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Se7en

찰나21 2015. 12. 31. 19:39

 

 

 
 
  쎄븐 (1995/미국)


  장르 범죄,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감독 데이비드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먼, 귀네스 팰트로우,
          리처드 라운트리, R. 리 어미,
존 C. 맥진리,
          줄리 아라조그, 마크 분 주니어, 존 카시니,
          레지널드 E. 캐디,
피터 크롬비, 호손 제임스,
          마이클 매시, 릴랜드 오서, 리처드 포트노우,

          리처드 쉬프, 파말라 타이슨, 케빈 스페이시

 

줄거리

단테의 신곡과 초서의 캔터베리 서사시를 근거로 하여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은퇴를 일주일 앞둔 흑인 노형사 윌리엄 서머셋은 첫 사건을 보고 기나긴 살인 사건의 시작에 불과함을 직감한다. 범인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한 일곱 가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차례로 살해한다. 일곱 가지 범죄는 탐식, 탐욕, 나태, 욕정, 교만, 시기 그리고 분노다. 그런데 그 수법이 너무나 치밀하고 잔혹하며 계획적이다. 어느덧 일곱 건 중 두 건의 살인만을 남겨두고 사건은 막바지에 접어들며 범인은 사건을 맡고 있는 두 형사 중의 한 사람인 젊고 자신만만한 데이비드 밀즈를 마지막 타깃으로 지목하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두 주인공 서머셋과 밀즈의 캐릭터부터 보여준다. 우선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주인공 서머셋은 섬세하고 꼼꼼하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완벽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오프닝은 집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 서머셋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갈하게 다려진 새하얀 셔츠(피부색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를 입고 있는 그는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서랍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만년필과 권총 한 자루, 배지 등을 하나씩 차례로 챙긴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얌전히 놓아둔 방금 다려 놓은(?) 듯한 말끔한 정장 외투를 바로 입지 않고 겉에 묻은 작은 보푸라기를 기어이 떼어 내고서야 몸에 걸치고 출근길에 나선다. 아마 평상시에도 그의 출근길은 이러한 패턴으로 반복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 패턴을 중시하는, 패턴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유형이다. 또한 그것은 도시인, 현대인의 기질이자 정신병이기도 하다. 그를 패턴주의자(?)라고 확신하는 근거로는 일단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살인("탐식"Gluttony)이 일어났을 때,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경감의 만류에도 그는 범인의 살해 동기가 없다는 이유를 들며 이것은 연쇄 살인의 시작이라고 단언을 한다. 두 번째 살인("탐욕"Greed)이 일어나자, 그는 단번에 앞의 "탐식" 사건과 연결 고리를 만들며 7가지 죄악(Seven Deadly Sins)을 발견해 낸다. 철저하게 패턴에 입각해서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주인공 밀즈가 끼어든다. 불쑥 살인 사건(본 사건인 7가지 죄악과는 무관한 오프닝에서의 사건) 현장에 예의 그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고 나타나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서머셋 형사와 관객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 형사답게 기운이 넘쳐 보인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말이다. 뭔가 나사(?)가 풀린 듯하고 자유분방하며 시건방진 태도를 보인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늘 신중해 보이는 서머셋과 달리 마냥 해맑은 어린애처럼 활달하기 그지없는 밀즈는 딱 봐도 신참·애송이 티가 물씬 난다. 성격이 급하고 조심성이 없으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또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달까. 마초 성향의 소유자이다 보니 섬세함이 떨어지고 감성이 결핍되어 있으며 대신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어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거기다 불량기에 허당 기질까지. 그를 어린애 같다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감정 조절 능력을 상실한 인물이다. 본인 말마따나 (그때그때) 감정을 쏟아내야 살 수 있는 인간이다. 뭐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거지. 분노 조절 장애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그의 성격은 영화에서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비극으로 귀결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고민과 철학, 성찰도 없고 그 무게를 알지도 못하는 순박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한낱 꼬맹이에게 살인 사건은 마치 취미로 즐기는 게임이나 포커, 수수께끼 퍼즐 맞추기 놀이와도 같고 살인 사건 현장은 운동장(playground)과 같아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자 주무대이며 형사라는 직업은 이런 모든 재미(?)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이러한 솜씨 자랑(?)을 통해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역시 모든 면에서 선배 형사 서머셋과는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머셋은 형사이긴 하지만 철학자 또는 사색가에 가깝거든. 그야말로 어른의 자격을 소유한 인물이다.

 

외향적인 면에서도 둘은 서로 정반대다. (피부색에 있어) 흑과 백의 대조.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는 서머셋과 밀즈 두 캐릭터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발상을 시도한다. 가령 고참은 흑인이고 신참은 백인이다. 흑인 서머셋은 말수가 적고 온화하며 신사 같고 지식인스러운 풍모를 드러내는데 반해 백인 밀즈는 말이 많고 불평불만이 많아 투덜대기 일쑤며 한량(?) 같고 단순무식한 면모를 보인다. 숱한 할리우드 버디 무비에서 거의 일반적으로 그려지던 흑과 백의 절대적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밀즈가 얼마나 수다스러운(?) 인간인지는 그가 첫 번째 살인 "탐식"(Gluttony) 현장에서 혼자만 신나게 떠들다가 조용히 해달라는 서머셋의 제지를 받자 눈치를 보고는 입속말로 계속 웅얼웅얼 대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렇듯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서로 정반대로 다르기에 조화를 이루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었으리라.

 

서머셋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외롭게 혼자 산다. 그에겐 처자식이 없다. 반면 밀즈는 어여쁜 아내와 자식은 아니지만 애들이라고 부르며 자식과 다름없이 끔찍이도 아끼는 개들과 함께 산다.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까지(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아내가 살해되고 나서야 범인의 입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여기서 데이비드 핀처는 또 다시 발칙한 시도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린다. 적어도 결말이 벌어지기 전까지 관객들에게 혼자 사는 서머셋은 애처롭고 처연하게 여겨지고 그에 반해 가정이 있는 밀즈는 단란하고 행복하게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이마저도 뒤집는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이 판단 미스였음을.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밀즈는 어여쁜 아내를 잃고 뱃속의 아이도 잃고 형사 배지도 잃고 정신과 영혼마저도 잃게 된다. 하지만 서머셋은 예정대로 형사를 그만두고 조용히 배지를 내려놓으며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는다. 이토록 철저하게 한 사람에게만 가혹한 삶이라니. 아이러니하게도 밀즈는 모든 것을 잃었고 서머셋은 잃은 게 없었다. 소유의 크기가 상실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 모두 공통적으로 잃은 게 하나 있다. 사건의 결과.. 해피엔딩. 근데 여기서 의문. 해피엔딩이란 말이 과연 성립이 될까? 마지막 희생자가 밀즈와 밀즈의 아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존 도우를 예정대로(?) 체포해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하던지 사형대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럼 해피엔딩인가? 설령 그렇게 된다 한들 떨어져 나간 일곱 명의 목숨은 되살릴 수 없다. 그건 이미 진 싸움이었다. 해피엔딩이란 표현이 언어도단이라고 여겨졌던 이유다. 또한 밀즈와 서머셋이 받아든 치욕적이고도 비극적인 결과는 마치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필연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 본들 어차피 살인범 존 도우의 손바닥 안이다. 결론적으로 애초에 해피엔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존 도우가 내린 일련의 잔혹한 심판은 결국 소유(욕)에 대한 처벌(punishment)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무소유(?) 정신을 보여준 서머셋은 처벌의 대상자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지 밀즈는 소유했기에 소유한 인간이기에 그러한 비극의 결과를 겪게 된 건가. 그렇지만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 완전히 무소유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다만 소유에 앞서 그의 행실이 문제였다. 이미 비극의 전조는 깔려 있었다. 밀즈와 서머셋의 첫 만남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밀즈는 처음부터 껄렁껄렁하고 경솔하며 진중함이 없고 사려 깊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불도저식이라고나 할까.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오직 범인만 잡아서 감방에 처넣으면 된다는 식의 주의. 살인 사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저 레고 장난감 조립하는 수준으로 여길 뿐이며 살인 현장을 마치 자기의 놀이터처럼 인식하는 듯보였다. 무턱대고 경험도 없으면서 그런 큰 살인 사건을 극구 자기가 맡겠다고 우기고 서머셋과 자료 조사차 찾아간 도서관에서는 참고 자료를 복사하느라 정신없는 서머셋과 달리 한가롭고 호기롭게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과자나 먹고 있는 태연·태평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첫 번째 살인에서 그는 처음엔 피살자의 죽음을 살해가 아닌 심장마비로 판단을 내리다가 나중엔 시신을 보고 검시관과 서머셋의 말을 듣더니 살해로 결론지으며 "여러분, 살인 사건이군요"라고 장난하듯이 마치 이 모든 게 즐겁다는 듯이 지껄인다. 그 순간 밀즈를 쳐다보는 서머셋의 표정은 "뭐 이런 어이없고 한심한 얼간이가 다 있나"였다. 그가 얼마나 생각이 없고 철이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말보다는 주먹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쉽게 말해 단순무식 형사 캐릭터라고 보면 된다. 논리적 생각과 이성적 판단은 거세(?)된 채 원시적 본능과 감정적 충동에 대단히 충실한 인물.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방금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밀즈는 형사보다는 범죄자의 덕목을 갖춘 인물에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는가. 경찰과 범죄자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밀즈가 딱 그 짝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서로 입장과 처지가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거다. 다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싹이라고나 할까.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밀즈는 경찰복을 입은 범죄자일 수 있다. 밀즈는 감정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해 공격성이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거친 언어를 자주 사용하며 꼴통 기질 또한 가지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스스럼없이 불법을 자행하며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를 실천하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충분히(?) 범죄자가 될 자질을 갖췄지만 그렇게 안된 것뿐이다. 운 때문인지 노력에 의해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살인범 존 도우는 죄수복을 입은 예수(God)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7가지 죄악을 인용하여 자신만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에 의한 율법으로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규정해 사적 처형하며 심판자 노릇을 한다. 철저히 자신만의 룰에 의해 치밀한 계산과 계획 하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수사 과정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일관하는 밀즈 형사와 아이러니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다.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논리를 얼핏 들어보면 일견 공감이 가는 부분도 생긴다. 그러나 진실은 스스로를 신의 대리자라고 착각하는 심각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궤변에 불과하단 거. 끝까지 그는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행위를 정당화하고 타인에게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지적인 면에서는 살인범 존 도우가 오로지 믿을 건 (근거 없는) 자신감과 (똘똘 뭉친) 자존심 밖에 없다는 듯이 구는 좌충우돌의 꼴통 형사 밀즈보다는 우월하다. 비록 오도된 신념과 극악의 행동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신념과 철학, 논리가 분명하다는 점에서는 존 도우가 밀즈보다 나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다. 선악의 경계는 언제나 그렇게 희미하고 모호하며 알 수가 없다.

 

재밌는 장면 하나를 소개하면, 서머셋이 밀즈에게 단테의 연옥편 캔터베리 이야기를 참고하라고 하자 밀즈는 조급하고 게으른 성격 탓에 두꺼운 단테 책을 보기가 귀찮기도 하거니와 시간도 오래 걸릴 듯하고 거기다 그 책을 소화하기에는 자신이 두뇌가 딸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딴 사람에게 부탁해 캔터베리 이야기 요약 참고서를 구해서 읽는 걸로 대신한다. 아마 보나마나 그것도 다 안 읽고 대충 부분만 훑었을 것이다. 본인도 시쳇말로 쪽팔렸는지 서머셋의 눈치를 보며 몰래 그걸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 둔다.

 

족히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경력의 베테랑 형사인 서머셋에게 자신도 동급으로 인정해달라는 오만과 주제도 모르고 지나치게 떠는 허영도 문제. 과도한 자신감으로 용기백배하지만 그만큼 일을 그르치기도 쉽다. 한마디로 겸손의 미덕이 없다.

 

그의 또 다른 실수는 범인에 대해 나이브하게 접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과 서머셋이 주장했던 말들을 너무 간과했다는 것이다. 최대한 증거, 사진, 샘플과 같은 자료를 모두 모아서 잘 정리해 보관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서머셋의 말에 밀즈는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서머셋이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게 자료를 바탕으로 대응·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식 과학 수사파 입장이라면 밀즈는 증거보다는 본능을 따르는 주먹구구식의 일종의 한국식 논두렁(?) 수사파 쪽에 가까운 듯보인다. 그에게는 오로지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목표만 있지 구체적인 방법론은 부재하다. 서머셋이 무관심의 미덕에 대한 반대 입장의 논리로 열변을 토할 때에도 밀즈는 그에 대해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강한 부정으로 일축할 뿐이었다. 아마도 밀즈는 서머셋의 발언이 흉악범들을 옹호하고 감싸는 걸로 여겨졌나 보다. 그런 거부감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동시에 서머셋의 그러한 주장에 다분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듭 강한 부정으로 일관하는 밀즈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상대방(서머셋)에게 투사를 저지르고 있는 밀즈의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서머셋의 말을 구차한(?) 변명과 핑계로 규정하면서 자신은 가해자에서 빠져나가려는 밀즈의 비겁한 수법에 다름 아니다. 평소에도 밀즈는 서머셋의 만류에도 살인범에 대해 땅콩 버터를 온몸에 처바른 채로 여자 팬티를 입고 춤추는 변태로 묘사하거나 도서관에서 책 좀 빌렸다고 대단한 놈이 아니며 그저 미친놈일 뿐이라고 도외시하거나 관심병자라고 단정 짓거나 하는 식의 표현으로 무조건적인 경멸 의사를 표해왔었다. 이런 식으로 서머셋의 말에 태클을 걸고 그가 하는 중요한 말들은 모두 한 귀로 흘려버리며 무시하고 거역하다가 좆 되고 마는 밀즈. 하여간 제멋대로인 캐릭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일에 관심 있다던 밀즈는 정작 아내에게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벌을 받는다. 남편의 무관심은 아내 트레이시를 외롭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것은 LA라는 황폐화된 거대 도시가 만들어낸 공간으로서의 소외이자 (세기말의) 시대가 조장하는 고독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서머셋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결과론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트레이시에게는 처음부터 우울의 그림자, 비극의 그림자 같은 게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결정적인 실수는 남편 밀즈가 사진 기자로 교묘하게 위장한 살인범한테 괜히 화풀이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일에서 발생한다. 그것이 비극의 발단이자 요인이 될 거라곤 그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살인의 대단원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날 일요일, 존 도우가 자수하기 바로 전 시점에 경찰서로 들어가는 밀즈는 입구 안내데스크 직원에게서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메모를 전달받지만 내용은 보지도 않은 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다름 아닌 그것은 아내 트레이시가 존 도우의 살해 위협 속에서 죽기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또는 마지막 작별 인사의 메시지였을 텐데. 존 도우가 자수를 할 때 그의 옷에 흥건히 묻어 있는 피도 트레이시의 피다. 급기야 밀즈는 영화 마지막에 가서는 정신을 아예 잃고 만다. 이런 말이 있지. 적을 선택하더라도 신중하게 선택하라. 그리고 너무 증오하지도 마라. 왜냐면 누군가를 증오하면 할수록 증오한 만큼 당신은 당신이 미워하는 그자의 영혼을 닮아갈 테니까. 밀즈가 그 짝이 아닐까. 연쇄 살인범을 쫓다가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 형사. 결론적으로 무관심이 이들 모두를 죽였다. 무관심의 피해자 존 도우는 광적인 살인마가 되어 또 다른 무관심의 피해자 트레이시를 살해한다. 자신과 동류를 발견한 것. 그녀는 두 번 죽은 셈이다. 남편의 무관심에 의해 한 번 죽고(정신적 죽음) 존 도우의 관심에 의해 실질적인 죽음(물리적 죽음)을 맞이한다. 무관심의 가해자 밀즈는 존 도우의 과도한 관심(?)을 받으며 정신적 살해를 당한다. 무관심의 가해자가 관심의 피해자가 된 것. 반대로 존 도우는 무관심의 피해자에서 관심의 가해자가 되었다. 일종의 복수지. 그렇지만 관심의 피해자는 되지 않았다. 왜냐? 그는 그걸(관심을) 원했고 즐겼기 때문이다.. 어떠한 관심이라도.. 죽음마저도.. 기꺼이. 살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는 경찰의 집중적 관심 표적이 되었다. 당연히 밀즈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트레이스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의 대상이거나 혐오의 대상이었겠지. 시작은 무관심이었으나 끝은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이들을 파국의 죽음으로.. 무관심도 관심도 지나치면 위험하다는 형식적 대조와 의미적 동일의 수미적 아이러니.. 

 

<쎄븐>하면 그 유명한 오프닝 크레디트 (타이틀) 시퀀스를 빼놓을 수 없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독보적인 미학을 뽐내며 범접할 수 없는 독창성으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몰고 왔던.. 현재까지도 강렬함으로 각인되며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쎄븐>의 발명품. 본편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성격의 작품으로 떼어놓고 보아도 손색없는 퀄리티를 자랑하는 카일 쿠퍼가 디자인한 이 예술적 시퀀스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분위기, 정서, 내용 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데이비드 핀처(서비스 정신이 대단히(?) 투철한 감독이 아닐 수 없다)가 본편과 더불어 관객에게 덤으로 안겨 주는 일종의 보너스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덕분에 영화 시작부터 관객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는 시퀀스 속 주인공은 누구이며 내용상의 의미는 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품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것은 영화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연결된다. 다름 아니라 거기에는 살인범 존 도우가 자신의 방에서 혼자 뭔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얼굴은 보여지지 않은 채) 담겨 있는데 스크래치된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화면 속에 사진을 인화하고 지문을 잘라내려는 듯 면도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책장을 넘기고 일기를 쓰고 필름을 커팅하고 체모를 수집하는 등의 그의 행동들이 짤막짤막하게 단편적으로 열거되며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보여진다. 연출과 편집도 예술이지만 음악이 영상의 느낌과 딱 맞아떨어지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낸다. 데이비드 핀처는 (물론 그의 작품을 다 보진 못했고 그의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패닉 룸'도 그렇고 '파이트 클럽'도 그렇고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 꽤 공을 들이고 무엇보다 기가 막히게 창의적으로 잘 만드는 것 같다. 하여간 재주꾼이다.

 

그렇게 강렬한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나면 첫 번째 살인이 행해지는 월요일이 시작된다. 탐식(Gluttony). 음식을 탐한 죄. 밀즈의 말마따나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엄청난 거구의 남성 피살자. 화요일,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탐욕(Greed). 이번에는 잘 나가던 변호사가 피살당했다. 돈독이 올라 온갖 거짓말로 변호한 죄. 이때부터 서머셋은 7대 죄악을 떠올리고 그것에 관한 자료를 찾는다. 아직 5건의 살인이 더 남았다는 말과 함께. 참고로 그는 닷새만 지나면 형사 짓을 그만두기로 약속된 몸이다. 나태(Sloth). 게으른 죄. 애들을 쫓아다니는 호모 마약 밀매자가 희생자. 이 지점에 이르러 극의 긴장감이 처음으로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서머셋과 밀즈 그리고 경찰은 자신들이 살인범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여기서 밀즈의 감정은 폭발하고 만다. 얘기했다시피 이것이 비극의 도화선이 된다. 드디어 모자와 코트로 얼굴을 감춘 살인범과 맞닥뜨리게 된 밀즈는 대낮에 번잡한 도시 한가운데서 범인과 총싸움에 이은 추격전을 벌인다. 역시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야. 여하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도로에 빼곡히 줄을 서있는 차들을 뚫고 어느 후미진 골목 한 귀퉁이에 다다라서야 둘의 대결은 끝난다. 살인범이 밀즈의 머리에 총을 겨누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놓아준다. 뒤에서 서머셋이 쫓아오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살인범이 밀즈에게 최후의 선물(?)을 안기기 위한 작전 변경으로서 여지를 남겨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이 장대한 시퀀스를 보면서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이비드 핀처는 액션마저도 잘 찍는 감독이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액션에 대한 검증은 '파이트 클럽'에서 이미 확인되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크리스 놀런처럼 핀처도 좀 더 스케일이 큰 블록버스터를 찍어 보면 어떨까.. 분명 대단한 결과물이 나올 듯한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독 <쎄븐>에서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데 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고 어둡고 우울하며 음침하고 비관적인 세기말적 정서와 공포를 부각시킨다. 연쇄 살인을 테마로 한 이 영화의 컨셉에 부합되는 장치로서 여기서 비는 하나의 상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욕정(Lust). 희생자는 병을 퍼뜨리는 매춘부. 드디어 마지막 일요일이 다가왔다. 교만(Pride).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면 살 가치도 없다고 여겼던 추한 내면을 가진 죄. 희생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더 추하게 칼로 난도질 성형(?)이 되어 있었다. 이제 두 개가 남아 있다. 시기(Envy)분노(Wrath). <쎄븐>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서머셋과 밀즈가 존 도우와 함께 나머지 2구의 시체를 찾으러 차를 타고 가면서 나누는 대화에 있다. 적당하고 묘한 긴장감이 흐르며 대단한 몰입도를 보여주는 장면. 어쩌면 길지 않은 그 시간 속에 이 영화의 모든 게 담겨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이미 밀즈와의 추격 장면에서 다리를 쩔뚝쩔뚝 절며 도망가는 존 도우를 보고 케빈 스페이시라고 알아 맞혔듯이(그도 그럴 것이 케빈 스페이시 특유의 워킹이 있거든) 여기서도 존 도우의 대사를 통해 희생자가 밀즈의 아내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눈치가 빠르다면 존 도우와 같이 시체를 찾으러 떠나기 전 밀즈와 서머셋이 면도를 하는 샤워실 장면에서 뭔가를 예감한 듯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는 밀즈를 통해 비극적인 결말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식도 그러하지만 동시에 면도라는 행위 자체가 말해주는 의미가 있다. 결국 털을 잘라낸다는 것은 그녀(밀즈의 아내)의 목을 잘라낸다는 것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그녀의 목을 잘라내는 주체는 중의적 주체이다. 물리적 주체(가해자)가 살인범 존 도우라면 정신적 주체(가해자)는 밀즈이다. 존 도우는 어여쁘고 성격도 참한 현모양처 아내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둔 밀즈를 시기(Envy)했고 그래서 그녀를 죽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밀즈는 분노(Wrath)했고 마침내 존 도우에게 사적 처형으로 복수(Wrath)를 감행한다. 분노의 대가는 존 도우는 죽은 시체로 밀즈는 산송장으로 가져다주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두 사람은 어느새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정말 끔찍한 건, 밀즈의 생존이다. 남은 그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죽느니만 못한 삶.. 그게 바로 존 도우가 밀즈에게 안겨준 저주의 선물이다. 평생 상실의 고통과 죄책감과 수치심, 분노와 우울, 후회와 회한 속에 살아가도록 만든 것. 무엇보다 밀즈는 경찰이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되었고 형사 배지를 자진 혹은 강제 반납하고 죄수복을 입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서머셋의 말대로 결과는 존 도우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서머셋과 경찰 특히나 밀즈는 완패를 했다. 존 도우는 사실상 잃은 게 하나도 없다. 그는 어차피 죽게 될 목숨이었고 자신이 계획했던 살인은 모두 성공을 거뒀으며 죽음마저도 스스로 택해 자신이 원하는 가장 편안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예정대로 맞이했을 따름이다. 그는 이미 그 계단에서 밀즈를 보고 단박에 간파했던 것이다. 밀즈가 지극히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먹잇감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밀즈라면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고도 남을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과 같은 그런 상황이라면 밀즈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결과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충격적이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상황이 종결되고 살인범 존 도우가 탔던 뒷좌석에는 밀즈가 앉아 있다. 완전히 혼이 나간 채로.. 그렇게 최고조에 다다랐던 긴장감은 어느새 식어버리고 뼈아픈 아이러니만 허무하게 덩그러니 남았다. 난 그의 미래를 알 것만 같다. 감방에 가거나 정신병원으로 가거나.. 뭐가 됐든 확실한 건 그의 삶은 이제부터 악몽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서머셋은 예정대로 배지를 내려놓고 자유인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한마디를 남기고서.. 헤밍웨이가 말했다. 세상은 멋진 곳이고 싸워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문장의 뒷부분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싶다. 밀즈와 서머셋. 이들의 월요일이 자못 궁금하다..

 

정확히 딱 20년 된 영화. 정작 놀라운 건, 물리적인 시간만큼이나 영화가 촌스러울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간 영화였다. 한번 생각해 보라. 작금의 할리우드가 내놓는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들 중에 <쎄븐>보다 뛰어나거나 동급인 작품이 있던가?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없었던 것 같다. 비주얼, 연기, 연출, 촬영, 편집, 내러티브, 음악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영화.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답게 병적인 완벽주의로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는 정밀한 세공력을 자랑한다.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마디로 극중 인물처럼 미친놈이다. 소위 말해 난놈이다. 스필버그 못지않게 관객을 제 맘대로 움켜쥐며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러한 대중성을 기초로 작가 정신과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지하며 그것들을 대중성 안에 탁월하게 녹여낼 줄 아는 연출자다. 크리스 놀런과 굳이 비교하자면, 핀처의 영화는 덜 건조하고 더 유머러스하며 감성이 펄떡거리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조디악'은 예외로 두자. 이건 거의 현기증이 날 정도의 혼미한 건조함과 탈유머와 지적 이성적 쾌감만을 어필하는 영화로서 명백히 핀처의 실패작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한다. 여하튼 <쎄븐>은 의외로 영화 곳곳에 유머가 배치되어 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극중 인물과 관객들 모두 다함께 웃었던 장면이 있다. 서머셋이 밀즈의 아내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밀즈의 집을 방문한다. 이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우당탕탕 소리가 나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였다. 밀즈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서머셋이 하는 말, 아늑하면서 편안하고도 덜컹거리는 집이군요. 그러자 모두가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순간 '다크 나이트'에서 모건 프리먼이 했던 내용은 다르지만 유사한 형식과 투의 대사가 떠올랐다. 단지 우연의 일치인가. 글쎄..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이건 여담인데 남은 2구의 시체를 찾으러 밀즈와 존 도우를 차에 태우고 모건 프리먼이 운전을 하는데 순간 엉뚱하게도 그 모습에서 문득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가 연상됐다. 유머하면 이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싸늘하고(?) 썰렁한 유머이긴 한데, 극중 결말 부분에 살인범이 말한 시체를 찾으러 밀즈와 서머셋, 존 도우가 사막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다. 죽은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외치는 서머셋의 말에 존이 하는 대답.. "내가 안 죽였어." 언중유골의 자격지심 유머이면서 살 떨릴 만큼의 긴장과 불안이 교차하며 감도는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관객의 급소를 찌르는 유머였다. 이 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한 더라이어스 콘지는 장 피에르 주네와의 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델리카트슨 사람들'이 있다. 대니 보일의 '비치'도 유명하지. 잘은 모르지만 그는 주로 어둡고 음침하며 현란하고 과잉된 비주얼을 보여주는데 탁월한 촬영 감독이 아닌가 싶다.

 

이 자리에서 배우들을 언급 안하고 넘어갈 순 없다. 브래드 피트의 열연과 모건 프리먼의 호연이 돋보였다. <쎄븐>은 브래드 피트가 (덜떨어진) 병신 같은 캐릭터로 나오는 영화들 중 하나. 확실히 이 당시만 하더라도 꽃미모를 자랑하던 그였다. 커리어 상으로도 절정이었는데 당시에 '가을의 전설'로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기였기에 이 영화 <쎄븐>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굉장히 컸을 것이다. 모건 프리먼의 연기에 대해선 말하면 입 아프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사생활에 있어서는 구설수가 있었지만 적어도 연기에 관해선 관객에게 배신감을 준 일이 없는 천생 배우. 언제나 중후하고 안정적인 연기에 인간적인 매력과 편안한 목소리로 캐릭터에 불어넣는 영혼의 섬세한 터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마스터피스다. 덧붙여서 난 태어나서 그토록 기품 있고 교양이 넘치며 심지어 성자(?) 같은 형사는 처음 봤다. 한국 영화에서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형사 캐릭터지. 모건 프리먼이기에 가능했던 일종의 기적(?)에 다름 아니다.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난 <쎄븐>에서 씬 스틸러를 뽑는다면 케빈 스페이시가 아니라 귀네스 팰트로우를 선택하련다. 물론 영화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갑자기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등장해 충격적인 반전과 깜짝 놀랄 만한 연기를 보여준 케빈 스페이시를 과소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감독은 그의 깜짝 등장이 가져다 줄 파급 효과와 철두철미한 스포일러 봉쇄를 위해 케빈 스페이시라는 이름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빼버리고 엔딩 크레디트에 배치해 버리는 노림수를 발휘하기도 한다). 다만 <쎄븐>에서의 케빈 스페이시 연기는 이젠 왠지 좀 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전의 아이콘.. '유주얼 서스펙트'.. '데이비드 게일'..과 겹치는 느낌이라 식상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케빈 스페이시의 등장을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오래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하튼 귀네스 팰트로우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기존의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 난 귀네스 팰트로우가 할리우드에서도 실로 과대평가된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아니었다. <쎄븐>에서 그녀의 등장은 단 서너 장면에 불과하지만 웬일인지 잊히지 않는 인상적인 연기로 각인된다. 특히나 모건 프리먼과의 레스토랑 씬에서 보여준 연기는 백미였다. 생각해 보니, '리플리'에서 조연임에도 굉장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줬었고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코미디이고 이름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잭 블랙보다 비중이 적긴 했지만 괜찮은 연기였다. 이제 보니 과대평가가 아니라 내가 그녀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네.

 

지금도 기억하는데, '살인의 추억'이 개봉할 때 기자들이 붙여준 수식어는 한국판 세븐이라는 타이틀이었다. 그 후 핀처의 '조디악'이 개봉하자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부르더군. 이 몹쓸 아이러니. 영화 <쎄븐>은 벨벳 같이 우아하고 세련된 고품격의 클래식 필름 느와르이다. 서머셋이 도서관에서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라장조 작품번호 1068번 중의 "아리아"가 흐르는 가운데 7대 죄악에 관한 책을 찾는 장면은 이 영화를 확실히 클래식 범죄 스릴러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이 장면 하나가 영화의 전체 무드를 장악한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연쇄 살인마 영화가 이토록 세련되고 격조 있으며 우아할 수 있다니. 놀랍다. 역시나 <쎄븐>은 할리우드 영화이고 미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반면 '살인의 추억'은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있는 한국 영화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클래식 음악 대신 유재하 노래가 흘러나온다. <쎄븐>과 '살인의 추억'이 잘 만들어진 범죄 스릴러인 것은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완성도도 있지만 시대와 공간에 맞게 정서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쎄븐>은 비범한 영화다. 일단 제목만 보더라도 그렇다. 세븐은 성경에서 말하는 7가지 죄악(단 영화와 달리 성경에서는 탐욕이 'Covetousness'로 분노가 'Anger'로 나옴)을 모티브로 삼고 일주일간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흔히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7이라는 숫자는 러키 세븐이라고 해서 행운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정반대로 저주의 숫자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또 한 번 핀처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살인범 존 도우의 방 침대 머리맡에는 붉은색 대형 십자가가 놓여져 있고 서랍 안에는 성경이 들어있다. 결국 이것은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신(God)의 작품 천지 창조(= 성경, 일주일, 십자가, 밀턴의 실낙원)를 비웃고 거기다 침을 뱉는다. 유럽 중세 시대를 사로잡았던 망령은 다름 아닌 기독교였고 그것이 현재는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감독의 일침이다. 이 영화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또 하나는 무관심이다. 자본주의로 관계의 파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공동체가 와해된 사회에서 무관심이 보편화되어 버린 현시대에 메스를 들이댄다. 결국 이 모든 일은 무관심에 잠식당하던 한 인간이 모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벌인 극악의 행동이었으니까. 영어로 John Doe(존 도우)는 성명 불명의 사람, 아무개를 뜻한다. 이는 무관심을 존 도우라는 이름으로 은유화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 도우는 일반적이지 않은 이름이므로 오히려 눈에 띄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이게 바로 역설의 힘이다. 무관심을 역으로 이용해 관심의 대상으로 바꾼 교묘하고 교활한 전략이었던 것. 무관심과 종교적 도그마.. 결국 한 사회가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히 소외시킬 수 있는지.. 한 개인에게 거대한 망상과 분노를 가져다주고.. 그것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그것이 주위에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그것이 존 도우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씨앗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

역시 명성대로다. 걸작으로 추앙받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세븐은 저주의 숫자에 다름 아니다. 언러키 세븐. 영화에서 감독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건, 두 가지다. 무관심과 종교적 도그마. 이 두 가지가 존 도우라는 괴물을 만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브래드와 귀네스는 이 영화를 계기로 한때 연인 사이였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