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죽음 / 이성복
찰나21
2019. 7. 1. 21:35
□ 1
키 큰 말 한 마리
검은 눈을 껌벅거린다
몇 번 더 껌벅거리다가
종내 눈을 감는다
말의 속눈썹이
파리 다리에 난
무성한 털 같다
검은 철사로 엮은 꽃
□ 2
거친 산비탈에 엎어진 그대가
물 속에 잠기고
물 먹은 쥐처럼 배가 불러도
비는 나직이 내려
귓바퀴 속으로 흘러든다
비는 내려 귓바퀴 주위로
헛된 왕관 모양의 경이를 만든다
□ 3
비는 시멘트 바닥과 말라 비틀어진 잔디
위에 왔다 질질 끄을리는 슬리퍼처럼
비는 왔다가 또 갔다 미망인의
뜯어진 옷고름처럼 슬픔은 꿰맬 수가 없다
미완성의 삶을 완성시키려 하지 마라
비는 웃자란 장다리 흉한 꽃머리에도 왔다
녹물처럼 비는 왔다가 황토 언덕
무너진 눈두덩만 남기고 갔다
□ 4
가난한 죽음에는 화환도 음악도 없다
그저 장식되지 않은 슬픔이다
고인의 영정 위에 내리는 비는
웃고 있는 고인을 찡그리게 만든다
음악도 화환도 없는 영결식에
아버지, 아버지! 라고 되뇌이는
목쉰 미망인의 탄식 위에도
비는 링거 방울처럼 천천히 떨어진다
하마, 이 어두운 날에 남녘 땅
형제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오나
비 그치면 추녀 밑 거미줄에
사나흘 맑은 슬픔이 구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