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The Life of David Gale

찰나21 2011. 8. 24. 04:39

 

 
 
 데이비드 게일 (2003/미국,독일,영국)


장르 드라마, 범죄, 스릴러
감독 앨런 파커
출연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윈즐릿, 로라 리니, 개브리얼 맨,
       맷 크레이븐, 리안 리피, 로나 미트라

 

줄거리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던 '데이비드 게일'이 사형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에서 '빗시 블룸'이라는 이름의 여기자에게 게일에 대한 인터뷰가 맡겨진다. 빗시는 인턴기자와 함께 게일이 수감되어 있는 텍사스의 어느 교도소로 향한다.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게일과 빗시. 한정된 시간 동안, 게일은 빗시에게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들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어느덧 게일의 사형이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오고 빗시는 점점 혼란에 빠지는데... 과연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데이비드 게일은 정말 무죄일까?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가 시작된다. 암전 상태에서 정적이 감돈다. 화면이 밝아지면, 허허벌판에 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춰서고 어디선가 한 여인의 다급한 음성이 들린다. 곧이어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성이 텅 빈 도로를 허겁지겁 뛰어간다. 그리곤 작은 트럭 한 대가 뒤에서 돌진하며 들어오자 그녀가 트럭을 세우려고 손을 흔들며 외치지만 트럭은 모래먼지만 날린 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렇듯 시작하자마자, 익스트림 롱 쇼트로 허허벌판을 배경 삼아 작은 점처럼 보이는 차 한 대를 보여주고 긴박감 넘치는 음악에 맞춰 숨을 헐떡이며 다급히 뛰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의 포문을 여는 <데이비드 게일>의 오프닝은 다분히 의도된 연출이다.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로, '시퀀스의 반복'을 들 수 있다. 방금 언급한 이 영화의 오프닝은 정확히 극의 말미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극의 내용상 시간적으로 볼 때, 서두에 내가 언급한 시퀀스는 오프닝이 아니라 영화 말미에만 위치해있는 게 맞다. 그럼에도, 감독은 클라이맥스에 자리한 이 시퀀스를 오프닝에 미리 배치함으로써 시작부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오프닝에서부터 짧고 강한 임팩트로 치고나가는 일종의 승부수를 관객에게 던진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편집적구성은 관객에게 오프닝 시퀀스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고 앞으로 전개될 극의 흐름에 대한 궁금증을 더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영화 말미에 오프닝 시퀀스가 재등장할 때가 되서야, 관객은 오프닝 시퀀스의 내용상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다.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이다. 남녀 간에도 신비롭고 비밀이 있어 보이는 이성이 왠지 더 끌리는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러한 편집적구성은 흔해빠진 수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올드보이'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난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게일>이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데이비드 게일>에 대해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예전에 '스크린' 잡지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대략 이랬다. - 영화의 결말을 보고선 스크린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영화에 별점 대신 폭탄을 투하했다. 참으로 화끈한 영화평이 아닐 수 없다. 이왕 일갈을 하려면 이렇게 제대로 해야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도대체 결말이 어떻기에 이렇게까지 씹을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내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나니,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사실 <데이비드 게일>의 반전은 짜릿한 전율을 선사하기 보단 허탈함에 가깝다. 관객을 상대로 장난치고 우롱한 느낌이라 할까. 데이비드 게일에게 뒤통수를 맞은 건, 비단 영화 속의 인물 '빗시'만이 아니다. 관객 역시 그가 벌인 일종의 사기극에 휘말려 소송이라도 벌여야할 참이다. 다만 결말에 대한 논란이나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데이비드 게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곱씹어 봐야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범죄가 행해지는 모든 문명국가에서는 사형제도의 존속이냐 폐지냐에 대한 논쟁이 늘 있어왔다. 사형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흉악범이니 당연히 법의 심판으로 그들을 엄중히 처단해야 마땅하며 그래야만 희생자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고 슬픔에 잠긴 희생자의 가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의 불합리성(프랭크 대러본트의 '그린 마일'을 예로 들 수 있다)과 잔혹성 그리고 사형수의 인권 보호와 생명존중사상을 근거로 사형제도 대신 종신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면 사형제도 찬성론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으로, 관리비용과 교도소 직원에 대한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다시, 폐지론자들은 종신형이 사형수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다 줄 수 있다면서 종신형을 옹호한다.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대편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으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부류라는 비난을 듣고,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대편으로부터 극악무도한 살인마를 옹호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확실히 어느 입장도 아니다. 양쪽의 상이한 입장과 주장이 모두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딱 못 박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고 그로 인해 서로간의 논쟁은 불가피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판단대로 살아가면 된다. 단 상대에게 자신의 신념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위는 일종의 폭력에 해당된다는 사실만은 모두 명심해야할 것이다. 자신이 주관적으로 믿는 옳은 신념이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상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하는 건 결코 아니니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인의 60% 이상이 사형 제도를 찬성한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다시 조사해도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조사한다면, 찬성비율이 더 높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찌됐든 통계결과만 보더라도, 미국인의 의식 수준을 대략 알 수 있다. 미국은 굉장히 보수적인 나라다. 과거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현재의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플리머스 항에 다다라서 건설한 나라가 미국이고 이것이 미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보수성을 타고난 민족이고 정치성향도 대체적으로 공화당 쪽이다. 혹자는 지금의 오바마 정부를 근거로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미국을 지배하는 건 보수주의 이념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공화당은 광범위한 규모로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려 강고하게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이러한 미국의 보수성은 종교에서도 알 수 있다. 아까 언급했듯,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 덕에 다양한 종교가 생기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은 기독교 국가다. 일단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개신교의 비율이 가장 높고 범위도 가장 넓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모두 하나같이 개신교도였다. 예외가 있다면,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를 들 수 있겠다. 그래봤자, 그리스도교라는 큰 범주에는 포함되기 때문에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미국 대통령은 한 쪽 손을 성경에 얹고 선서를 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폐지된 걸로 아는데, 과거 미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기도를 항상 먼저하고 첫 수업을 시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영화에서, '텍사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스타벅스'보다 교회와 감옥이 더 많은 곳이라고 한다. 어쩌면 텍사스는 미국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state)로서 미국의 축소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텍사스는 미국을 상징하는 키워드들이 모두 집합되어 있는 곳이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주이고 공화당 텃밭이며 기독교 원리주의가 뿌리 깊은 곳이다. 자랑스런(?) 부쉬의 고향이기도 한 텍사스는 레드 스테이트(red state)의 심장이라 불러도 될 만큼 보수주의가 만연한 주다. 카우보이로 대변되는 서부영화의 배경이라 할 수 있으며 마초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심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 어디나 돌연변이는 존재하기 마련. 텍사스 출신의 여성 그룹 '딕시 칙스'는 당시 극우주의자들의 협박과 테러를 감수하면서까지 부쉬의 이라크 전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부쉬와 같은 텍사스 출신이란 사실이 수치스럽다는 다소 용기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비포 선라이즈'로 유명한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역시 텍사스 출신이지만 탈 공화당 성향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다.

 

교회와 감옥.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두 단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성경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신명기 구절이 있다. 아마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이 구절은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제목으로도 인용이 되곤 했으니까. 할리우드에선 샐리 필드 주연으로, 충무로에선 곽경택 감독 작품으로 이 구절이 제목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그저 악을 악으로 갚는 박찬욱 식의 복수 3부작과 뭐가 다른가. 티 없이 순수했던 한 꼬마가 알고 있던 사랑이 넘실대는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리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바라본 지금의 그곳에는 오로지 구원만 외치며 순진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툭하면 종말론을 퍼뜨리며 불안 심리를 조장하는 사기꾼들과 도그마에 빠진 바보들만 남아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하진 않겠다. 헌데 이거 하난 꼭 말해야겠다. 직간접적으로 내가 체험한 교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거의 절망적이다. 한마디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미국과 유럽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유럽을 뿌리로 하고 있지만 유럽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택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됐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 유럽인은 미국인보다는 개인주의 성향이 더 두드러지고 독립심이 더 강하다. 유럽은 최대한 쪼개지려고 노력했다. 유럽은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국가들이 있다. 그래서 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영국(UK)은 월드컵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 아일랜드 - 이렇게 나뉘어 출전할 정도로 자존심과 독립심이 매우 강하다. 반면에 미국은 최대한 흡수, 통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처음부터 50개주가 아니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개척하며 스페인령의 지금의 멕시코 땅을 일부 자기들 땅으로 흡수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본토에 48개주를 형성하고 소련에게서 알래스카를 돈으로 사들여 하와이와 함께 50개주가 완성되었다. 그런 식의 강제흡수를 통해 미국은 덩치를 키웠지만 다소 어거지로 봉합하려한 탓에 부작용도 발생했다.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 하는 이유도 이런 부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반면 같은 북미라도 캐나다는 또 다르다. 캐나다는 '인종의 모자이크'라 불린다. 이건 결국 각각의 차이와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에 반해 미국은 개성과 차이를 최대한 배제하고 하나의 색깔로 통일해버렸다. 가끔 유럽이 유럽연합(EU)을 구성해 미국에 대항해보지만 유럽의 국가들이 다 합쳐도 미국 하나를 상대하기엔 벅차다.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에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사실이다.

 

개인, 집단, 국가의 정체성은 저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수많은 페르소나는 각각이 별개가 아닌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의식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한 개인을 지배하는 의식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한다. 집단과 국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나의 공통된 의식과 가치관이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되면 집단의 정체성이 결정되고 그에 따른 행동양식이 나타난다. 그런데 만약 집단 내에 누군가 다른 의견을 표출한다 가정해보자. 그 때,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배척하며 이단시여기고 색깔론을 들이대기 시작하면, 이미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도그마가 되고 독재와 억압이 작동하기 시작해 전체주의 사회로의 진입을 예고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대사로 언급이 되지만, 연쇄살인범의 73%가 공화당 지지자라는 건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처럼 정치적 보수성은 야만성,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종교적 신념, 생활양식과도 맥을 같이한다. 예를 들어보자.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골수기독교신자일 가능성이 높고 낙태를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형제도에는 찬성하는 부류들이다.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은 기독교신자일 가능성이 공화당 지지자들보단 현저히 낮고 대체적으로 종교적 도그마에 경도되어 있지 않으며 낙태는 개인의 선택권이라 주장하는 경향이 있고 사형제도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낸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이 무의미하단 생각도 든다. '담대한 진보'를 주창하던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힐러리조차 전쟁에는 별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반대로 대표적인 공화당 지지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놀랍게도 반전주의자이고 인종주의를 제일 경멸하며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하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칭 'Liberal Republican'이니까.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이 한 개인의 의식 속에서 충돌하지 않고 양립가능하단 사실이 믿기 어렵다. 중도 혹은 회색분자라 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악마적인 폭력성을 가진 국가다. 미국인들은 호전적인 민족이다. 부쉬 정부가 우리에게 절실히 일깨워 준 건, 미국이 더이상 그전에 우리가 알던 아름다운 나라도 아니고 정의로운 국가는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미국에 대한 판타지는 한마디로 허구다. 실상은 소수인종으로서 겪는 차별과 냉대 그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허리가 끊어질 듯한 중노동이 현실이다. 화려한 포장지 안에 감춰진 진실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안엔 생존을 위해 피 말리는 경쟁에 몸부림치는 가여운 피조물들이 득실댄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이며 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나라이다. 미국이 한해 국방비에 쏟는 예산은 전 세계 어떤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이다'라는 말이 있다. 다분히 미국의 오만한 태도와 미국제일주의가 느껴지는 표현인데 현실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다른 나라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길 좋아한다. 이러한 미국의 행동은 불행을 몰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당신들이 지금 거주하고 있는 땅이 자신들이 예전에 살았던 땅이라며 그곳을 떠나라고 팔레스타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그 결과, 미국이라는 든든한 지원군 덕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내쫓아버리고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도 그럴 것이,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미국 인구의 소수에 지나지 않은 유태인들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미국식 정의'라는 게 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은 자신들이 수년간을 그토록 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빈 라덴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이게 정당할까? 응징하는 건 좋지만 방법론이 문제다. 왜 꼭 응징의 방법이 사살이여야만 했을까. 생포를 해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건 그들에겐 고려사항도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급했나? 좀 더 잔인하게 복수하고 싶어서? 악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남의 나라 가서 쑥대밭을 만들고 저택에 무단 침입해 테러의 신을 사살한 걸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누구도 이러한 미국식 정의에 대해 문제의식은 커녕 의심조차 안 가지는 것 같다. 미국이 정의라고 규정해버리면 무조건 정의인가? 알라의 이름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알카에다는 인간 말종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은 정당한가? 어차피 신의 이름으로 살상을 일으킨 건 그들이나 미국이나 똑같다. 중동을 제외한 다른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911테러로 숨진 미국의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그리곤 중동의 모든 국가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저주했다. 근데 혹시 그거 아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침공해 목숨을 잃은 시민들이 911테러로 숨진 미국인들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많다는 사실을. 미국인의 목숨이 후진국에 사는 그들의 목숨보다 더 고귀한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지 않았냐고. 자업자득 아니냐면서. 사실 '자업자득'이란 사자성어는 미국에게 해당된다. 이스라엘에겐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미국이 다른 중동국가들을 대할 땐 그와 상반된 싸늘하고 적대적인 제스처를 늘 보내왔다. 이렇게 자기편과 적을 철저히 가르는 이분법적인 태도가 그들에게 반미감정의 불씨를 당긴 계기가 됐고 그에 대한 행동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테러를 정당화할 순 없다. 다만 약자의 입장에 한번쯤은 서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미국과 중동의 갈등과 반목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중동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미국이 자세를 좀 낮춰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과 미국,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부분이 많다. 교육열과 두뇌, 근면성, 강인함, 가부장제, 엄격한 규율은 이스라엘과 한국이 공통분모를 형성한다고 보여진다. 종교적 이데올로기, 호전성, 폭력성, 근친성, 근원성, 이분법적 가치관에서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교집합을 이룬다. 20세기 들어, 한국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세대는 조금 다르지만, 나만 하더라도 팝송을 즐겨 듣고 할리우드 영화가 최고라 생각하며 성장했다. 야구와 농구라는 단체종목을 통해 팀플레이를 배우며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 이데올로기, 종교, 음식, 스포츠 - 거의 모든 부분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그것이 전부라 여겼다. 특히 지금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미국은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준 고마운 나라이고 실제로 그분들은 미국에 절대우호적이다. 반면해, 요즘 세대는 그나마 탈 미국화되었다. 지금 세대는 미국이 최고라는 절대명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국산 휴대용 기기로 케이팝을 듣고 한국영화에 열광하는 그들은 '서양 컴플렉스' 따윈 콧방귀를 끼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축복 받은 세대다. 그만큼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에 살고 있다. 종교는 어떤가? 어느새 이슬람 사원이 우리나라에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해 앞으로 더 확산될 조짐이다. 여기서 하나 언급해야겠다. 간혹 보면, 종교가 정치와 결합해 불행이 빚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원래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는 게 맞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 기독교를 보라. 외국인들이 한국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서울에 왜 그리 십자가가 많냐는 거다. 과거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해 복음을 전파하던 기독교 종주국의 후손들이 봤을 때 격세지감을 느낄 만도 하지 않은가. 특히 캄캄한 밤에 온 사방을 빽빽하게 수놓은 붉은 십자가들을 마주하는 순간만큼 섬뜩한 광경은 없는 것 같다. 지금의 교회는 정의 편에 서지 않고 권력자와 기득권 편에 서서 배만 채우고 있다. 설교를 통해 공개적으로 다분히 편파적인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극우세력과 한편이 되어 진보를 빨갱이라며 공격한다. 노동자의 투쟁이나 약자의 인권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연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인가? 이렇듯 교회에서의 상식은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상식과는 괴리의 차이를 떠나 서로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에 놓여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암담함을 갖게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 말이다. 게일, 더스티, 콘스턴스- 세 사람은 사형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벌였다. 콘스턴스는 합의하에 자살했고 게일은 사형수가 됐으며 더스티는 혼자 살아남아 그들의 계획이 차질 없이 마무리되도록 했다. 사형폐지론자가 사형수가 되는 아이러니. 아무리 옳은 생각도 실천을 위한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본질에서 벗어난 부정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형수의 인권을 주장하던 평화주의자들이 오히려 사형찬성론자들보다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과격분자가 되는 모습과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르고도 끝끝내 정당화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얼마나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옳은 시작이 항상 옳은 끝을 보장해주는 건 결코 아니다. 본래의 선하고 순수한 취지가 과정 중에 변질되어 어느새 극단주의로 흘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일찍이 게일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이며 삶은 비논리적이고 아이러니 투성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게일이 언급한 유다의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람들은 자기를 한 인간이 아닌 그저 강간범으로만 취급할 뿐이라는 일종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는 또 소크라테스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과 비논리적인 삶 그리고 아이러니로 점철된 현실을 조소한다. 그리고 그가 학생들에게 라캉이나 파스칼을 언급하며 늘어놓았던 강의 내용은 학생들(수용자)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보단 자신(공급자)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존하지 않는 철학자와 성서의 인물을 언급하며 자신의 삶을 비유적으로 언급하는 즉 관객으로서 그저 흘려들을 법한 이런 게일의 발언은 결국 그의 말로를 넌지시 말해주는 복선의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가 사형제도폐지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임한 건, 그들에 대한 소박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며 자신이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은 일종의 자기만족 아니었을까.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처방도 마다하지 않는 '데이비드 게일'은 파시스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네가 그렇게 거창하게 떠받드는 그 잘나빠진 신념을 버리라고 협박한다. 어쩌면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신념을 포기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데스워치'(해석하자면, '사형 감시단' 정도 되겠다)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의 죽음은 감시하지 못하고 삶을 하찮은 듯 내팽개치는 게일과 콘스턴스의 모습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마치 자신이 대의를 위해 숭고하게 희생한 순교자처럼 굴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게일의 모습이 가증스럽다. 게일은 빗시의 순수함, 도덕성, 감수성을 이용해 그녀를 농락하고 조롱한 것이다. 여자(아내, 벌린)에게 철저히 당하기만 했던 게일의 억하심정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데스워치'의 수장이었던 더스티가 사형수들의 참혹한 모습이 그려진 전단지들로 사방에 도배된 자신의 집에서 오페라를 듣는 모습은 왠지 상충되는 묘한 느낌과 함께 공포스러움을 자아낸다.

 

미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사형도 상업화하는 놀라운 작태를 보여준다. 피어싱을 한 뚱보여자는 문제의 살인 현장을 돈벌이수단으로 활용한다. 사형집행 당일, 생중계로 떠들썩하게 게일의 사형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을 현장에서 낱낱이 보도하는 언론의 선정성은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심지어 사형집행 전에 게일의 마지막 식단을 공개하는 장면은 이색적이면서 씁쓸함을 자아낸다. 재밌는 건, 게일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이 자신의 아들이 평소에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 영화의 타이틀도 그렇고 언뜻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추측과는 달리 엄연히 순수하게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오리지널 스크립트이다. 앨런 파커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혹은 사회적 논란이 되는 민감한 주제를 영상으로 옮기며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장르적 틀 안에서 대중적인 화법으로 말이다.

 

<데이비드 게일>은 정치적으로는 올바른 영화일 수 있으나, 윤리적으로는 올바르지 못한 영화라는 게 내 결론이다. 음악이 인상적이다.     

 

 

★★☆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는 타이틀 롤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도 아니고 연기의 여왕 케이트 윈즐릿도 아닌 로라 리니다. 그녀는 어떤 영화에서건 늘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다름 아닌 영화 속 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영화의 결말이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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