테리엇'이 있다. 그리고 엇비슷한 내용으로 <각설탕>과 비슷한 시기에 먼저 개봉해 표절의 피해자로 언급되며 이슈가 됐던 '드리머'가 있다. 무엇보다, 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로버트 레드퍼드의 '호스 위스퍼러'이다. 같은 값이면 한국적인 정서의 우리 영화 <각설탕>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호스 위스퍼러'가 할리우드 영화이긴 해도 국적을 떠나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인데다 무엇보다 절제된 감정을 담은 연출과 <각설탕>과는 비교도 안 되는 푸르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말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시각적으로 전하는 비경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이니 답은 뻔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삶에 대한 성찰과 진지함을 숙연한 자세로 담아낸 점이 '호스 위스퍼러'라는 영화를 지금껏 잊지 못하는 작품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각설탕>은 아동 취향의 유아적인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전부터 하나 따지고 싶은 게 있었다. 대체 우정출연과 특별출연의 기준이 뭔가? 그것들은 어떻게 규정되어지는 것인가? 이 영화에서 유오성은 우정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근데 아무리 봐도, 그는 분명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연 혹은 임수정(그녀는 단독주연이다) 다음으로 비중 있는 주연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우정출연인가? 정식출연이지. 당연히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관습은 반복된다. '님은 먼곳에'의 엄태웅, '천하장사 마돈나'의 백윤식, '달콤한 인생'의 황정민.. 이들 모두가 각각의 해당 작품에서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더 웃긴 건, 황정민은 그 영화로 그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전세계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오죽하면 '마이웨이'에 출연한 오다기리 조가 인지도에 비해 비중이 다소 약하다며 특별출연 혹은 우정출연으로 크레디트를 올려주겠다는 제작진의 배려 아닌 배려를 거절했을까. 덕분에 오다기리 조는 당당하게 주연으로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게 정상이다. 할리우드에는 카메오 출연이라는 게 있지만 그것은 유명배우가 잠깐 영화에 등장하는 일종의 깜짝쇼 기능을 할 때 사용되는 경우이고, 엄연히 극을 이끌어가거나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면 높은 인지도와 상관없이 일반적인 크레디트를 사용한다. 설령, 역할이 보잘 것 없고 미미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우리처럼 특별출연이니 우정출연이니 따위의 쓸데없는 라벨은 붙지 않는다는 거다. 충무로의 주먹구구식의 후진적인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관성 없는 제멋대로의 엉터리 심의기준.. 홍보의 장으로 변질되어 상업성으로 추락한 신뢰도 빵점의 시상식.. 영화 관계자들 모두 각성해야한다. 비록 우정출연(?)이라는 불명예를 달았지만, <각설탕>에서 유오성의 연기는 나름 인상적이다. 아직도 '친구'와 여타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살벌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유오성이기에 <각설탕>에서 보여준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연기가 처음엔 조금은 낯설고 의외로 다가왔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동화된 그의 모습에 놀라고 파격이라고까지 느끼면서도 금세 영화 속 그에게 적응해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마디로, 대단한 배우다. 극중에서 임수정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오태경이 '올드보이'에서 했던 대사를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역시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된다는 건 참 안 좋은 거다... 누구보다도 <각설탕>에서 제일 도드라진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김 조교사 역할을 맡은 최학락이 아닐까 싶다. 어쩜 그렇게 얄미운 캐릭터를 얄밉게 잘 소화해내는지 브라보(bravo!)를 외칠 수밖에. 이런 게 바로 씬 스틸러(scene stealer)의 위엄이 아니고 뭐겠나. 알고 보니, '라이방'이란 영화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고 인디 쪽에선 꽤 알아주던 배우인 듯하다. 단독주연을 맡은 임수정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 <각설탕>에서 임수정의 연기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솔직히 보기 불편했다. 감정적으로 과장된 그녀의 연기가 거슬렸다. 감독의 연출 탓도 분명 있겠지만. 더구나 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이고 다소 과대평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더 싫다. 다만 임수정의 아역을 맡은 김유정은 임수정과의 싱크로율에서 이미지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일치를 보여주는 캐스팅이었고 연기도 꽤 만족스러웠기에 그나마 감정적 불편함이 조금은 상쇄되었다고 스스로 자위해본다.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자면, (비록 이조차도 진부하긴 해도) 인간과 말의 교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은과 천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물론 말(horse)은 말(speak)을 못하지만)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듯 서로의 심중을 꿰뚫어본다. 윽박지르는 것이 아닌 부드러운 속삭임과 사랑으로 쓰다듬는 손길로 말과 기수(사람)는 하나가 된다. 일명 인마일체(人馬一體). 바로 이 지점이 영화에서 감정선을 미묘하게 건드리는 감동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감독은 일을 그르치고 만다. 감정과잉의 실수가 감동제로의 실패로 귀결된 것이다. 시은이 천둥에게 채찍을 사용하자 말은 신체적 상해를 입고 시은은 정신적 상해를 입는다. 결과 또한 참패다. 그러나 그녀가 채찍을 버리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천둥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사랑으로 대하자 시은은 연달아 일등을 쟁취한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 인간은 누구나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 굳이 윽박지르고 화내지 않아도 내가 하는 말 속에 강요나 설득이 들어가 있으면 상대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도리어 거부반응을 보이며 역정을 낼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엔 짐승만도 못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자주 보게 되니.. 씁쓸한 현실이다.

 

이 영화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는 이야기 전개상의 어떤 고조된 극적 흐름을 만들기 위해 다소 지나치게 무리수를 두는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은이 오빠로 따르던 마천복의 끔찍한 낙마 사망이라든지.. 도로 한복판에서 천둥과 재회하는 시은의 울음바다 장면이 그것에 속한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갈등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이제는 내부에서 갈등을 만든다. 천둥이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식의 인위적으로 부여한 극적 갈등과 무책임한 결말이 작품의 격을 더없이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이 영화의) 이런 결점들에 대해 개의치 않게 여긴다. 사실 그들은 (이 영화에서) 뭐가 문제인지조차도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가끔 이 나라에 살면서 숨 막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극히 단순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할 때이다. 사고판단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 대다수는 논리라고 감히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피상적이고 단세포적인 시각으로 모든 사물과 현상을 규정지어버린다. 이러한 도그마는 사회 전체 거의 모든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져 잘못된 패러다임의 구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천민자본주의.. 아이돌 범람이라는 문화적 권력.. 인문학 거세.. 종교 전쟁.. 왕따.. 자살.. 사회적 양극화.. 온갖 범죄의 온상 등으로 구체화된다. 그 속에서 소수자의 외침은 늘 다수의 의견에 묻혀 입도 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다. 참 답답하고 회의가 느껴진다.

 

<각설탕>은 피상적으로 보면, 매우 건전하고 착한 영화처럼 보인다.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영화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도 않고 논란을 야기하는 이슈적인 접근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폭력적이지도 않고 선정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그럼 단가? 바로 그 점이 도리어 내겐 불쾌감을 준다. 겉으로 온갖 착한 척은 다하며 위선을 떨지만 실상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보고나서도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건, 멋진 자연풍광과 경마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말달리는 장면 외에는 없다. 그게 영화의 전부다. 다수 관객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온갖 설탕과 조미료를 첨가한 그래서 불량영화라는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 것. 시종일관 억지눈물만 연신 짜내는 영화를 보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은 없다. 관객들 눈치 본답시고 안전빵으로만 가는 영화는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하나 사소한 궁금증이 일었다. 이 영화에서 홍콩이 가지는 의미가 뭘까. 알다시피, 영화 도입부에 천둥이가 팔려가는 나라가 홍콩으로 나온다. 천둥이를 모질게 학대하는 악질 보안관이 홍보에 열을 올리는 가게 이름은 '홍콩 나이트클럽'이고 딸을 말똥 냄새 안 나게 키우겠다며 호통 치는 시은의 아버지가 한 말에 판돌이 딴청을 부리며 흥얼거리는 노래도 '홍콩 아가씨'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좀... 그러나 개인적으로 추측컨대, 아마도 별 의미 없이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이런 영화에서 어떤 철학적 의미와 메타포를 캐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짓거리가 될 테니까. 영화에서 시은의 아버지와 판돌의 관계는 일종의 유사 부부의 형태를 띤다. 그러고 보니, 이건 메타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들의 관계를 퀴어코드(queer code)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시은의 아버지가 남편 역할, 판돌이 아내 역할.

 

난 개인적으로 경마에 대해선 전혀 아는 지식이 없다. 만약 영화 속에 나오는 내용이 그 세계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면, 경마는 상당히 추악하고 비열한 종목이다. 어떻게 보면, 실력으로 일등이 된다기보다 전략이나 권모술수를 통해 일종의 킹메이커의 적극적인(?) 가담과 협조를 등에 업고 일등을 탄생시키는 치밀하게 계산된 살벌한 게임에 가깝다. 이 세계에서는 규칙을 지키는 자가 바보이며 어기는 자는 승자가 된다. 정직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패자가 되고 잔대가리 굴리며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인간이 정상으로 취급받는다. 마치 지금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축소판이라고나 할까. 비열한 승부의 세계.. 이곳에서는 나이도 소용없고 짬밥도 필요 없으며 착한 성격은 무용지물이고 순수한 영혼은 갈기갈기 찢긴 채 나가떨어진다. 오직 꼼수에 의한 실력만이 살아남는 곳이다. 그러나 속단하긴 이르다. 정의의 불씨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얼마 안 남은 순수한 영혼들의 존재로 인해.. 이들이 더욱 많아져야 이 땅에 정의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며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갈 수 있을텐데... 철이는 시은의 경고대로 단물 다 빠진 껌처럼 곧 바닥에 버려지겠지.. 자업자득.. 뿌린 대로 거두는 것 일뿐. 이게 바로 절대 권력에 빌붙어 개처럼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저지른 악행의 최후가 아니겠나. 그래놓고 철이는 시은에게 주제 넘는 충고를 했었다.. 적반하장.

 

엔딩 크레디트의 여백을 장식하는 스틸 사진 이미지들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단순히 말(horse)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동물 특히 애완동물에 대한 감독의 남다른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요즘 들어 부쩍 동물 보호 운동과 그에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지는 걸 실감하곤 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동물 보호 좋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이 엄연히 동물도 동물권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언제나 과격단체와 강경파들이 문제다. 동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과열 양상을 보이며 도를 넘어선 언행들이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부터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그들을 인간과 동급의 가족 같은 친근한 존재로 여겨왔던 서양과 달리 아직 우리는 그런 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과도기에 놓여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물에 대한 인식이나 친근감이 없는 사람들도 동물 학대가 범죄에 해당될 만큼 극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인지 자각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법 이전에 양심의 문제이다. 그러나 쏠림 현상은 위험하다. 동물 보호만을 외치는 이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사람이 우선인가 동물이 먼저인가? 동물 보호에 관해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이 정작 인권에 대해선 침묵한다면? 개 사료에는 온갖 정성을 쏟는 인간이 빈곤층의 배곯는 소리에는 귀를 닫는다면? 동물 학대에는 울부짖는 열사(?)가 노인 학대나 아동 학대,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에 대해선 외면한다면? 과연 옳은 행동일까? 주객전도가 되선 정말이지 곤란하겠다. 동물 보호 이전에 사람 사는 문제부터 생각할 줄 아는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상식의 회귀가 필요한 시점이다. 

 

 

★★☆

다수의 멍청한 관객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영화. 한마디로 관객을 우습게 아는 영화다. 처음엔 신파의 힘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신파의 한계.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임수정이 아니라 말(馬)로 출연한 천둥이다. 연기도 임수정보다 더 나았다. 최소한 천둥이의 연기에는 거짓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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