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2003/미국) 장르 범죄, 드라마 감독 거스 밴 샌트 출연 알렉스 프로스트, 에릭 듈런, 존 로빈슨, 얼라이어스 매코널, 조든 테일러, 캐리 핑클리아, 니콜 조지, 브리터니 마운튼, 알리샤 마일스, 크리스틴 힉스, 베니 딕슨, 네이선 타이슨, 티머시 바텀스, 맷 멀로이, 엘리스 E. 윌리엄스 |
줄거리
눈이 시리게 푸른 가을하늘 아래 교외의 한 고등학교.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맘고생이 심한 '존'은 학교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사진이 취미인 '일라이'는 학교 곳곳에서 친구들의 사진을 찍고, 착실하지만 소심한 왕따 '미셸'은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다이어트에 여념 없는 치어리더 무리는 잘생긴 운동선수 '네이선'을 보고 호들갑을 떤다. 마찬가지로 나름의 행복과 고통을 지닌 채 반복되는 일상 속에 놓인 '알렉스'와 '에릭'은 어느 날,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총을 배달 받고는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서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고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
영화가 시작되면, 구름 낀 하늘 아래 전봇대가 보여진다. 화창하게 개어있는 날씨. 프레임 밖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의 음성이 들리고 카메라는 계속 전봇대만을 올려다보고 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끼며 종국에는 미세한 불빛만이 보인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 하루는 알렉스와 에릭이 일을 꾸미는 하루이고 비극의 전날이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 비극의 전조를 알리는 시그널이라고나 할까. 전봇대가 모든 걸 지켜보는 듯한 느낌. 마치 조물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그들의 일상을.. 그들의 마지막 하루를... 곧이어 진한 노란빛으로 물든 나무들을 카메라가 위에서 홅고 지나간다. 카메라가 아래를 비추면 차 한 대가 길 위를 휘청휘청하며 느린 속도로 달린다. 차가 멈추면, 암전상태에서 '존'이라는 이름이 흰 자막으로 뜨고 존과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엘리펀트>는 그 해 칸 영화제에서 이례적으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모두 석권한 영화다. 이는 결론적으로 그 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이 <엘리펀트>에 보낸 열광적인 찬사의 결과물인 셈이다. <엘리펀트>는 굉장히 실험적인 영화다. 할리우드 관점에서 보면, 주류영화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독립영화들과도 다르다. 지금껏 보아온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화라고 말해야 적절할 듯싶다. 아트 필름으로 분류해야겠지만 사실 그러한 분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좀 엉뚱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엘리펀트>는 1994년에 같은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펄프 픽션'(물론 감독상은 수상 못했지만)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실험적이고 뭔가 혁신적인 작품을 결과물로 내놓아 (칸) 영화제에 이슈를 몰고 왔다는 부분이 그렇다. 그것은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실험이며 기존의 주류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고 독창성과 신선함을 통해 일종의 영화적 충격을 줬다는 점이다. 가장 큰 예로, 시간관념의 파괴를 들 수 있다. <엘리펀트>의 내러티브는 '펄프 픽션'과 마찬가지로 선형구조가 아니다. 내러티브는 인물의 시점에 따라 교차되고 반복된다. 대표적인 장면 하나를 들어보자. 일라이와 존이 복도에서 만나 사진을 찍을 때, 미셸이라는 여자애가 뛰어가며 두 사람 옆을 지나간다. 이 장면은 정확히 영화에서 총 세 번 반복된다. 처음엔 존의 시점으로 그 다음엔 일라이의 시점으로, 마지막엔 미셸의 시점으로. 시점마다 각각의 고유한 의미는 다 다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엘리펀트>를 보는 짜릿함 중의 하나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 <엘리펀트>는 이틀을 다룬다. 알렉스와 에릭의 하루 그리고 그들의 하루. 그것은 가해자의 하루와 피해자의 하루이며 동시에 그 반대이기도 하다. 여기서 거스 밴 샌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들의 마지막 하루다. 거스 밴 샌트는 그들의 마지막 하루를 조용히 따라간다. 평온하기만 했던 그들의 일상은 순식간에 뭉그러져 피범벅이로 변하고 굉음과 화염에 휩싸인다. <엘리펀트>는 거스 밴 샌트가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슬픔보다는 처연함이 느껴지고 아픔보다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솔직히 관객인 나는 당혹스럽다. 해리스 서바이즈의 카메라가 렌즈를 통해 사태를 그저 관망하듯이 관객인 나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건 영화에서 살아남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엘리펀트>는 영화라는 느낌보다는 현실 그 자체로 느껴진다. 참 웃긴 얘기지만, 영화가 현실 같고 현실이 영화 같다. <엘리펀트>는 미니멀리즘 영화다. 혹은 극사실주의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영화적인 기교나 치장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오로지 사실 그 자체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만을 담아내겠다는 연출자의 의도가 담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영화적 순수성은 <엘리펀트>로 하여금, 날 것 그대로의 폭력의 생생함과 무시무시한 파괴력, 서늘한 공포를 뿜어내게 만든다. 이 영화는 총격장면에서조차 효과음이나 음악을 깔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 영화에 나오는 총 소리나 폭탄소리는 실제 소리다. 그렇기에 더 공포스럽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하나 충격적이었던 건, 총기난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들의 태도나 대처하는 모습들이 생각보다 너무나 침착하고 차분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그런 일을 많이 겪어본 것처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감독의 태도일 수 있다. 거스 밴 샌트는 너무나 냉정할 정도로 감정의 동요 없이 묵묵히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감독은 소격효과를 통해 인물과 관객간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게 만들어 관객들로 하여금 철저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만든다. 알다시피, <엘리펀트>는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말 그대로 모티브만 따와서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들었다. <엘리펀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의례있을 법한 오프닝이나 엔딩에서의 해설자막이 없다. 그저 그들의 마지막 일상을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거스 밴 샌트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통해 프로파간다를 해대는 마이클 무어(개인적으로 마이클 무어를 좋아하니 오해는 마시라)와 달리 어느 한쪽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엘리펀트>에서는 감독의 개인적인 주관이나 의도를 발견할 수 없다. 어떠한 관점도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영화의 제목과도 관련이 깊다. '엘리펀트'는 다 알다시피 코끼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뭐? 내용은 이렇다. 인도의 한 장님이 코끼리를 만졌는데 만지는 부위마다 코끼리를 각각 전혀 다르게 묘사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는 결국, 보는 사람의 시점이나 각도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콜럼바인 사건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사실 일반적인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이클 무어의 방식이 명쾌하고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볼링 포 콜럼바인'은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극영화 못지않은 재미를 안겨다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거스 밴 샌트는 극적인 드라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오직 사건의 본질에만 충실한 태도를 보인다.
<엘리펀트>는 내러티브의 영화가 아니다. 내러티브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분명 이 영화를 보고 욕하거나 분개할 게 뻔하다. <엘리펀트>는 정서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한 올바른 감상법은 그저 영화 자체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천천히 곱씹어 보는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재미는 단순히 이야기적인 재미 즉 오락성에만 있지 않다. <엘리펀트>를 볼 때, 정서를 주욱 따라가다 보면 그전과는 다른 차원의 재미 바꿔 말하면,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용이 뭐 있나? 왕따 둘이 학교에 쳐들어가 학생과 교사에게 총기 난사한다- 그게 전부다. 다만 그 여백을 채우는 건, 그들의 나른한 오후의 평화롭기만 했던 일상과 결과로서 보여지는 비극 뿐이다. 거기에 더해서, 찬란한 영상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정서가 깃들여있다. 심지어 이 영화는 자막이 없어도 이해될 정도다. 대사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말 그대로 쓸데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엘리펀트>에서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플롯에 전혀 기여를 하지 않는 대사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대사는 그냥 우리가 일상적으로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 혹은 부모님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들이다. 그러니까 아무 의미없는 잡담에 불과한 것이다.
<엘리펀트>의 특징 중 하나는, 가끔씩 보여지는 슬로우 모션이다. 사실 슬로우 모션은 영화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기법이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다 의미가 있다. 오우삼이 슬로우 모션 기법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감독 중의 한사람이다. 오우삼을 포함하여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들은 이러한 슬로우 모션을 폭력을 미화하거나 일종의 과시욕으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스 밴 샌트는 그런 부르주아들과는 다르다. <엘리펀트>에서 그는 순간에 대한 강조로서 슬로우 모션을 택한다. 그들에게 그 날은 마지막 하루이기에 순간순간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순간(moment)을 영원히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늘려보고 싶은 것이다. 거스 밴 샌트는 이렇듯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슬로우 모션을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그만의 연출 스타일이다. 카메라는 한없이 인물을 관망하거나 인물의 뒤를 천천히 끝까지 따라간다. 매우 느리고 조용하게. 그러한 점 때문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겐 분명 이 영화가 고역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관조적인 태도를 의미하고 관객들에게도 그러한 태도로 봐주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거스 밴 샌트는 컷을 함부로 쪼개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자막으로 각각 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물의 시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존'이라는 자막이 뜨면 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결국 그 말은, 각각의 시점에서는 시점에 해당되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관객은 인물의 시점 즉 카메라의 시점을 따라가야 한다. 시점에 해당되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보고 의미를 해석한다. 서로 만날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어느 지점에 가면 시점이 한데 모아져 같은 공간에 놓이게 되고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하고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내 인생에서 나는 주인공이고 타인은 조연이다. 반대로 타인의 인생에서 타인은 주인공이고 나는 조연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동시에 타인으로서도 존재한다. 시점의 평등한 분배는 모두가 주인공이자 모두가 조연임을 말해준다. 만약 그들이 조연이라면 주인공은 누굴까? 아마 사건 그 자체일 것이다. <엘리펀트>는 관객에게 질문만 던지는 영화다. 또 하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너무나 소중하고 또한 그들의 이름(존재)을 기억하고자하는 감독의 바램 때문일 것이다. 하나 재밌는 건, 이 영화에서 학생 역할로 나오는 배우들은 전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으로 뽑아 연기를 시켰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최대한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이 영화는 극영화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다큐멘터리('볼링 포 콜럼바인'은 다큐멘터리지만 오히려 극영화 같다)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최대한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여야했다. 학교에 가면 정말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그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선 전문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는 리얼리티의 획득을 가져온다. 더 놀라운 건,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가 포틀랜드의 어느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왜 화면비율을 4대3으로 했을까? 아마도 관객들로 하여금 최대한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여백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알렉스의 입에서 나왔다.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이로다." 이 한마디가 <엘리펀트>의 모든 걸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눈부시게 화창해서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평화롭던 오후에 고요를 뚫고 터져 나오는 폭탄소리와 총탄음은 섬뜩할 정도의 서늘한 공포를 선사한다. 옐로우는 <엘리펀트>를 상징하는 색상이다. 심지어 존이 입고 있는 티셔츠도 머리 색깔도 다 노란색이다. 마치 현기증을 유발하는 밝은 색의 화사하고 찬란하며 눈부신 영상은 영화의 비극을 더 고조시킨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된다. 왕따가 왕따를 살해하는 아이러니. 히틀러에 대한 다큐멘터리, 폭력게임과 같은 총기난사의 이유가 단서로서 제공되긴 하지만 어떤 게 정확한 원인인지는 단정짓지 않는다. 오직 결과에만 집중한다.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원인 따윈 관심조차 없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흐르는 가운데 슬로우 모션과 롱테이크로 보여지는 운동장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엘리펀트>의 음악은 글루미한 톤의 영상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며 정적 속에 폭발하는 비극의 여운을 극대화시킨다. <엘리펀트>는 엔딩도 할리우드적이지 않다. 흔해빠진 비극적인 엔딩이 아니다. 마치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다가 끝부분에서 갑자기 딱 멈춘 느낌이다. 엔딩 같지 않은 엔딩이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봐야 한다. 가시적으로는 엔딩이지만 비가시적으로는 엔딩이 아니다. 엔딩 이후의 장면은 관객이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내 생각에 알렉스(아마 자살해서)도 그리고 그가 죽이려 했던 커플도 모두 죽었다. 공교롭게도 커플에서 남자인 네이선은 극중에서 알렉스에게 계란을 던졌던 몹쓸 놈이다.
그들의 마지막 하루는 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비극의 죽음이 그들에게 덮치면서 그 하루는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악몽 같은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다시 카메라가 구름 낀 하늘을 비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은 그대로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악몽 같은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새는 지저귀며 살아남은 자들의 일상은 계속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
★★★☆
픽션보다 사실이 더 끔찍함을 제대로 알려주는 영화.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서늘한 공포를 안겨준다. 눈부신 영상과 지나치게 밝은 색감은 금세라도 어지러움을 유발시키며 곧이어 있을 파국을 예고하듯 아찔하기만 하다. 정적과 형형색색의 화려함에서 터져나오는 폭력이 진정한 공포임을 거스 밴 샌트는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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