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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d Case / 허연

찰나21 2019. 8. 2. 22:29



친구는 부처를 알고 나니까 시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다며 시를 떠났다. 또 한 친구는 잠

들어 있는 딸아이를 보니까 더 이상 황폐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시를 떠났

다. 부러웠다.

 

난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제폭탄을 만들 줄 알았거나, 세상의 옆구리를 걷어찰 다른 방법을 알았다면 나는 시를 버렸을 것이다. “파킨슨씨 병에 걸린 초파리의 행동습관에 관한 연구” 같은 논문을 쓰는 과학도였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세상이 열나게 호쾌했다면 시 같은 거 안 썼을 것이다. 차에 치어 죽은 고양이를 담담하게 내려다 볼 만큼 강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속으로만 참아내는 신중한 내연기관이었다면 수다스럽게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또 시를 쓴다. 가끔은 울고, 가끔은 태연하다. 시 앞에서 그렇다. 난,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 부처에게로 떠난 친구나, 딸아이 조기유학 때문에 시를 버린 내 친구만이 끝까지 갔다. 자기 이름 걸고 뭔가 쓰는 놈은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게 해서. 미안하다. 끝까지 가지 못해서.

 
 

월간 『현대시학』 2009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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