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좋지 아니한가

찰나21 2011. 11. 16. 01:11

 

 
 
좋지 아니한가 (2007/한국)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정윤철
출연 천호진, 문희경, 김혜수, 유아인, 황보라, 정유미, 이기우, 임혁필

 

줄거리

여기 콩가루 가족이 있다. 심 씨네 가족의 무기력한 가장 창수는 언젠가부터 찾아온 발기부전 때문에 아내의 히스테를 감당해야하는 처지다. 엄마 희경은 자신이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에 회의를 느낀다. 이모 미경은 백수나 다름없는 무협작가이다. 아들 용태는 동네 근처에 사는 원조교제로 퇴학당한 퇴폐소녀 하은에게 틈만 나면 찾아가 욕을 하고 사랑 고백을 한다. 딸 용선은 가족과 사랑 그리고 사람에 대해 늘 의문을 품으며 인터넷 라디오 DJ를 취미삼아 하는 다소 미스터리한 엉뚱소녀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심 씨네 가족에게 위기가 닥친다. 고등학교 교사 창수가 어이없게도 원조교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용태와 용선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창수는 교사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 거기다가 희경은 노래방 청년에게 마음이 꽂혀 평소에 안하던 커피타령을 해댄다. 그랬던 그들이 집에서 키우던 개 '용구'로 인해 난생 처음 하나로 똘똘 뭉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정윤철 감독의 비주류 정서가 제대로 드러난 영화다. 그의 장편영화 입봉작 '말아톤'은 상업적인 흥행을 고려해 속된 말로, 안전빵으로 만든 주류 영화였다. 그러나 주류 영화 안에서도 정윤철 감독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창의적인 연출을 보여주고, 나름의 절제된 감동을 선사하면서 한국영화의 고질병이기도 한 신파로 빠지는 함정을 교묘히 피해가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보여줬다. 그에 대한 결과는 500만 이상의 관객동원이라는 예기치 못한 엄청난 흥행성적과 평단의 호평까지 더해 작품성마저 인정을 받아 결론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화려한 데뷔작으로 남았다. 근데 여기까지다. 그가 다음으로 내놓은 작품 <좋지 아니한가>는 정윤철 감독의 본색이 기어이 드러난 영화다. 그에게 있어, '말아톤'은 다음 작품을 찍기 위한 토대로서 현실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마치 박찬욱이 주류 영화에 포함되는 '공동경비구역 JSA'로 공전의 히트를 치고(물론 데뷔작은 아니지만)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괴작을 내놓아 다수 대중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든 것처럼, 정윤철 감독도 <좋지 아니한가>에서 자신의 비주류적 감성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터뜨리며 개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에 대한 결과는 데뷔작에서 터뜨린 대박이 무색할 만큼 ^좋지 않은^ 흥행성적으로 나타났다. 사실 <좋지 아니한가>는 흥행이 되면 이상한 영화다. 흥행이 안 된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좋지 아니한가>는 주류의 정서에서 다소 이탈한 영화다. 분명 대중성은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말아톤'할 때,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느라 참 힘들었겠단 생각이 들더라. 정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드라마가 약하다. 속된 말로, 야마가 없다고나 할까.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그런 건진 몰라도, 하나의 드라마를 큰 줄기로 삼아 힘차에 죽 밀고나가는 게 아니라 주요 인물마다 개별적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로 인해 자꾸 옆길로 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진하는 힘이 다소 약하고 자꾸 옆으로 가지를 치니까 영화가 산만해지는 느낌이다. 특히 처음에 봤을 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결국 <좋지 아니한가>는 다채로우면서도 흥미로운 캐릭터와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그리고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다소 헐거운 이야기구성과 느슨한 이음새는 꼭 영화 속 캐릭터들을 닮아있다. 다만 이 영화가 '말아톤'보다 좀 더 나은 점이 있다면, 신선함과 독창성을 꼽을 수 있겠다. 비록 대중성은 '말아톤'보다 조금 떨어지더라도 정윤철 감독의 색깔과 자의식이 봇물 터지듯 투영된 결과물이 <좋지 아니한가>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감독의 자의식과 개성을 시청각적으로 제대로 구현해내기 위해선 배우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좋지 아니한가>에서 주요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일단 합격점이다. 단 김혜수를 제외한다면. 솔직히 김혜수는 이 영화에서 존재감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영화에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김혜수의 평소 이미지와는 괴리감이 너무 커서(마지막 부분에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 내내 추리닝 차림으로 등장함) 다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굳이 그 역할에 김혜수를 캐스팅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김혜수 보다 인지도는 낮더라도 그 역할에 어울리는 여배우를 캐스팅했어야 적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근데 한편으론, 김혜수가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각본과 감독에 대한 신뢰만으로 작품의 규모 따윈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에 도전하며 변신하려는 노력이 그녀가 연기욕심이 굉장한 배우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좋지 아니한가>에서 유아인의 연기는 확실히 인상적이다. 외모만큼이나 연기도 야무지게 잘한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배우임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유아인 때문에 많이 웃었다. 개인적으로 유아인은 이때가 좋았다. 지금과는 달리 뭔가 때 묻지 않고 신선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 들어서다. 정유미는 정말 매력적인 배우다. 이 영화에서 비록 비중은 작은 편이지만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인상적인 연기로 무시 못 할 존재감을 남긴다. 황보라는 엉뚱한 그래서 다소 사차원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이런 캐릭터는 그동안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 신선하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황보라 특유의 개성 있는 마스크와 그녀만의 캐릭터 소화방식이 결과적으로 진부하거나 상투적이지 않은 엉뚱소녀를 탄생시켰다. 관록의 연기파 배우 천호진은 특별히 보탤 말이 없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문희경의 연기에 좀 놀랬다. 대단한 배우구나라고 느꼈다. 연륜이 느껴지는 연기를 펼치는데, 특히 극중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천변 장면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은 최고봉이다.

 

<좋지 아니한가>는 소위 말해, 루저(loser)들의 영화다. 영화를 보면, 루저에 대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정윤철 감독 스스로가 약간 루저 근성이 있는 듯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피조물은 창조물을 닮기 마련이니까. 보면서 웨스 앤더슨 영화가 떠올랐다. 웨스 앤더슨은 루저들 에게는 대부(?)와도 같은 존재로, 그의 영화는 주로 루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나 콩가루 집안을 영화의 중심인물로 등장시켜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점은 로얄 테넌바움을 떠올리게 한다. 희경이 '커피자판기 사업설명회'에 가서 장면에 대한 설명으로 자막과 함께 편집이 되어 릴레이식으로 나오는 영상은 흡사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한 장면을 연상케한다. 엉뚱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나른한 이야기 구성을 다소 어이없고 황당한 에피소드로 극을 채워 넣는다는 측면에서도 웨스 앤더슨 작품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좋지 아니한가>는 다분히 정치적인 영화다. 솔직히 처음엔, 감독이 도대체 말하고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긴 한데, 중간 중간에 학교 이야기가 나오고 원조교제 부분도 나오고 그래서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 뭘까 고민하게 되었다. <좋지 아니한가>는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영화다. 심씨 가족(이 영화의 영어제목 Shim's Family심슨 가족을 패러디했다고 볼 수 있다)의 가장 창수는 말이 가장이지 여차하면 아내로부터 구박받고 아내에게 주도권을 뺏긴 지는 오래라서(식사할 때, 자리에 앉은 위치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음) 아버지로서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져진 상태이다. 거기다 학교에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여제자들로부터 굴욕을 당하는 무기력한 교사이기도하다. 지하철역에서 추위에 벌벌 떠는 여학생을 도와주려다 결과적으로 되레 봉변만 당한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교사로서의 권위도 이미 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능멸당하고 이용만 당하는 불쌍한 인생이여! 아내 희경은 결혼 전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밴 아들 용태가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리는데다 남편의 발기부전 때문에 불만이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신경이 부쩍 예민한데 자신이 집에서 밥만 해다 바치는 기계취급을 받는 것 같아 더 속상하다. 딸 용선을 혼내기 위해 우연히 노래방에 들렀는데 거기서 훈남 청년을 만나 중년의 나이에 설렘을 느끼고 덕분에 커피의 향에 눈을 뜬다. 이모 미경은 말이 작가지 무협소설작가라 벌건 대낮에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늘 추리닝 차림으로 태평한 백수생활을 누린다. 아들 용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이 강한 아이로, 동네에 사는 퇴폐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일방적인 짝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반골기질의 학생이다. 막내 용선은 사차원 기질이 다분한 엉뚱한 성격의 소유자로 학교에서 사귀는 친구들도 다소 덜떨어진 애들이고, 사실은 다수로부터 괴짜취급을 받는 왕따 아닌 왕따다. 말 그대로 콩가루 집안이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그저 참고서 살 돈이나 주는 돈 버는 기계에 불과하고 어머니는 밥이나 갖다 바치고 빨래만하는 식모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나 고마움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집도 안가고 소위 말하는 작가 생활한답시고 언니네 집에 얹혀살며 쌀이나 축내고 조카들에게 모범은커녕 한심한 모습만 보이는 이모.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밑도 끝도 없는 사랑에 집착하거나 이상한 망상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말썽만 일으키는 못난 자식들.

 

이처럼 기존의 봉건적인 가족상을 해체시키는 이 영화는 단지 그러한 유교적 가치관의 붕괴를 가정에만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학교나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변화된 지금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목도하게끔 한다. 기존의 가족질서를 해체시킨다는 면에선, 가족의 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심씨 가족은 속된 말로, 잡종 패밀리이자 루저 집단이다. 혈통에 모질게도 집착하는 한국사회에서 심씨 가족은 비주류이자 배타의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좋지 아니한가>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천변 시퀀스에서 심씨 가족이 그들을 잡종이라고 삿대질하며 욕하는 막장인생 가족에게 통쾌한 복수를 가하는 장면은 주류를 향해 비주류가 퍽큐를 날리는 통렬한 비판이다.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통틀어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고 맘에 드는 장면이고,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아도 될 만큼 명장면이자 영화의 백미이다. 영화가 이 장면 하나를 위해 처음부터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보는 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후련함과 동시에 영화적 의미도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최고의 시퀀스다. 주류에 저항하는 비주류와 루저들의 반란이 영화의 핵심으로 읽힌다.

 

콩가루 가족이라도 뭉치면 좋지 아니한가라는 영화카피처럼 이들 가족은 막상 뭉치고보니 제법 그럴싸한 하모니를 이루며 적당히 화합도 되는 가족이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는 가족이 아닐까 싶을 만큼.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그들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하고 거기서 그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늦게나마 절실히 깨닫게 된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던가. 하나의 사건이 계기를 만들어 사람을 각성시키고 전화위복의 발판을 마련한다.

 

안타깝게도, 관계의 역전현상을 마주하게 된다. 부모 위에 자식, 남편 위에 아내, 스승 위에 제자. 일반적으로 원조교제하면 여학생이 피해자로 인식이 되는 통념을 뒤엎어, 사실은 여학생이 가해자고 상대 중년남성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관습화된 우리들의 통념을 감독은 뒤집고 있다. 좀 아쉬운 게 있다면, 학교 문제나 원조교제 그리고 인터넷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이런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그저 에피소드의 한 형태로만 다뤘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우리 사회의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관객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불편한 부분은 조금 있지만, 그럼에도 사회적 문제를 환기 시키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는 점에선 칭찬받을 일이다. 생각해보니,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좋지 아니한가>에서 단순히 에피소드로만 그친 게 아니라 영화의 중심플롯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었다. 감독이 거시적인 담론을 이야기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서 사용된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심 씨네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우정출연으로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을 맡고 있다. 일종의 구세주 역할이랄까. 심 씨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볼 수도 있겠다. 깨어있지 않고 잠들어있는 인간들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훌륭한 영화는 대개 감독이 관객 몰래 소품이나 미장센을 통해 은밀히 캐릭터의 성격을 부여하거나 영화적 장치를 심어놓아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에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언급을 하자면, 박해일이 용선에게 자기가 학창시절에 만든 단편영화를 보여주겠다고 말할 때, 레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라벨이 붙은 비디오테입이 잠깐 등장한다. 재밌지 않나. 한때 영화감독을 지망했던 인물답게 박해일의 방에는 영화포스터도 심심찮게 붙어있는데, 그 중에서 쉐어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문스트럭 포스터가 눈에 띈다. 달(moon)과 사랑에 대해서 유난히 강조하는 감독의 태도로 봤을 때, 분명 우연은 아니겠지~.

 

엔딩을 장식하는, 달이 지구를 떠받드는 듯한 형상은 일종의 은유가 아닌가 싶다. 달이 루저를 상징한다면, 지구는 주류를 의미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풀이하면, 비주류 없이는 주류도 없다가 된다. 주류가 세상의 빛을 보며 찬란한 삶을 누리는 건 비주류의 희생 덕분이라는 거. 근데 그거 아는가. 주류가 처음부터 주류였던 게 아니라 많은 경우 비주류에서 주류로 넘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은 역사가 입증해준다. 어제의 비주류가 오늘의 주류가 되고, 오늘의 비주류가 내일의 주류가 된다. 그것이 사회의 진보다. 세상에 혁명을 가져오고 진정한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은 비주류의 몫이다. 왕따, 루저, 성적소수자, 흑인, 좌파 즉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하는 이들 모두가 비주류다. 음악으로 치면 언더그라운드 뮤직이고, 영화로 치면 인디펜던트 필름이다. 비주류는 주류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배타 혹은 냉대 심하면 박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타성에 젖어있는 주류 사회에 신선한 피를 수혈해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다양성을 주입시키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들은 말 그대로 루저일 뿐이고 약간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난 이상한 괴짜 혹은 융통성 없는 바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고루한 시선을 걷어내면, 그들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악의 온상이거나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가 아니라 단지 다른 생김새와 다른 사고를 가진 똑같이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서로 별 차이 없는 비스무리한 천재 열 명이 하는 일보다 평범하지만 제각기 다양한 사람 백 명이 끈끈한 연대를 이루며 하는 일이 더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에 대해 영화가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좀 더 넓은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관은 좀 더 유니버설(universal)한 우주적인 차원으로까지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용태의 대사로도 언급이 되듯이 대자연의 법칙이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중요한 메시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순리대로 살아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저 현실은 현실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릴 건 흘리고 좀 넉넉하게 살자 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등바등하지 말고 여유 있게 살자.

 

영화 초반에 감독은 가족 구성원의 뒤통수를 한명씩 차례로 카메라 렌즈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의미를 깊이 부여한 장면이라 생각되는데, 이것은 결국 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허무는 작업이다. 우리의 인식체계에 고정화되어 박혀있는 가족에 대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해체하고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가족의 뒷모습과 어두운 그림자를 폭로함으로서 치부를 드러내겠다는 창작자의 태도와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은 오프닝과 엔딩에서 하나의 상징성으로 나타나는 달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달은 사람들에게 앞면만 보여주지 뒷면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영화 속의 대사가 등장한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달의 뒷면은 볼 수 없지만, 대신 내가 여러분들에게 가족의 뒷모습 혹은 우리네 삶의 뒷모습은 엿볼 수 있게 해줄게 라고 영화가 말하는 것 같다. 

 

<좋지 아니한가>는 일상성을 담고 있는 영화다.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일상성은 발견된다. 너무 일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니, 솔직히 상업적인 메리트(merit)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단편영화로 적합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소녀(용선)의 시점으로 장식하는 건, 다분히 의도된 설정으로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결국 소녀의 눈에 비친 가족, 사람, 세상,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 구성원 중에 하필 용선을 화자로 택한 건, 그녀가 제일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용선은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서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선도해나갈 세대이기도하다. 그런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놓인 말 그대로 진짜 주인공이다.  

 

★★★

주류사회에게 날리는 똥침 한방. 진짜 루저는 심씨네 가족이 아니라 그들을 잡종이라 욕하는 막장인생들이다. 만국의 비주류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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