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2003/한국)
장르 코미디, 범죄, 드라마, 공포, SF,
스릴러
감독 장준환
출연 신하균, 백윤식
감상평
나의 평가 ★★★★☆
코미디로 시작해 드라마로 귀착되기까지 액션 활극, 로맨스,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SF 등 오만 장르가 뒤섞인다. 하이브리드 장르 영화다. 무엇보다 이렇게나 상충되고 이질적인 장르들의 결합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영화의 탄생. 이 영화야말로 외계에서 온 영화 같다. 영화사에서 가장 개성 있고 독창적인 데뷔작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야심 찬 데뷔작으로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재기 발랄하게 시작해서 관객의 가슴에 돌덩이를 얹는 것으로 끝맺는다.
거장들은 하나같이 새디스트인가. 박찬욱도 그렇고 故 김기덕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의 장준환도 그렇다. 특히나 병구와 순이가 때수건으로 박박 문지른 강만식의 발등에 물파스를 바르는 장면은 차마 보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그래도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하면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수준이다.
신하균은 또라이 캐릭터 전문인가. 똘끼 있는 역할에 최적화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광기 같은 게 있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배우의 폭발성이랄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 한마디도 못한 한을 이 영화에서 다 쏟아 내듯 폭발한다. 그가 연기한 병구도 한이 많은 인물이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병구. 순이를 연기한 황정민은 이 영화의 숨은 보석이다. 정말 어디서 저런 배우를 발견했을까 싶을 만큼 유니크하고 순이라는 인물에 적역이다. 외모는 떨어지지만 개성 있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백윤식은 역시 연륜이 있는 배우답게 탁월한 연기를 보여 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잭 니콜슨이 연상되었다. 거장들의 공통점이 있다. 잠자는 재야의 고수를 끄집어내어 유용하게 써먹는 것이다. 봉준호가 자신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변희봉을 그렇게 써먹었듯이 장준환 역시 자신의 데뷔작에서 백윤식을 그렇게 써먹는다. 이 패기만만하고 안목 있는 차세대 두 거장 덕분에 변희봉과 백윤식은 충무로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때 충무로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한국 영화에 암흑기가 찾아오자 텔레비전 드라마로 대거 이동했던 배우들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꽃피던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중견 배우가 되어 충무로로 다시 복귀하는데 변희봉과 백윤식이 거기에 속한다. 이주현은 완전 미스 캐스팅이다. 발 연기에 짜증이 났다. 왜 하고많은 배우들 중에 저런 놈을 캐스팅했을까. 그렇게 섭외가 어려웠나. 이 영화에 유일한 옥의 티가 있다면 요놈을 캐스팅한 거다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형편없었다.
독창적인 영화지만 오마주의 흔적도 보인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유명한 장면에 대한 오마주가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서커스 장면에서 사회자가 순이를 '젤소미나'라고 소개하는데 젤소미나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고전 명작 '길'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는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곡이 삽입곡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엔 경쾌한 버전으로 나오다가 나중엔 애잔한 버전으로 바뀐다. 코미디에서 드라마로의 이동. 희한하게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묘하게 영화와 어울린다.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곡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감성적으로 만들어 주고 영화의 비극성과 병구라는 캐릭터의 상처투성이 내면을 드러내 준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비평적으로는 찬사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참패한 영화다. 장준환의 마이너 감성이 관객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해에 동기인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으로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대박을 터뜨리는 부러운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차기작을 내놓을 수 있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한 사회가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히 소외시키는지 얼마나 처참히 망가뜨리는지를 몸서리치게 보여 준다. 오프닝 장면부터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병구는 미치지 않았다"로 시작한다.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경구를 상기하게끔 한다. 극 중에서도 순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병구를 미쳤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병구는 미치지 않았다. 그게 이 영화의 결론이다. 병구는 미치지 않았다는 진실은 안타깝게도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입증되었다. 현실에서도 이런 비극적인 사례는 의외로(?) 수두룩하다. 난 알고 있었다. 병구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병구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강만식이 외계인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된다는 임무를 누가 병구에게 부여했는가?"이다. 외계인이 별 게 아니다. 병구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놈들이 외계인들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말 그대로 지구를 지키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병구가 키우는 '지구'라는 이름의 개를 지키라는 의미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엄마도 지키지 못했고 순이도 지키지 못했고 지구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지구는 폭발하고 광활한 우주에 텔레비전 하나가 툭 던져진다. 덩그러니 놓인 텔레비전에는 병구의 길지 않았던 삶이 추억되고 있다. 병구의 일기장이 병구의 텔레비전으로 진화하면서 폭력의 역사는 그리움의 역사로 승화한다. 결국 지구의 역사는 개인사로 요약된다. 가장 고통받는 한 개인으로..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이성복-
★★★★
이 영화의 교훈 - 함부로 왕따시키지 말 것. 그렇지 않으면 피 본다는 것. 과정도 흥미롭지만 참신한 결말이 인상적이다. 영화 말미에 강만식이 지구의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너무 진지한 나머지 피식 웃음이 났지만 꽤 그럴싸했다.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기기묘묘한 영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의 에필로그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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