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The Prestige

찰나21 2011. 10. 12. 04:30

 

 
 
 프레스티지 (2006/미국,영국)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출연 휴 잭맨, 크리스천 베일, 마이클 케인, 스칼릿 조핸슨, 레베카 홀,
       앤디 서키스, 파이퍼 퍼라보, 데이비드 보우이

 

줄거리

'앤지어'와 '보든'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마술사들이다. 이들이 단순한 경쟁관계에서 적으로까지 발전된 계기는 앤지어의 아내 '줄리아'가 보든의 실수로 수중마술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다 목숨을 잃고 나서다. 그 후로, 앤지어와 보든은 서로에게 갖은 해를 가하며 회복될 수 없는 사이가 되고만다. 보든이 자칭 '위대한 마술'이라 부르며 비장의 카드로 꺼내든 일명 '순간이동 마술'을 관객들에게 선보이자, 이에 질세라 앤지어도 '순간이동 마술'을 해낸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 앤지어는 보든의 마술비법을 캐내기 위해 자신의 조수 '올리비아'를 스파이로 보든에게 잠입시킨다. 헌데 문제는, 올리비아가 앤지어를 배신하고 보든과 사랑에 빠져 보든의 조수로 들어간 것이다. 배신감도 잊은 채, 앤지어의 불붙은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결국 과학의 힘까지 빌리게 되는데... 과연 두 사람 중에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재밌다. 3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만해도 지루하고 재미도 없는 크리스 놀런의 실패작이라 여겼었다.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그 때 내가 왜 그런 평가를 내렸을까 하는 의아함이 들만큼 괜찮은 영화라고 재평가하게 되었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자 핵심인물들로 등장하는 '앤지어'와 '보든'이 서로 골탕 먹이고 온갖 술수로 서로를 끌어내리려하는 모습이 그전엔 단순히 치졸한 행태라 여겼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이해가 가는 측면이 꽤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름 공감이 갔다. 인간이라면 더군다나 자신이 누군가와 라이벌 관계에 놓여있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잘 되기 위해 상대를 밟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보려는 인간의 욕심. 이 영화가 흥미롭다면, 어쩌면 그건 앤지어와 보든-두 인물이 서로 골려 먹이며 속고 속이는 이야기 전개 때문이리라.

 

이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더 이상 설명이 구차하게 느껴지는 불세출의 필름메이커(filmmaker)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장르는 스릴러다. 놀런은 그의 모든 영화에 기본적으로 스릴러란 장르를 깔고 출발한다. 놀런은 그의 장편데뷔작 'Following(미행)'부터 가장 최근에 '인셉션'까지 일관되게 스릴러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심지어 상업적으로 혹은 연출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 오늘날의 크리스토퍼 놀런을 있게 만든 배트맨 시리즈도 외양상으론, 장르적으로 액션(action film)이지만 스릴러라는 장르적 뼈대를 분명히 갖추고 있다. 다만 필요에 따라 그러한 뼈대 위에 액션이나 드라마 혹은 범죄와 같은 다른 장르를 덧입히는 것이다. 스릴러 외에도 놀런이 적지 않게 끌어다 쓰는 장르는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란 장르는 본질적으로 스릴러란 장르를 거의 매번 수반하게 되어있다. 반대로 스릴러란 장르는 미스터리란 장르를 수반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작가로서 갖는 놀런의 가장 큰 무기이자 위대한 능력은 시공을 초월해 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영화적 구성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해내는 데에 있다. <프레스티지>도 그렇고 놀런은 순차적인 구성을 대개 무시하고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왔다 갔다 하는 구성을 대체적으로 취해왔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구성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 너무나 쉽게 다루는 놀런의 솜씨는 할리우드에서도 탑(top)이라 할 만큼 독보적이다. 처음엔 이런 복잡한 영화구조가 관객으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시키고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헷갈리게도 만들지만, 그의 영화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에겐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놀런의 영화는 한마디로 극도로 세밀하고 정밀하게 직조된 퍼즐 같다. 그가 관객의 머릿속에 어지럽혀놓은 퍼즐의 조각들을 하나하나씩 맞추어 가다보면, 그 과정 속에서 고통과 흥분이 동시에 수반되다가 어느새 퍼즐이 완성되고 나면 그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놀런의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두뇌를 자극하며 지적쾌감을 선사한다. 놀런의 영화는 흔해빠진 감성을 자극하거나 어설픈 휴머니즘에 기대어 관객들에게 감정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차갑고, 어떤 면에선 시니컬(cynical)하다. 끊임없이 머리를 쓰게 만드는 이성의 영화다.

 

M. 나이트 샤이아말런 만큼은 아니어도, 놀런의 영화에서도 반전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할만큼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뭐냐면, 반전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놀런의 영화에서 반전은 반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전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놀런의 영화가 위대한 건, 단순히 촘촘한 그물망처럼 치밀하게 짜여진 내러티브나 퍼즐 같이 시간을 재배열한 매력적인 구성 혹은 시각적인 볼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철학적인 메시지나 정신분석학적인 메타포를 영화 안에 깊숙이 심어놓기 때문이다. 놀런의 영화가 그토록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가 스필버그나 마이클 베이와 같은 여타 다른 연출자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 바로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놀런은 비주얼리스트(visualist)보다는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일종의 영상학자에 가깝다. 거스 밴 샌트가 시인(poet)이라면 놀런은 장편 소설가이고 거스 밴 샌트가 관념주의자라면 놀런은 실존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프레스티지>도 반전 자체보다는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테슬라는 그가 만든 기계에 목숨을 거는 앤지어에게 집착을 버리라고 충고하며 종국적으로 기계를 파괴시키라는 경고를 던진다. 그럼에도 앤지어는 테슬라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파멸을 자초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반전은, 앤지어와 보든-두 인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극이 마무리될 시점에서, 관객이 보든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단정 지을 때쯤, 앤지어가 테슬라 기계로 양산한 수많은 앤지어의 복제품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관객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때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보든은 이미 알고 있다. 보든의 총에 맞은 앤지어는 보든에게 말한다. "주위를 한 번 둘러봐." 일종에 보든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때 보든은 상관없다며 앤지어의 말을 무시한다. 알고 있기에 그렇게 답한 것이다.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보든이 앤지어를 제거하고 지하창고를 걸어 나올 때 앤지어의 복제품이 늘어서있는 옆을 그가 의식하면서 애써 모른 체하는 모습에서 제대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놀런은 마지막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때린다. 두 사람의 싸움은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혹은 둘 다 죽기 전까진 계속되는 싸움인 셈이다.

 

그럼 이토록 피 말리는 경쟁은 누가 만들었을까.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사회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두 사람이 만든 거다. 거기서 본질로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든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은 누구나 경쟁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이란 타고난 것이기에 개인이 스스로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지니고 가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물론 사회가 그러한 경쟁심을 더 유도하고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스템마저도 근본적으론 인간의 본성이 낳은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앤지어와 보든은 서로 상대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어느덧 제어불능 상태에 빠져 파멸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이른다. 경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점점 한 개인의 경쟁욕구를 달아오르게 만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모략과 술수로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악마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당신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법 있나.

 

영화제목인 'prestige'는 사전적인 의미로, 위신/ 명성/ 위세/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영화에서는 마술의 최고단계 혹은 마술의 핵심비법이 담긴 열쇠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래 사전적인 뜻과는 완전 동떨어진 의미로 전혀 다르게 사용되는 셈이다.

 

영화에서 그들은 말한다. 삶 자체가 속임수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마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술은 한마디로 사회가 이례적으로 용인하는 합법적인 속임수 혹은 합법적인 조작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마술은 마법이 아니다. 마법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어떤 불가사의한 마력으로 현실화시키는 엄청난 능력으로서,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마술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제대로 배우기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종의 트릭(trick)이다. 어렸을 적에, WWF(지금은 WWE로 변경됨)로 불렸던 미 프로레슬링을 즐겨봤었는데, 그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여러가지 도구와 안전장치 그리고 레슬러들의 골든 래즈베리급 연기로 중무장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던 것이다. 순진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엔, 설이나 추석 명절에 TV로 틀어주곤 했던 마술사들의 마술을 보면서 그것이 속임수가 아닌 진짜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진짜(real)처럼 보였으니까. 근데 중요한 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술을 보면 여전히 속는다는 사실이다. 몰라서 속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속는 것이다. 우리 모두 무대에서 온갖 화려한 손놀림과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마술사의 원맨쇼를 보면서 저 마술이 속임수고 마술사는 사기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마술사의 농락에 넘어가준다. 그리고 마치 바보들처럼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에 일초도 눈을 떼지 않고 흥미롭게 주시하고 관찰한다. 마술사는 관객들에게 주술을 거는 주술사이기도하다. 물론 관객은 마술의 비법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근데 여기서 웃긴 건 뭐냐면,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알면 김빠지고 재미없으니까. 마술이 속임수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 비법까지 알면 누가 보겠는가.

 

마술을 영화적 장르로 치환시킨다면, 미스터리 스릴러로 대입시킬 수 있겠다. 관객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시험하고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서로 맥이 닿아있다. 여기서 장르를 더 추가한다면, 한편의 모노드라마라 할 수도 있고 로맨스라고 볼 수도 있으며 볼거리 가득한 액션 어드벤처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프레스티지>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대사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대사는 일종의 복선과도 같은, 그러니까 각각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그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비극의 전조(signal) 역할을 한다. 대사가 상황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셈이다. 앤지어의 사랑하는 아내 줄리아의 죽음도, 보든과 중년여성관객의 손가락 절단도, 테슬라 기계의 노예가 되는 앤지어의 파멸도 모두 다 대사로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솔직히 크리스 놀런의 영화치곤 범작에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 수도 있다. 그가 내놓은 임팩트 있고 유니크(unique)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프레스티지>는 일견 무난해 보이고 확 잡아당기는 매력은 조금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느껴져서다. 그러나 차근차근 살펴보면, 은근히 곱씹어볼만한 매력과 재미를 갖춘 영화다. 상대적으로 봤을 때, 만약 다른 감독이 <프레스티지>를 연출했다면 조금은 높게 평가받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크리스 놀런이라는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위대한 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그렇다. 놀런이 19세기 과거로 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나. 그 사실만으로도 신선하다. 19세기는 과학이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이고 물질문명이 가동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테슬라가 앤지어에게 한 말처럼, 사람들은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선 두려워하고 거부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건 내 생각이기도 한데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변화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변화는 모험이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보이고 삶의 깨우침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여 부단히도 더러운 물을 정화시켜가는 과정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계해야할 것은,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그것도 모자라 변화를 꾀하려는 사람 혹은 세력들을 이단시여기고 불순세력이라 규정하며 돌팔매질을 해대는 도그마집단이다. 지금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은 어쩌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살아있는 물고기들 덕택인지 모른다.

 

아무리 놀런이 19세기로 돌아갔어도, 그의 영화적 형식은 <프레스티지>에서도 변함이 없다. 프롤로그에 마술의 3단계를 설명하는 '커터'의 음성을 깔고 그 위에 슬며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장면들을 끼워 넣어 초반에 미리 운을 떼고 시작한다. 이러한 편집적 혹은 내러티브 방식은 시작부터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긴장감을 유발하며 프롤로그에 등장한 장면들의 의미에 대한 궁금증을 불어일으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거기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감독이 초반에 던져준 실마리가 풀리는 과정에서 그러한 방식은 시너지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구조로 되어있어, 흥미를 배가시키고 반전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더 가중시켜 결말의 여운을 더한다.

 

휴 잭맨의 연기는 의외로 괜찮다. 내가 그를 좀 과소평가 했었나보다. 크리스천 베일은 역시 재능있는 배우다. 연기파 배우로서의 느낌이 배트맨 시리즈에서 보다는 더 강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면서 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샘 락웰과 얼굴이 닮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스칼릿 조핸슨은 참 매력적인 배우다. 확실히 연기를 잘한다. '리 스트라스버그'에서 연기를 배운 탓인지, 연기에 대한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녀가 <프레스티지>에서 연기한 '올리비아'란 인물은 팜므파탈(femme fatale)적인 캐릭터다. 영화에서 그녀의 미묘한 표정연기와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 백옥 같은 피부 그리고 타고난 금발에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고전적인 마스크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마이클 케인은 확실히 잔뼈가 굵은 노배우답게 영화의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아주는 균형추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

과거와 현재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왔다 갔다 하는 영화적 구조가 긴장감과 흥미를 배가시키고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놀런의 영화는 대개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공허하지 않다. 겹겹이 쌓은 중첩된 구조로 알맹이가 꽉찬 영화를 만든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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